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거나, 아니면 천박하거나
학부 재학 중에 철학자 탁석산 선생님의 말하기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때 탁 선생님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면서 사람은 ‘외롭거나, 아니면 천박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여기서 외로운 삶이란 철학자 칸트처럼 이성의 명령에 따라 논리적으로 사는 삶이다. 탁 선생님은 그렇게 살면 고결할 수는 있지만 친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대로 천박한 삶이란 이성보다는 좀 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탁 선생님은 이 경우 삶은 조금 천박할 수 있어도, 사회적 관계는 더 윤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성과 소통의 기술을 키우는 방법은 다르다
탁석산 선생님으로부터 기본적 통찰을 얻었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 발표·강의를 하거나 다양한 종류의 글을 쓸 일이 많아지면서 이 ‘전문성’(expert knowledge)과 ‘소통의 기술’(complex communication skill)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전문성이 높아지면 대중과 소통을 더 못하게 될까? 아니면 반대로 전문성이 없이도 소통만 잘할 수 있을까?
배웠다는 사람들일수록 뻔한 얘기를 더 어렵게 하는 걸 보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리고 나 자신도 때때로 이 두 시험에 빠지거나 유혹을 받는 걸 느끼면서 이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져 갔다. 그러다가 관련된 책들을 읽고 지난 내 경험을 반추해가며 내린 자정적 결론은 ‘전문성’을 키우는 것과 ‘소통의 능력’을 키우는 일은 상호 관계는 있지만 별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만큼 능력 있는 학자라고 할지라도 강의는 형편없을 수가 있다. 그 경우에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 맞춰 자기가 아는 걸 어떻게 포장해 어떻게 전달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특별히 학술적인 영역에서의 소통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말한 설득력 있는 주장의 3요소 윤리(ethos), 감정(pathos), 논리(logos) 중에서 마지막에 치우친 소통이다.
학부 다닐 때 소논문쓰기라도 배웠다면 어떻게 윤리적 영역에 해당하는 규범적 논증(normative reasoning)과 과학적 영역에 해당하는 경험적 논증(empirical reasoning 혹은 data analysis)을 구분해야 하는지 배웠을 것이다. 보통 전자는 가치 판단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사실 판단의 영역이므로 이 둘을 섞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비슷한 맥락에서 신문기자들은 수습 때 부사와 형용사는 빼고 쓰라고 배우는데 이는 과잉된 감정이 팩트를 가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나도 위와 같이 배웠고 이러한 내용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동의한다. 논리의 A, B, C를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논리나 타인의 논리나 날 것으로 보고, 그 논리의 근거가 되는 팩트를 꼼꼼이 따져보고, 마치 건축물의 설계물을 그리듯이 논리와 팩트를 구조화시키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인간은 감정과 편견의 동물
그러나 이런 방식은 전문성을 키우는 데는 좋지만 대중과 소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본인과 타인이 아는 것을 확인하는 데,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기초 지식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데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그 경계를 벗어나면 적절한 소통의 방법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사실 학자들조차도)은 그렇게 논리적으로 편향된 사고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윤리와 감정과 논리가 잘 섞인 주장을 가장 잘 받아들인다. 혹은 근대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경험과 편견에 가장 잘 들어맞는 주장을 가장 잘 따른다.
경제학자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에 따르면 대중의 공공정책에 관련된 선악에 대한 ‘프레임’은 진보, 보수, 자유의지론자에 따라 다음 크게 세 가지의 시각이 존재한다.
- 진보(progressive)의 프레임: 세상엔 억압하는 집단과 억압받는 집단 두 종류가 있다. 전자는 악하고, 후자는 선하다.
- 보수(conservative)의 프레임: 세상엔 문명화된 집단과 야만 집단이 존재한다. 문명은 기존 사회의 안전과 번영이 그 가치를 증명한 것이고, 야만은 이 문명에 도전하는 세력이다. 따라서 야만 집단은 악하고, 문명화된 집단은 선하다.
-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의 프레임: 세상은 ‘자유’와 ‘통제’의 갈등으로 본다. 자유는 대체로 개인의 선택에 관련된 것이고, 통제는 대체로 공권력에 관련된 것이다. 전자가 대체로 선하고, 후자가 대체로 악하다.
이런 세 가지 시각에 대한 분류가 현실적으로 아주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이념형(ideal type)으로서는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특정 주장을 좀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철도 민영화’ 이슈가 있다고 치면 진보측에서는 ‘탄압’하는 정부를 악, ‘저항’하는 노조를 선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보수측에서는 정부의 ‘질서’라는 선에 도전하는 노조의 시위를 ‘혼란’이라는 악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자유의지론자들은 경제적 자유에 대한 개인의 ‘선택’이 정부와 이익집단의 갈등 조율의 결과에 따라 얼마나 ‘통제’되는지 관심을 가지고 그에 따라 선악 판단을 할 것이다.
즉 이렇게 인간이 감정과 편견의 동물임을 인정하지 않고 ‘왜 이렇게 충실하게 논리와 팩트를 제시하는 데도 상대방이 내 주장을 수용하지 않냐’고 답답해한다면 자기 자신도 문제의 일부임을 모르는 것이다. 신의 말씀을 기록했다하는 총 66권의 성경도 독자의 다양한 종족, 계층 등을 배려해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책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이렇게 네 권이나 포함한다.
그렇게 상대방의 시각에서 소통이 필요한 건 종교적 진리나 비즈니스, 정치, 관계에 관한 아이디어에 대해 소통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이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지식(논리 팩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같은 문제를 보는 시각이 나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을 알아야 소통을 한다
소통에 비밀이 있다면 같은 말이라도 상대방에 따라서 다르게 말해야 하고, 같은 글이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대량의 데이터를 통해 상대방을 프로파일링해서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할 만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최신 ICT 기술을 사용하지만 ‘인간을 알아야 소통이 된다’는 소통의 본질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말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악마화’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걸 뜻한다. 나와 다른 사람은 다른 것이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일찍이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먼저 상대방이 나와 다름에 분노하기 전에 상대방이 왜 그런 생각에 도달했는지 그 밑바탕이 되는 ‘경험’과 ‘편견’을 이해해야 한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동성결혼에 극렬한 반감을 품었는데 그건 동성결혼이 그들의 문자적 성경의 구약 해석에 기초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같은 새로운 가족 제도가 그들이 존중하는 가부장적 가계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방의 시각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강화해서는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의 결속력만 키울 뿐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생각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다 훌륭한 인물인가. 전혀 아니다. 결국 논리와 팩트가 중요 사안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단계에 이르려면 민주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수용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상대방의 편견의 뿌리가 되는 감정과 경험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내가 소통하는 목표가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자기 신념의 확인과 만족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소통은 이렇게 인간의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기에 전문성만 늘어난다고 소통의 기술도 같이 좋아지진 않는다.
인간은 컴퓨터가 아니라서 명령어가 입력된 대로 작업을 수행하지 않는다. 논리와 팩트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최선인 소통의 방식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소통의 방식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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