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열풍이 거세게 불어서일까? 평소 여성 인권에 별로 관심이 없던 분들이 갑자기 페미니스트 투사로 거듭나는 경우가 자주 목격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많은 분이 여성 인권의 증진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면 정말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로 등장한 페미니스트 투사들의 면면은 다소 수상해 보인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보수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여성 인권에 그리 친화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은 여성의 목사 안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할 뿐 아니라, 낙태죄 폐지나 차별금지법 제정 같은 페미니즘의 주요 현안에 대해서도 매번 어깃장을 놓아 왔다. 교회 지도자들의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도 가해자를 두둔하고 피해자를 쫒아내는 식의 의아한 대응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체류하는 예멘 출신 난민들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갑자기 이들은 여성의 안전을 누구보다도 걱정하는 사람들로 변신했다. ‘난민 반대’를 외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강간범’이나 마찬가지인 무슬림 남성들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여성들’을 지켜야 한다고 울부짖는다.
왜 무슬림 남성이 위험하다는 것인지 제대로 된 근거를 가져오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유럽이나 미국의 극우 세력들이 조작한 선정적인 가짜뉴스를 가지고 와서 난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할 뿐이다. 이들의 맹활약 덕분에 난민 허용에 반대한다는 청와대 청원에 서명한 사람들의 숫자는 70만을 넘었다.
미주 한인들은 이 사태를 보고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여성 인권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일단 본인부터가 여러 건의 성추행과 아내 폭행 의혹을 받는다. 트럼프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보장 수준을 심각하게 후퇴시키기도 했다. 전미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of America)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을 삭감하면서, 테네시 같은 보수적인 주의 정부들이 사실상 낙태를 금지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이런 트럼프도 난민과 미등록 이민자들 앞에서는 강경한 페미니스트 투사로 변신한다. 트럼프는 이민자들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강간범들’이라고 반복적으로 주장해왔다. 이들 때문에 여성에 대한 강간범죄의 발생률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오르고 있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하지만 통계는 난민과 이민자에 대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힌다. 뉴 아메리칸 이코노미 리서치 펀드(A New American Economy Research Fund)에서 내놓은 자료를 보면 인구 규모 대비 가장 많이 난민을 수용한 상위 10개 미국 도시들 중에 무려 9개가 과거보다 안전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들 도시에서 강력범죄(살인, 강간, 폭행 등)와 재산범죄(절도, 강도 등)의 발생률이 모두 유의미하게 감소했다. 요즘 난민 문제로 시끄러운 독일의 범죄 통계도 마찬가지다. 지난 5년간 난민을 포함한 이민자 유입은 극적으로 증가했지만, 강간을 포함한 각종 여성 대상 범죄 건수는 오히려 감소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도둑질해서 이방인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극우 세력들은, 실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문제 역시 페미니즘의 현안이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난민 반대를 내세우며 여성 인권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약간이라도 진정성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취약한 처지에 있는 난민 여성들을 강간, 감금, 인신매매 등의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보호할지에 대한 대책부터 세워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대책이 ‘난민 반대’일 수는 없다.
난민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그저 여성 인권을 위한다는 핑계로 이방인에 대한 공포를 퍼뜨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갈 곳 없는 이방인을 배제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성 인권에 친화적일 리가 있을까?
극우 세력이 여성의 실질적인 이익과 별로 상관없는 주장이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언어를 도용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했다. 취임하자마자 모든 가족계획 관련 단체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어버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는 누구보다도 투철한 페미니스트 행세를 했다. 그는 탈레반으로부터 고통받는 아프간 여성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가 일으킨 전쟁이 정말로 여성 인권 증진에 도움이 됐던 적은 없다. 오히려 이슬람 사회 안에서 활동하던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뜬금없이 페미니즘의 언어를 도둑질해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자들의 존재가 악몽 같았을 것이다.
원문: 김성준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