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결혼할 때 됐겠네.
6년째 한 사람과의 연애를 탈 없이 이어나가는 내게 요즘 들어 꽤 자주 이런 질문이 들려온다. 결혼 생각이 없었을 때라면 무례한 질문이라 받아들였을 텐데, 생각을 하게 된 시점부터는 ‘그러게, 이제 슬슬.’이라는 대답과 함께 고민에 빠지게 된다. 사실 ‘결혼은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제도를 껴안기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 없는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이다.
딸, 아이 낳을 거야? 아니면 굳이 왜 결혼하려고 해.
남자 친구랑 결혼을 생각 중이라 했더니 엄마가 한 질문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오롯이 육아에 전념하며 핏덩이 둘을 무사히 키워낸 베테랑 입장에서도 육아는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가사 노동 이외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4년제 대학에서 고등교육까지 받은 딸이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가사 노동에만 전념해야 하는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면 암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와의 인터뷰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면서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두고 집안일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때의 정확한 상황은 모른다. 다만 지금은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어떤 것에 대한 포기가 그때는 ‘뭐 당연한 거지’라고 치부되었을 것 같다. 그런 시절을 거쳐온 엄마 세대도 우리 세대의 삶을 보면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스스로를 묶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세대에게 필요한 제도가 결혼 맞나요?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며 이전보다는 나아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결혼 제도가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했는가에 대해선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장 결혼식 자체만 봐도 이상하다. 왜 신랑만 문밖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신부는 대기실에 앉아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걸까? 결혼하는 주체는 두 사람인데 함께 하객 맞이를 하며 인사하고 이야기 나눌 수는 없는 걸까?
왜 신부 아버지가 신부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주는’ 걸까? 신랑 신부가 처음부터 같이 걸어오면 안 되나? 결혼식에서부터 여성의 위치가 절하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결혼 후에도 이런 분위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혼 후 여성의 삶이 왜 이상한지 알고 싶다면, 올해 전국을 강타한 (내 맘속 기준) 최고의 웹툰 〈며느라기〉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에는 ‘팍스’라는 결혼 대안 제도가 있다던데
팍스(PACS; PActe Civile de Solidarite)는 리오넬 조스팽(Lionel Jospin) 전 총리의 주도로 1999년에 생긴 제도이다. 처음엔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동성 결혼 합법화까지 추진하려 했지만, 엄청난 반대 의견들로 인해 그 논의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팍스 제도가 시작된 이후로 동성 커플뿐 아니라 결혼에 담긴 전통적, 종교적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성 커플들도 활용하게 되었다. 5만 유로(한화 기준 약 6,500만 원)가 드는 거창한 결혼식 행사보다 간소한 결합 방식을 원하는 커플들에게 인기가 높다.
팍스를 맺으면 국가에서 발급하는 증명서에 팍스 여부가 기록되고, 파트너는 배우자로서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세금이나 건강 보험료도 결혼한 부부와 같은 수준으로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혜택을 노리고 위장 계약을 맺는 경우를 대비해 2년이 지나야 결혼한 부부와 비슷한 수준이 된다. 결혼한 부부와의 차이점은 둘의 재산을 공동으로 한다고 명시하지 않으면 서로의 재산은 각자에게 속한다는 것, 파트너 사망 시 고인의 국민연금을 받을 수 없고 자동 상속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 있다.
물론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하지만 결혼의 대안 제도로 유효하게 작동한다. 법률적으로 불완전한 부분이 있다. 파트너와 함께 공증인을 찾아가 유언장을 쓰더라도 양쪽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내용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적인 문제 없이. 그럼에도 2017년 11월 기준으로 해마다 55만 쌍의 커플이 동거하고, 24만 쌍이 결혼하며, 16만 쌍이 팍스를 맺는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인 결혼을 결정하기 전 동거를 당연한 절차로 여기며, 팍스도 결혼만큼 대중적인 제도로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팍스 제도를 통해 3~5년을 지낸 다음에 결혼하는 커플도 꽤 있다고 한다. 함께 살며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결혼한 부부의 3분의 1이 이혼을 결정하는 데 반해 팍스를 해지하는 비율은 10분의 1 정도로 현저히 낮다.
프랑스는 유럽 출산율 1위 국가다. 프랑스에서 팍스 계약을 맺고 함께 사는 미카엘과 마틸다는 각자 약속이 있을 경우 번갈아 가며 아이들을 돌본다. 부부 동반 약속이 있을 때는 시간제 베이비 시터를 고용한다. 가사나 양육을 비롯한 가정 내 활동에서 어느 한쪽이 희생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영아 단계에서부터 잘 갖춰진 육아 복지 시설 및 정책 덕분이기도 하다.
팍스를 맺은 커플에게도 육아 복지 혜택이 제공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은 출산 후 6개월 정도가 되면 탁아소를 찾는다. 덕분에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더라도 걱정 없이 일터로 복귀할 수 있다. 이렇게 아이를 낳고도 마음이 편한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결혼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수 있다.
“우리 결혼하면~”
보는 것도 아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많아지다 보니, 전통적인 결혼 상에 대해 의심도 질문도 많았다. 그래서 남자 친구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그리고 자주 나누었다. 함께 나눴던 대화 중 ‘우리 결혼하면~’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을 떠올렸다.
먼저 일 끝나고 도착한 사람이 저녁 준비하고, 나중에 온 사람이 설거지랑 뒷정리하는 거로 하자.
화장실 청소랑 청소기 돌리는 건 내가 잘하니까 내가 할게. 벌레는 니가 잡아줘^^
거실은 TV보다 서재 중심으로 꾸몄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같이 책도 보고 커피도 마시고 일도 하자.
꼭 필요한 아이템 리스트업하고 거기서 가중치 둘 것들을 생각해보자. 과감히 뺄 건 빼고!
빨래는 어떻게 개? 나는 수건 이렇게 접어.
나중에 우리 애들이랑 여행 꼭 많이 다니자.
내가 한글 가르치고, 너는 영어 가르치고.
명절에 부모님 찾아뵙는 순서는 돌아가면서 하자.
그동안 축적된 대화 덕분인지 서로를 잘 이해하는구나 싶었다. 우리의 삶과 동시에 ‘개인의 삶’도 고려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결혼도 두렵지 않겠다.
세대와 세대 간의 화해
내 옆에 있는 그와의 조정보다는 부모님 세대와의 조정이 더 급하다. 우리 부모님은 진보적인 듯 보수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없이 쿨하다가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애 안 낳을 거면 굳이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가도, 그동안 뿌린 축의금을 거두기 위해서는 좀 더 빨리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꺼낸다. “결혼은 우리 둘이 하는 거지!”라는 반박에 “결혼은 집안 간의 결합이란다.”라는 묵직한 어퍼컷을 날리기도 한다.
너무 다른 가치관 차이에 숨이 막히다가도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엄마 세대가 “여자가 결혼 안 하면 안 되지.”라는 말보다 “결혼하면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까울까 봐.”라는 말이 나오듯이, 나도 내 자식이 결혼할 때가 되면 “어디 결혼 전에 동거를!”이 아니라 “동거도 괜찮고 (그때는 생길지도 모르는) 팍스와 같은 제도도 좋으니 결혼에 대해 신중히 생각해봐.”라는 말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원문: GRETTA의 브런치
‘팍스’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과 프랑스에서의 생생한 실제 경험을 녹여낸 북 저널리즘 콘텐츠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저는 온라인으로 읽었는데, 출퇴근길에 핸드폰으로 읽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