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크리스토둘루(Daisy Christodoulou)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 교육 관련해서 내 생각이랑 똑같은 사이다 책 오랜만에 본다. 뭐 사실 교육 관련 책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영국의 교사, 교육학자인 저자는 런던 저소득 지역에서 아이들을 3년간 가르친 뒤 교육학을 더 파고 싶어서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 커리큘럼 안에 있던 인지심리학 성과, 미국의 허버트 사이먼의 이론에 감명을 받고 당시 영국 교과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국 교과과정은 사실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을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은근히 적대했다.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저자가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이라 지적한, 근거 없는 주술이었다. 그 결과 학생의 학습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오던 학교와 교사는 기능부전 상태로 빠져들었다. 대신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은 어차피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니 역량을 신장시켜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나 ‘교사는 수업에 최대한 끼어들지 말고 학생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실생활의 문제해결력을 배워야 한다’는 소리가 통용된다.
저자는 이 일곱 가지 미신이 무엇인지, 그것이 실제 영국 교육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게 왜 미신인지 파헤친다. 제일 충격적인 건 미국의 어떤 역사 수업 모범사례였다. 이 수업의 목표는 남북전쟁 당시 흑인들을 해방하기 위해 몰래 북부로 빼돌리던 ‘지하 철도’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업 대부분은 ‘당시 흑인들이 탈출하면서 먹던 식량인 쿠키’를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서 먹어보는 것으로 채우고 있었다!
이딴 수업들이 영국에서도 학생 주도적 모범수업이라면서 횡행했다. 대신 교사가 직접 지식을 주입시켜주는 전통적 수업을 할 경우 ‘만족스러운 수준이나 개선의 여지가 있는’ 즉 불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게 된다. 자, 그래서 그 일곱 가지 미신은 뭘까?
- 지식보다 역량이 더 중요하다.
- 학생 주도의 수업이 효과적이다.
- 21세기는 새로운 교육을 요구한다.
-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 전이 가능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
- 프로젝트와 체험 활동이 최고의 학습법이다.
-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의식화 교육이다.
읽다 보면 이 모든 게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다. 통으로 풀어본다.
주로 노동당 정부 때부터 사실적 지식은 이제 안 중요하니까 언제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는 역량, 즉 ‘소프트 스킬(soft skill)’을 키우는 게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지식은 역량의 가장 근본적인 기초인데 지식 5, 역량 5 식으로 가르치면 실질적으로 기초를 다져야 할 지식에 쓸 교육시수는 막대한 손해를 보는 셈이다.
(참고로 노동당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저자는 좌우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두 쪽 모두 이 같은 미신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명백히 좌의 문제다. 한국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교육정책을 시정한 게 2013년 보수당 정부인 것만 봐도.)
지식, 특히 사실적 지식이 역량 형성에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인지 메커니즘 때문이다. 인간은 모든 지적 작업을 ‘작업기억’을 통해 이룬다. 쉽게 비유하자면 컴퓨터에 띄워놓는 프로그램 창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인간의 작업기억은 2~3개가 한계인데, 이걸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바로 장기기억이다. 작업기억을 활용해 지적 활동을 하려면 빨리빨리 그 재료들을 머릿속에서 꺼내서 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적 지식을 배우지 못한 채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소리가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원래 알파벳과 문법 규칙을 머릿속에 때려 넣어야 영어 역량이 커지는 것이다. 근데 역량 중심 교육은 알파벳도 제대로 못 쓰는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는 것은 주입식 교육이라는 이유로 등한시한다. 대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뒤 주체적으로 토론하는 팀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에 접근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사실적 지식의 자리를 채우는 것은 1. 인터넷 2. 학생주도 3. 팀 프로젝트다. 어차피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오니 구태여 그걸 암기할 필요가 있겠는가(1). 그리고 교사가 하는 말을 듣고 받아 적는 것보다 학생이 ‘주체적으로’ 뭘 하면 더 머릿속에 많이 남을 테니 교사는 최대한 덜 개입하는 게 좋다(2). 이 같은 학생주도 교육을 최대한 보장해주는 수단이 바로 팀 프로젝트다(3). 이에 맞서는 저자의 주장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대체 사실적 지식을 충실히 익히지 않은 학생이 뭘 안다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는 건가? 학생들보고 어쭙잖게 성인 흉내 내게 시킨 다음에 오롯이 서는 주체적인 존재에요 하면서 칭찬놀이 하는 것이 대체 학습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야구 규칙을 모르면서 야구에 대한 문제를 인터넷 검색한다고 풀 수 있는가? 기초적인 지식을 머릿속에 갖춰놓아야 인터넷을 써서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말미에서 저자는 이것이 굉장히 반교육적임과 동시에 계급 편향적인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7번째 미신이 이와 연결된다. ‘지금 학교 교과과정은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백인 남성의 가치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이나 성적, 인종적 소수자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소리가 영국에서는 공공연하게 나왔나 보다. 저자는 이런 소리에 경악한다. 왜냐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들이, 노동계급이 지식과 교육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했을 때 나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도 19세기를 재현한다.
교육에 대한 평가와 높은 학습수준을 바탕으로 더 수준 높은 교육기관에 진학하는 데 필요한 ‘역량’은 사실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학교가 역량 중심 교육, 학생주도 교육을 운운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면 사교육이 번성할 수밖에 없다. 파행으로 진행되는 교과과정 외 ‘진짜 지식’을 가정에서, 사교육에서 습득해 중무장한 중산층 이상 학생은 노동계층 학생들을 가뿐히 앞서나가며 계급을 재생산할 따름이다. 과연 누구를 위한 역량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이게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역자 후기를 한 번 쯤 읽어보셔도 좋을 듯하다. 역자는 저자가 이 책을 쓰고 나서 영국에서 이런 교육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크게 일었고, 이후 보수당 정부의 정책 선회로 개선이 이루어지는 추세라는 뒷이야기를 말해준다. 한국이 그동안 교육과정 개정을 하면서 참고한 사례가 저자가 비판한 바로 그 영국 교과과정이 아닌가, 그런 의심이 든다. 결론은 주입식 교육 만세다. 일단 외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