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대학 진학 전의 학생도 포함된다)에게 철학은 뭔가 신비감을 풍기는 활동으로 보이는 것 같다. 이 환상이 얼른 깨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써 본다. 사실 이 글은 ‘철학을 어떻게 공부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철학’이라는 말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걸까? 흔히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를 참고하는 것 같다. 이것은 비단 ‘철학’에 대해 말할 때뿐 아니라 비전문가가 뭔가 ‘용어’나 ‘개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려 할 때 흔히 보게 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는 대강의 규약일 뿐 실제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볼 때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예컨대 ‘정의(正義)’의 사전적 정의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정의론’이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사전에 의존해서 어떤 용어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한계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난다. 사전의 정의는 사전 편찬자의 입장일 뿐이다.
나는 전공으로 철학을 공부한 지 30년이 된다. 본래 어느 분야이건 한 우물을 오래 파면 ‘전문가’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해당 분야에서 들은풍월이 많으니 전문가인 건 맞다. 그러나 ‘전문가’라는 칭호가 꼭 ‘전문성’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자기가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와 ‘가짜 전문가’를 잘 구별하며 산다. 부장님이 전문가인지 아닌지는 신입사원도 잘 안다. 하지만 자기 분야에서 한 다리만 건너가도 잘 판별하지 못한다.
가령 ‘의사’는 이공계일까?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는 연구의를 제외한다면 ‘의사’는 사람을 고치는 기능이 뛰어난 기술자라고 본다. 의술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의사가 과학을 잘 알고 새로운 것을 잘 만드는 그런 전문가라고 보는 것은 범주 착오라는 말이다. ‘범주 착오’라는 철학 전문 개념이 나왔다고? 아, 조금 풀어 말하자면, 엉뚱한 데다 분류했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의사도 과학을 잘 알 수도 있고 발명을 잘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부류’로서의 의사를 말하고 있다.
의사는 이공계가 아니라 응용 기술자나 예술가에 더 가깝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는가? 여기서 ‘예술’이라는 말은 art의 번역이고, 본디 art는 라틴어 ars(아르스)의 번역이고, 이건 다시 희랍어 techne(테크네)의 번역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로 유명한 저 히포크라테스이며, techne는 ‘의술’을 가리켰다. ‘예술’이 아니라 ‘의술’이었고 ‘기술’이었다.
어쨌건 나는 ‘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철학 ‘전문가’이다.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름 있는 대학들에서 철학을 가르쳐왔고 또 가르치고 있으며, 철학 서적을 번역하고 논문과 책을 써왔다. 타 전공 분야의 초청을 받아 대학 강연, 대중 강연, 기업 강연 등을 하면 항상 ‘철학자’나 ‘철학박사’라는 칭호가 따라다니기도 한다. 오늘날 이런 뒷받침은 여러 경로로 ‘대학’ 제도에 의해 주어진다. ‘전공’이라는 말 역시도 ‘대학’ 제도의 산물이다.
내가 ‘제도’의 문제를 제일 먼저 꺼낸 건, ‘전문가’ 모드로 말하자면, 오늘날 철학 전문가는 ‘대학’과 ‘철학과’라는 제도와 권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철학과’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내가 ‘역사성’을 언급한 건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철학과’가 없던 시절도 있었다는 뜻이고 ‘철학과’라는 제도 밖에서도 ‘철학자’와 ‘철학 활동’이 있었다는 뜻이다.
근대의 1급 철학자만 꼽아 봐도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크, 버클리, 흄 등은 요즘 식으로 보면 ‘아마추어’ 철학자였다. 그래서 먼저 단정적으로 알려드리겠다. 역사의 바깥에서 말한다면, 오늘날 철학은 대학의 ‘철학과’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활동을 가리키며, 단지 그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답변을 기대하고 이 글을 읽기 시작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일단 받아들이고 갔으면 한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국내외의 유명 대학 철학과 교수라 할지라도 일반인이 기대하는 ‘철학’과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제도의 권위를 더 이상 신뢰하지 마시라.
그렇다면 어떻게 진짜 전문가를 판별할까? 글의 내용을 본인이 직접 평가하는 수밖에 없다. 최소한 ‘철학’이 ‘생각’과 관련된 활동이고, ‘생각’의 가치와 질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식 판단의 대상이 아니므로, 결국은 각자 평가할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은 남에게 의탁할 수 없고 의탁해서도 안 되는 드문 순간 중 하나이다.
좋은 생각이 있고 나쁜 생각이 있다. 가치 있는 생각, 생각을 자극하는 생각, 삶을 성장시키는 생각이 있다. 반면 삶을 깎아내리고, 힘 빠지게 만들고, 주눅 들게 하는 생각도 있다. 생각은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진짜 전문가라면 앞의 부류에 속하는 생각을 들려주어야 한다. 전문가가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생각이 먼저 있다.
철학을 공부하려는 ‘일반인’은 의식하건 아니건 먼저 ‘전문가’의 인도를 원한다. 철학 개론서나 철학사 책을 집어 드는 것도 그렇고, ‘전문가’의 강좌를 수강하는 것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누구나 처음에는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곤란하다. 자칫 그 ‘전문가’의 학생으로 끝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문가’마저도 특정 철학자의 학생으로 평생 가기도 한다. ‘생각의 독립’을 원하면서 알게 모르게 ‘생각의 의탁’을 향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가장 큰 난관은 정작 ‘철학책’을 혼자 읽기 어렵다는 데서 생겨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일단 철학책은 읽기 어렵다. 진짜 어렵다. 그래서 읽는 훈련을 진하게 해야 한다. 역사에 남은 철학자는 ‘생각의 첨단’을 탐험한 자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상식을 고수하면서 따라가기 어렵다. 철학 공부에 의미가 있다면 그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자가 생각을 단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읽기 훈련을 가장 치열하게 할 수 있는 분과 중 하나가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인문학’의 여러 분과는 모두 ‘읽기 훈련’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에서 ‘교육’의 차원에서 생명력을 가져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나는 보통 ‘문사철(文史哲)’로 일컬어지는 ‘인문학’이라는 명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문학, 역사, 철학이 얼마나 다른데 그걸 하나로 묶어 말하다니! 이건 물론 내부자의 시각이다. 그래도 동의하는 게 하나 있다면 ‘문사철’이건 ‘인문학’이건 ‘문헌(literature) 읽기’를 맨 밑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인문학은 언어를 통한 ‘생각’을 훈련하는 방책으로 안성맞춤이다. 생각 훈련이 필요하지 않은 시절이 올까? 그게 아니라면 인문학은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인문학의 핵심은 읽기 훈련이다. 철학을 공부해서 뭔가 득이 되는 건 ‘빡세게’ 읽기 훈련과 생각 훈련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허나 곧바로 철학책을 집어 들어 읽으려 하면 읽히지 않는다. 일반인은 그 읽히지 않음의 당혹스러움 때문에 자신감을 읽고 철학 전공자를 존경의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전문가’가 잘 읽고 있을까? 이걸 물어보는 일반인은 없을 것이다.
내부자 입장에서 까발리건대, 전문가라고 다 잘 읽는 건 전혀 아니다. 철학이라는 분과 안에서도 전공이 엄청 세분화되어 있어 사실상 다른 전공자의 논문은 서로 읽지 못한다고 보면 딱 맞다. 그러니 ‘전문가’에 대한 환상은 빨리 깰수록 좋다.
그러면 그 많은 교수와 박사는 다 뭐란 말인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물론이다. 이들은 자기 분야를 열심히 공부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분야’는 철학 전반이 아니다. 안과의사와 성형외과 의사를 의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의사라는 이유로, 한데 묶어서 말하기엔 뭔가 찜찜하지 않은가? 철학에서의 ‘자기 분야’도 비슷하다.
통합적인 철학은 학부 수업에나 겨우 존재할 뿐 현행 제도 안에 그런 건 없다. 그나마 학부에서는 여러 분야의 교수 밑에서 여러 분야의 글을 읽는다.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예로 들면, 서양고대중세철학사, 서양근대철학사, 인식론, 존재론 및 형이상학, 논리학 및 분석철학, 윤리학, 사회철학, 과학철학, 동양철학(한국철학, 중국철학, 불교철학) 등의 분야가 있으며, 미학은 별도의 과로 독립해 있고, 학부에서는 고루 듣는다. 대학원에서는 더 좁게 공부하게 되고,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에는 다른 분야는 거의 공부할 여유가 없다. 그 후 교수가 되고, 자기 분야를 가르친다.
나는 제도 안에 있는 개개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도 자체를 말하고 있다. 현행 제도 속에서는 통합적인 철학은 존립하기 어렵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통합 철학’이 일반인의 눈에 비친 철학의 모습이다. 그러니 뭔가 심오하고 멋지고 신비하기까지 한 철학의 상을 지워버리기 바란다.
그렇더라도 철학은 여전히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에 와서는 중요한지 아닌지조차 잘 모르겠다. 철학을 공부할 제도도, 책도, 다른 접근 경로도 꽉 막혀있으니. 아무나 방송에 나와 철학을 말하면서 돈 버는 시절이고, ‘철학’은 허세를 치장해 주는 예쁜 장신구에 불과하지 않나? 혹시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마음에 이런 사정이 있지나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굳이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할 필요는 없다. 이유가 중요하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구체적인 문제를 풀기 위해 철학했다. 일반인도 구체적인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철학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특정 철학자가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만나서 풀려고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멋있어 보이려고 철학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꼭 철학과를 나오고 철학을 전공한 게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철학을 공부하고, 철학사를 공부하고, 철학자들을 공부하는 건, 철학과 별 상관없는 일이다.
당신은 왜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하는가? 교양을 위해 역사와 과학을 공부하는 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인간과 자연을 더 많이 알게 해주니까. 철학이라는 말을 둘러싼 에피소드, 인물, 전문용어 등을 아는 건 도움이 될까? 나는 시간 낭비라고 본다. 그걸 외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 중요한 건 문제다.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하는가? 이게 철학함의 출발이다. 별문제가 없다면, 그냥 재미있게 살면 된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껴지면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다음에 책을 집어도 늦지 않다. 단 철학책에 국한하지 말고 시간을 넘어 살아남은 고전을 두루 참조하라. 철학책만 읽은 위대한 철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그리고 항상 묻고 의심하라. 전문가도 믿지 말라. 전문성과 편협함은 곁에 있다. 최종 판단은 자신이 직접 내려라. 그래야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원망하지 않는다.
철학한다는 건 더 용감하고 솔직하고 겸손하다는 뜻이다. 또한 더 짓궂고 장난스럽고 무례하다는 뜻이다. 나아가 모든 권위를 비판하고 손수 평가한다는 뜻이다. ‘철학’ 따윈 되도록 공부하지 않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