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우리나라 사람은 편을 가르고 싸우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모여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산출해내기보다는 파벌을 만들고 소모적인 정쟁에만 몰두한다는 이야기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이런 견해가 일제의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식민사관에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당파싸움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다. 언제나 당파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조선의 붕당정치는 국가의 역량을 소모적인 논쟁에 허비함으로써 역사의 단계를 봉건 시대에 정체하게 만들었다는 정체성론과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예송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예송의 배경과 과정
청은 조선에서 철군하면서 인조의 세 아들(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척화주전론자들을 인질로 데리고 갔다. 그 중 막내 인평대군은 이듬해 조선으로 귀환했지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 동안이나 청에 체류하게 되었다. 특히 소현세자는 그 기간 동안 청에 들어온 서양 문물, 과학 기술에 심취하여 인조의 반발을 샀다. 더욱이 인조보다 소현세자를 중요시 여기는 청의 태도 때문에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소원한 상태였다.
그러던 중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자 세자의 자리는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에게 승계되지 않고 인조의 둘째 아들이었던 봉림대군에게로 넘어갔는데 바로 이가 효종이 되었다.
효종은 청에 억류하던 시기부터 배청주의자적인 태도를 취했다. 즉위 후에도 서인 계열의 송시열, 김상헌 등 반청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북벌은 실제로 실행되지 않았고 효종 또한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그동안 세가 눌려있었던 남인들이 집권을 위한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후였던 자의대비(인조의 계비로 죽은 효종에게는 어머니뻘)의 복상은 서인의 뜻에 따라 1년으로 정하고, 곧 이어 현종이 즉위하였다. 당시 일반 사대부와 평민들은 주자가 편찬한 <주자가례>의 법도에 따라 관혼상제의 사례를 따르고 있었고, 왕가에서는 성종 시기 제정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의 경우처럼 차자(둘째)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해예송은 남인 허목 등이 상소하여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설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남인들이 서인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이에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들이 1년설을 주장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중자에 따라 1년으로 할 것인가 장남의 예로서 3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특히 윤선도는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예송은 이념대립으로까지 확대되었지만, 현종이 직접 중재에 나서 서인측 입장을 수용함에 따라 양측의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그 후 효종의 비였던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바로 이 사건이 갑인예송이었다. 마찬가지로 아직 생존해 있던 자의대비의 복상이 화두였다. 서인은 역시 효종의 비였던 인선왕후는 차자의 부인이므로 9개월의 상복기간을 주장한 반면, 남인은 인선왕후를 장자로 대우해야 하므로 1년의 상복기간을 주장했다. 이번에는 남인의 1년설이 채택되어 서인들은 정계에서 축출되고 낙향해 있던 남인들이 다시 득세하게 되었다.
예송은 단순한 복상의 예가 아닌 첨예한 정치 논쟁
(앞서 다루었듯이) 인조의 맏아들은 소현세자였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소원했고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인조와 척신이었던 김자점이 개입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이 소현세자의 비였던 강빈까지도 반역죄를 이유로 시아버지인 인조에게 처형을 당했고, 소현세자의 아들들도 제주도로 유배를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당시 사족들은 집권세력이었던 척신들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특히 강빈의 아버지였던 강석기는 사족들 사이에 명망이 있었던 인물이었고, 사족들은 소현세자와 강빈의 죽음에 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조 다음의 왕위 계승이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차자였던 봉림대군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은 장자 계승을 순리로 여겼던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효종에 대해 국왕으로서 최고의 대우를 하느냐, 아니면 국왕이라 하더라도 차자로 대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왕조국가로서 가장 첨예하고 중대했던 정치적 문제였다. 효종을 차자로 대우한다 함은 적자가 있었음에도 변칙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정통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예송은 서인과 남인의 단순한 예의 논쟁이 아니라 왕위 계승에 관한 첨예한 정치 논쟁이었다. 논점이었던 복상 문제 그 자체는 이 대결의 시발점이 된 화두이자 명분이 되었을 뿐, 서인과 남인 논쟁의 당사자들이 오로지 복상의 예만을 가지고 목숨까지 잃어가며 본인의 주장을 펼쳤던 것은 아니다.
임금의 위치를 어떻게 둘 것인지로 확대된 예송 논쟁
예송은 정치적인 대립을 넘어 사상적인 대립으로 확대되기까지 했다.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는 사실 오늘날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한 논점이었다. 16세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 심성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성리학의 이상을 인간 사회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사족들은 예를 성리학이 현실 사회에 구현된 형태라고 인식했다. 일례로 군신간의 의로움은 임금과 신하가 서로 갖추어야 할 예를 통해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를 바로 잡는 것이 곧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왕실에서 어떤 복상의 예를 갖추는가에 대한 문제는 세상을 운영하고 다스리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때문에 복상 기간은 단순한 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복상 기간이 길고 짧음은 곧 왕권과 신권의 관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짧은 복상 기간을 주장했던 서인들은 왕권과 신권을 수평관계로 보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다.
이런 관점에서 이이는 <성학집요>에서 현명한 신하가 왕을 직접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반면 남인은 왕권과 신권을 수직관계로 보았다. 왕이 강력한 힘을 갖는 왕권 중심의 정치를 지향했던 것이다.
예송논쟁은 사회 전반의 요인이 결합된 중대한 사건
이처럼 예송을 허황된 공리공론이나 고질적인 당파싸움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예송은 17세기 성리학과 예학의 심화, 적자중심의 가족제도로의 변화, 붕당간의 학문적 대립, 신권의 성장, 양란 이후의 긴박한 정치 상황과 국가 재건의 방법 등 당시 정치사상적인 면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모든 분야의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결합되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특히나 예송의 시작이 봉건적 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이루어진 국왕과 왕실의 재검토로부터 연유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예송은 조선 후기 사회체제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불가피한 성장통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예송이 갖는 한계도 분명하다. 수백 년 전에 그것도 봉건제 국가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이 시대의 눈으로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렵고 한계가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송을 굳이 높게 평가할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콘텍스트를 함의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에 대해 단편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역사도 결국 누군가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다. 사관은 늘 존재한다. 하지만 특정 사관에 매몰되어 편협한 시각을 갖는다면 그 역사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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