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의 재구성〉(2004)에서 무명 사기꾼 최창혁(박신양 分)에게 크게 수술 당한 업계 대선배 김 선생(백윤식 分)이 분을 못 참고 총을 챙겨 나가자, 옆에 있던 서 사장(임하룡 分)이 “야 김 선생, 그건 좀 추하다”라고 한마디 한다. 그러자 백윤식이 이렇게 답한다.
늙으면 추해도 돼!
최고의 사기꾼이던 자신을 연거푸 농락한 애송이 녀석에게 분노한 끝에 나온 저 말. 거목 지능범으로서의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머리 대 머리로 싸우는 상도의마저 져버린 부끄러움을 부정하는, 좌절의 자기합리화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늙으면 추해져도 된다는 말은 얼핏 들으면 ‘이 나이 먹고 가릴 게 무어냐’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때까지 성취한 것들로 규정되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말이다. 자신의 역사가 쥐여준 자긍심에 오점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다. 개인의 역사, 즉 생애를 통해 사람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다.
오점 없는 삶을 바라는 건 보편적인 희망이다. 그 바람이 간절하게 되면 지략 대신 총으로 복수하려는 김선생처럼 자신이 바라던 이상적인 생의 가치마저 저버릴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지금의 자신을 수성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신을 부정하는 추함이 그럴 때 나온다.
반면 젊을 때의 추함은 관용의 시선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며 끝없이 비틀거림을 반복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삶의 진폭을 좁혀나간다. 때문에 젊은 사람의 추태는 아무런 목적 없는 실수의 영역에 곧잘 들어간다.
유명해지겠다고 시작부터 끝까지 욕으로 도배한 개인방송을 하건, 저쪽 진영 녀석들이 원래 틀려먹은 거니 마음껏 조롱해도 된다고 여기건 ‘아직 어리니까’로 치부할 시간적 여유 정도는 있다. 어차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서로 간섭하고 보정해 나가게 될 것이라서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먹고 나서의 추함은 위에 썼듯 자신의 관성력을 지키기 위해 외력을 제거하려 할 때 오는 경우가 많다. 실수라기보단 차라리 의도에 가깝고, 의도라기보단 관계를 개의치 않겠다는 무시에 더 가깝다.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고 결과적으로 그 감정을 가진 존재도 무시하게 되는 건 나이와 성취가 일정 정도에 다다른 이들의 꼰대질에 반드시 끼는 추한 요소다.
인터넷이 발달한 세상이다 보니 근래엔 유명인의 여러 언행이 대중에 곧장 공개되고 종종 비난을 받기도 한다. 작가, 맛칼럼니스트, 활동가가 욕을 먹는 장면들을 본다. 유명인들과 대중이 서로 갈등을 빚는다. 보다 보면 개개의 사안을 파고들어서 조목조목 무엇이 왜 잘못된 건지 짚을만한 게 보인다.
그 장면들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개별 사례들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공격 대상이 되는 유명인들의 공통된 태도다. 물론 유명인이라고 해서 사사로운 일에서까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러나 어떤 분야의 일가를 이루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면 영향을 받는 대중은 그 사람의 생애 동안 계속된 정진의 긍정적 면이 녹았으리라 믿고 수용하려 한다.
그 이유 때문에라도 유명인의 태도는 그가 벌인 정진의 요체로서 대중적 판단의 주요 관찰 지점일 수밖에 없다. 이는 자연현상에 가까우며 그 자체로는 가치판단의 영역이 아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비난이 됐을 때 소란스러워진다.
누군가의 태도를 바라보는 대중의 평균 수준에 대해선 많은 평가가 있겠다. 하지만 종합적인 결은 항상 최고치를 떠올리는 게 대중이다. 아무도 김연아만큼 피겨 스케이트를 탈 순 없지만, 기술의 상세를 모르는 대중이더라도 신체 능력의 최고치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지는가는 직관적으로 판단할 줄 안다.
마찬가지로 대중은 어떤 한 사람이 양질의 사고를 하고 스스로를 도야하면 그 정점에서 어떤 태도가 나오는지 대략 상상할 줄 안다. 어느 정도 사고가 켜켜이 쌓였을 나이 먹은 이들의 성정에 기준이 엄격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의 인성과 태도에 관한 한 대중의 기준은 사회적 평균 기대치이면서 동시에 가장 높다.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처럼.
대중의 손가락질이 최종적으로 가 닿는 곳은 결국엔 태도다. 그리고 하필이면 소란의 장본인인 유명인들이 보인 공통된 모습은 유아적 태도였다. 대중이 가진 미추의 영역에서 그것은 추함에 속했다. 스스로를 치기 어린 수준에 가둠으로써 남을 부러 무신경하게 여기려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걸 보면서 느끼는 추함이다. 다시 말해서 “애들은 그래도 되지만 나이 먹은 당신이 그러는 건 아니지.”다.
이들 갈등을 빚은 유명인들의 유아적 태도는 그들의 성과물 혹은 다양하고 뛰어난 직업적 행위와 다른 별도의 장에서 너무나 확연히 드러난다. 소란이 벌어지는 현장에선 그런 언행의 증거가 그물로 한번 훑기만 하면 속속들이 걸려 올라온다. 몇몇 낱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즉 의식과 행위의 흐름을 이루는 맥락에서 유아적이다.
제아무리 언어를 문학의 공간에 욱여넣은들, 제아무리 조리의 연원을 학식 따져 단언한들, 너희는 진짜 진보를 모른다고 일갈한들, 그들의 직업과 관련한 고유한 사상이 문제의 중심은 아니다. 물론 그것들조차도 조밀하지 못하고 성글어서 꼼짝 못 하게 할 반론이 충분히 가능한데, 그보다 더 문제는 그들의 태도에 깃든 사고다.
사람이 하는 일은 어느 분야든 생각과 사고를 깊이 할수록 끝에서 만나는 게 사람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의문으로 품고 살기에 결국 제 일도 인간으로 귀결되고 만다. 그리고 인간을 질문한다. 그러한 질문의 끝에서 나온 것이라 보기엔 그들의 행태에서 사람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존중의 한 자락이 무너져 보인다는 사실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
유아는 짧게 살았고 생각이 얕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터닝메카드를 사고 싶으면 누가 보건 말건, 엄마가 난처해하건 말건 쇼핑몰 바닥에 드러누워 울며 팔다리를 휘저을 수 있는 게 아이다. 아이는 그래도 되지만 나이의 숫자만큼 생의 누적을 따라 두터운 사고를 해 온 이들의 그런 행위는 정확히 무례다.
언젠가 애니메이션 〈이웃집의 토토로〉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에서 ‘항상 어린아이로 살고 싶다’고 했던 걸 읽은 적이 있다. 그 말은 치기 어린 유아적 태도를 고수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이의 눈으로 인간을 긍정하겠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야 맞다.
지금껏 전 생애 동안 일궈놓은 명성이 있고 그에 감읍해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의 상찬이 있더라도, 자기 길의 끝에서 여전히 인간을 만나지 못한 채 아직도 제 안의 어린아이에만 갇혀서 세상 만물과 사람을 그 치기 어린 눈으로만 재단한다면, 그리하여 타인의 부정과 불쾌감을 하찮은 시비로 여기고 무시로 일관한다면, 그때까지 그가 얻은 것들이 진정 스스로에게 무슨 의미인가 싶다. 지금 상태로 세 살 아이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지금 자신의 성정을 고수하고 스스로 고쳐보려 하지 않을 것인가 질문하고 싶다.
물론 그들 유명인 개개인을 인간으로서 또는 삶의 관점에서 존중하고 긍정한다. 사실 존중이니 긍정이니 하고 말 것도 없다. 그 자체로서 존재를 끌어안는다. 나나 저들이나 모두 인간으로서 허물없는 사람 없고 죽음 앞에 모두가 애처로운 존재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게 인성의 부족함이나 유치함까지 지지하고 긍정하는 뜻은 아니다. 해마다 조금씩 성장하여 수십층의 퇴적이 있었어야 할 내면이 정체되어 있기에 생겨난 추함,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불의함을 느끼게 한다면 그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다.
군집 생활을 하는 인간의 특성상 관계는 중요하고, 관계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사상이 있다. 대중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에 대한 사상을 업의 중요한 잣대로 여기며 그것이 딱히 잘못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해 유치하고 치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업 또한 지금껏 표방하던 위상과 달리 저 아랫급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돈이나 처지 같은 다른 게 아니라 그게 바로 저급한 것이다. 다 함께 사는 공간에서 저급한 태도를 보이지 말라고 지적하는 것은 모두의 안녕에 필시 중요한 일이다.
물론 세상엔 다짜고짜 강짜를 부리는 이들이 너무나 많고 여물지 않은 손끝을 키보드 위에서 놀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유사 이래 가장 고도의 학문적 성취를 공기 마시듯 하는 현대를 살며,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체제를 가진 나라에서, 유사 이래 가장 많은 고학력 인원들을 배출하는 시대에 불특정한 모두를 싸잡아 ‘너희가 뭘 모른다’ 운운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인터넷의 발달로 수십만, 수백만 명이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여러 온라인 담론장에서 변증법적 논리 경쟁을 길게는 수십 년간 훈련한 이들이다. 오만의 과잉이라서 애잔하다.
오래전에 한 TV 예능에서 배철수 씨가 나왔을 때, 진행자가 그에게 젊은 시절 저항의 상징인 락을 했는데 아직도 그러하냐고 물었다. 배철수 씨는 이렇게 답했다.
나이 들어서 투덜대면 그것도 밥맛입니다. 40세 이상의 사람들은 이 세상 이렇게 된 것에 대해서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투덜대면 안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이 투덜대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