지난 10월 28일, 영국 프로 축구 프리미어리그는 깊은 애도의 물결로 가득 찼다. 레스터 시티의 홈구장 킹파워 스타디움에서 날아오른 헬리콥터가 이륙 후 몇 초만에 추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탑승자는 레스터 시티의 구단주,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를 포함한 5인이었다.
며칠 후, 레스터 시의 경찰 당국과 레스터 시티 구단은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비차이 구단주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레스터 시티, 그가 쌓아올린 ‘외인구단’
레스터 시티의 구단주 비차이는 야망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태국의 면세점 사업체인 킹파워를 운영하며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그는, 2010년부터 꾸준히 레스터 시티에 투자해 레스터 시티의 리빌딩을 이끌었다. 당시 레스터 시티는 전성기에서 내려온 지 한참 된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단주의 아낌없는 투자를 발판으로 서서히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차이의 킹파워 그룹이 레스터 시티의 구단주로 완연히 자리매김한 2013년에 레스터 시티는 영국 프로축구 2부리그인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1부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승격 시즌에는 강등권을 헤매다 간신히 올라갔지만, 그 이듬해인 2015-2016 시즌에는 의외의 선전을 거듭하다 끝내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까지 성공했다.
정말로 그 레스터 시티가 그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참고로 이 우승을 이끈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 범죄로 전자 발찌를 찬 채(청각 장애인인 친구를 놀리는 불량배들에게 폭행을 휘두른 죄…) 투잡을 뛰며 축구를 하던(…) 제이미 바디
- 무명의 알제리 윙어 리야드 마레즈
- 프랑스 2부리그 출신 캉테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였지만 하부리그 임대나 전전하던 대니 드링크워터
- 한물 간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그야말로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인구단 그 자체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흡사 영화같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그 레스터 시티도 토양을 일구어 준 킹파워 그룹, 나아가 비차이 구단주의 노력이 없었다면 한데 모여 그렇게까지 성장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 프로 스포츠에서는 구단주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말 그대로 축구만을 사랑하는 구단주도 있지만 단순히 투자만을 목적으로 하는 구단주도 있다. 최악의 구단주는 팀을 망치려는 의도로 접근해 부채만 잔뜩 쌓아놓고 도망가는 놈사람이다.
비차이 구단주가 레스터 시티를 최초로 인수한 의도는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는 인터뷰도 자주 하지 않고 속내를 자주 드러내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도, 구단도, 지역도 모두 사랑한 구단주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의 행보가 그러했다.
비차이와 킹파워는 레스터 시티를 인수한 이후 소규모이지만 공격적인 투자를 여러 차례 감행하여 레스터 시티의 안정화를 도왔다. 구단의 부채를 차츰 털어냈고, 신축 구장을 인수해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안정적인 수익원을 창출하기 시작했다. 베테랑 스카우터 스티브 월시를 주축으로 한 스카우팅 팀을 조합해 가성비 좋은 선수들을 영입, 팀 전력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오카자키 신지, 로베르토 후트, 크리스티안 푹스 등이 저렴한 몸값으로 팀에 합류했다.
선수를 영입하는 데에는 돈을 아꼈지만, 지역 팬들에게는 무척 후했다. 성탄절에는 홈 구장을 찾은 팬들에게 음료, 음식을 무료로 나눠줬고, 원정길에 오르는 팬들에게는 경비와 머천다이즈를 제공하기도 했다. 영국 축구의 관례와도 같은 지역 커뮤니티의 협약이나 자원 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경기장 시설 보수에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말하자면 지역과 팬의 유대를 형성하는 데 가장 열성을 다한 셈이다.
그러는 동안 그의 고향인 태국에서의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레스터 시티는 태국의 국민 축구팀 반열에 올랐으며(마치 우리나라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위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니폼도 전량 매진되어 영국에 특별 추가 요청을 할 정도였다. 영국 유수의 빅 클럽이 아시아 시장 개척을 위해 큰 돈과 시간을 들인다는 걸 고려하면 구단주 한 명으로 상상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비차이 구단주를 지역 축구팬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그를 사랑했다.
축구도, 구단도, 지역도 모두 사랑해서 사랑받은 남자의 죽음
사고 다음날, 현장은 레스터 시티의 팬들이 추모의 의미로 하나 둘 갖다 놓은 꽃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종이에 적힌 메시지도, 유니폼에 적어 남긴 메시지도 길이는 제각각이었으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레스터 시티를 사랑하고, 레스터 시티에게 소중한 기억을 선물한 구단주를 평생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선수들이나 업계 종사자들의 추모도 잇따랐다. 레스터의 주축 선수인 제이미 바디와 해리 매과이어는 물론, 사고 현장을 우연찮게 직접 목격한 골키퍼 캐스퍼 슈마이켈과 맨체스터 시티로 둥지를 옮긴 리야드 마레즈도 애도와 함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레스터 시티는 창립된 지 134년이 지난 오래된 클럽이다. 하지만 그런 레스터 시티의 가장 빛나는 황금기는 구단주 비차이 스리바다나프라바가 이끌던 지금이었다. 그는 축구도, 구단도, 지역도 모두 사랑했고, 그래서 그들도 그를 사랑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쏟은 마음만큼이나 팬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지금 여기 이 글을 쓰는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