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프리랜서? 좋지, 근데 기술은 있고?」에서 이어집니다.
기술 하나 없이 시작하는 프리랜서 도전에 유일한 등불이 되어 줄 취미와 특기 목록. 며칠에 걸쳐 추가와 삭제를 반복한 끝에 완성한 나만의 목록은 다음과 같았다.
- 책 읽기
- 글쓰기
- 그림 그리기
- 외국어 공부
- 요리
- 핸드메이드 소품 만들기
굳이 취미와 특기를 별개의 항목으로 분리하지 않은 것은 어차피 아마추어의 영역인 이상 요리는 취미이고 글쓰기는 특기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자아 성찰용이 아니라 퇴사 후 직업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기 위해 작성한 목록인 만큼 내가 지금까지 쌓아 온 경력을 버리고 도전할 정도로 좋아하는 분야인지, 콘텐츠로 삼을 만한 잠재력이 있는 분야인지 따져가며 나름대로 신중하게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그래도 저 목록이 너무 평범한 취미의 집합 같아 보이는 것은… 실제로 내가 너무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일들인 동시에 내가 평생 직업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한눈에 들어왔을 때,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혹시 저 목록의 공통점이 보이는가? 전공으로 따지면 몇 개의 단과대학을 넘나들 정도로 관련 없는 항목들이 섞였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혼자서 하는 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목록 중 유일하게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한 ‘외국어 공부’조차 나는 학원이나 스터디 대신 외국 방송이나 유튜브 영상을 보며 혼자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어째서 회사 생활을 그토록 힘들어했는지 새삼 이해가 되었다. 아니, 지금껏 조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섣불리 자책부터 했던 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았대도, 내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일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나섰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취미와 현실이 별개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지도 않는 데다, 내게 주어진 현실적 배경은 대뜸 글 쓰고 책 읽고 그림 그리며 살겠다고 선언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회사라는 장소가 내게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더라면 적어도 내가 괴로운 이유를 더 빨리 눈치챘을 것이고, 그렇게 마음이 곪아 터지도록 자책만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내게 가장 크게 사과해야 할 사람은 바로 무심한 나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앞서 고르고 골라 추려낸 여섯 가지 목록을 바탕으로, 일차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프리랜서 직업군을 쭉 적어보았다.
- 핸드메이드 소품 판매자
- 일러스트레이터
- 요리사
- 작가
- 통역사
- 번역가(문득 든 의문: 어째서 통역하는 사람은 ‘사’이고 번역하는 사람은 ‘가’일까?)
대강의 직업 후보들을 고른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정보 검색이었다. 관련 분야의 프리랜서 선배들이 쓴 책도 구입하고, 각종 카페에도 가입하고, 블로그와 웹사이트를 뒤지며 각 직업의 특성과 전망, 진입장벽 등을 체크했다. 요리사니 일러스트레이터니 하는 직업들은 말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바탕으로 추린 후보일 뿐, 내가 당장이라도 저 분야에서 프로로 활동할 실력이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어떤 직업을 택하더라도 결국에는 기초적인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테고, 시간과 비용이라는 리스크가 들어가는 만큼 신중한 선택은 필수였다. 다행히 요즘은 어떤 분야에 대해서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인지라 기준을 명확히 잡고 시간을 투자하니 각 직업에 진입하는 대략적인 방법 정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시점까지는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여기저기 널린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읽고, 고민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고민의 결과를 공개하기 전에, 우선은 정보 수집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두 가지 사실을 먼저 공유하고 싶다.
첫째, 프리랜서 직업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내가 막연히 ‘번역가, 요리사, 일러스트레이터…’하는 식으로 큼직하게 토막 냈던 직업군 속에는 수없이 많은 하위 범주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번역가는 크게만 잡아도 출판번역가와 영상번역가, 기술번역가 등으로 구분되었고, 일러스트레이터는 삽화가, 그림책 작가, 콘셉트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등으로 구분되었다.
그 분야에서 일하는 프로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출판번역가와 영상번역가는 (마찬가지로 삽화가와 그래픽 디자이너는) 완전히 별개의 직업으로 보아도 좋을 만큼 다른 재능과 성격을 요구하는 직업이었고, 따라서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내가 진짜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결정하고 뛰어들 필요가 있어 보였다.
둘째, 초보자를 특정 직업군의 프리랜서로 만들어준다는 일명 ‘전문가 양성소’가 생각보다 많았다. 미술학원이나 통‧번역 대학원 같은 일반적 교육기관이야 쉽게 떠올릴 수 있지만, 이 외에도 직업명을 검색하면 온갖 전문학교, 학원, 아카데미, 무슨무슨 협회 등이 튀어나와 나를 당장 그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어주겠다고 유혹했다. 개중에는 나름 알찬 커리큘럼을 보유한 곳도 있었지만, 딱 봐도 사기성이 짙어 보이는 곳도 많았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기술부터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시간과 돈을 허무하게 날리고 싶지 않다면 배움터를 고를 때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았다. 실제 프리랜서로 독립한 지금 관점에서 조언하자면, ‘일정한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데뷔, 고객 연결, 혹은 월 수익 얼마를 보장한다’는 식으로 광고하는 기관은 분야를 막론하고 일단 거르기 바란다. 프리랜서 바닥의 철칙 중 하나는 절대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하고 프리랜서에 도전하면 아무리 긍정적으로 내다봐도 다소의 기간 동안 배고픈 생활을 할 것은 뻔했다. 이 소심한 내가 그 기간을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내려면 단순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업의 성격이 내 개인적인 성향과 맞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약 없는 발버둥을 치다가 지레 포기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기간 안에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해야 했다.
통역사와 요리사는 ‘통·번역 대학원’과 ‘요리학교’라는 공인 교육기관이 있는 만큼(물론 그 기관에 합격한다는 전제하에) 일정한 기간 안에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전문적인 기술만큼이나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어울리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현직자들의 조언이 많았고, 자연스레 후보에서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핸드메이드 소품 판매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드는 것까지는 혼자 할 수 있다 쳐도, 한 회사에도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는 내가 물건을 광고하고 판매하며 수많은 고객을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다(물론 고객이 많지 않다면 이런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 아닌가…).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는 홀로 작업하는 시간이 길다는 점에서 내 성향과 맞아떨어졌지만, 공모전이나 신춘문예에 입상하지 않는 한 초심자에게 진입장벽이 너무 높은 직업이라 선뜻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카드가 바로 번역가, 그중에서도 책 번역을 다루는 출판번역가였다. 출판번역가는 내 취미와 특기 중에서 책 읽기, 글쓰기, 외국어 공부라는 세 가지 영역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직업이었고, 온전히 혼자서 작업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학원은 물론이고 믿을 만한 기관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도 몇 군데 보였고, 그곳에서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실낱같은 기회나마 얻을 수 있는 것도 같았다. 뭘 잘 모르던 당시에는 내 전공이 영문과라는 사실도 출판번역가라는 선택에 힘을 실어주었다(영문과는 사실 출판번역 업계에서 플러스가 되는 전공은 아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프리랜서 출판번역가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 그렇게 길고 험난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 그리고 그 길목에서 웹툰 작가부터 독립출판까지 온갖 낯선 분야에 휘말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
어쨌든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목표를 정한 나는 그날을 기점으로 정말이지 나다운, 세상에서 가장 소심한 퇴사 준비를 시작했다.
-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원문: 서메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