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씨의 동영상 유포 협박 사건에서 다시 한번 실감한 두 가지 사실.
첫 번째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성범죄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험부담을 지닌다는 점이다. 피해 여성 연예인은 처음부터 자신이 유포 협박 피해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첫 인터뷰 후 20일이 지나서야 뒤늦게 자신의 피해를 밝혔다. 그가 주저한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는 광경이 증명해주지 않나.
언론에 의한, 누리꾼들에 의한 2차 피해가 엄청나다. 가해자가 비난을 받지만 그 와중에 ‘피해자’는 호명 자체가 오명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런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투 국면에서 성폭력을 고발한 피해자에게 “왜 지금에서야 말하냐”며 온갖 음모론을 제기한 이들도 많았다. 이렇듯 한국 사회는 아주 잘못 없는 성범죄 피해자가 오히려 해명하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두 번째로는 성별 위계에 기반한 ‘남성 권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확인했다. 가해자 최 씨는 스타인 피해 연예인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낮다. 비교적 돈도 없고 명예도 없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자신이 연예인과 연인관계를 맺은 남자라는 점이다.
최 씨는 피해 여성에게 데이트폭력을 가하고, 동영상 유포 협박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나 떳떳했다. 이야기하자는 피해 여성의 전화를 무시했고, 경찰에 신고하고, 디스패치에 제보했으며, 피해자보다 먼저 기자와 인터뷰를 하며 본인이 되레 피해자인 척 굴었다. 최 씨의 이런 여유는 본인이 ‘남성 중심사회’에 사는 남성이라는 자각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남성은 논란에 시달려도 대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금방 생업에 복귀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허위 신고를 하더라도 ‘꽃뱀’ 소리는 듣지 않는다. 영상이 유포되면 남성의 피해는 여성의 피해에 비하면 거의 없다시피 한다.
분명 최 씨는 위에 열거했던, 남성이라는 이유로 갖는 권력과 그로 인한 이점들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런데 최 씨가 이렇게 남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힘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단순히 남성 중심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순 없다.
여러 쟁점이 있지만, 이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인 ‘유포 협박’을 최 씨가 할 수 있던 배경에는 남성사회가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대하는 방식이 있다. 수많은 남성은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며 동조했고, 최소한 방조했다. 연예인 대상의 성범죄 영상이 처음 인터넷상에 등장했던 이후 15년 이상 ‘성범죄 영상 소비문화’는 아무런 제재도 안 받은 채 성장했다(참고: 「남성은 가해자고 분노할 자격이 없다」).
남성들은 ‘국산 야동’이라고 쓰여있던 영상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봤다. 심지어 영상에 나오는 피해 여성에게 별명을 붙이고, 가십거리로 삼으며 성희롱했다. 디지털 성범죄 영상에 나오는 피해 여성이 어떤 고통을 겪게 될지는 남성들이 십수 년 동안 증명해 보였다. 최 씨는 그 점을 이용해서 협박한 것이다.
성범죄 영상을 보고 품평하던 사람들은 남초 사이트에 있는 남성들이었다. 이들은 아마 촬영이나 유포에 가담하는 현행법상 처벌 대상의 범죄자는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들은 주요한 ‘수요’를 만들면서 촬영자-유포자-헤비 업로더-웹하드 업체 등의 커넥션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최 씨에게 욕을 퍼부으려다가도 망설여지는 것은, 나 또한 최 씨의 유포 협박에 구조적으로 힘을 실어준 남성 중 한 명일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성들이 소비하지 않았다면, 퍼트리지 않았다면, 아니 적어도 자정하자는 노력이 있었다면, 그래서 과거에 검경이 더 빠르고 강하게 대처했다면 그런 협박도 먹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많이 늦었다. 정말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디지털 성범죄 영상은 사실상 ‘보는 것도 범죄’로 취급해야 한다. 물론 실제 보는 것만으로 형법상으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자면 이제는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보는 사람은, 또 봤다고 떠벌리는 사람은 ‘성범죄 공범’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제는 예전처럼 ‘문제인지 몰랐다’는 핑계도 안 통하는 시대다.
확실하게 디지털 성범죄 영상은 보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남성 집단 내에서 성범죄 영상 본다고 떠벌리는 이들을 경멸하고 사람 취급하지 않는 분위기 조성이 절실하다. 찍는 인간, 유포하는 인간 그리고 보는 인간은 다 ‘범죄자’로 취급하자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란 말인가.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