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보통선거
보통선거(Universal suffrage)란 연령 이외의 자격 조건을 두지 않고 국민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선거를 말한다. 여성의 참정권이 일반화된 현재에는 연령(보통 18세에서 20세 이상)만을 자격 조건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위키백과』
선거를 마치고 친구들 몇이 모여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대체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우리 지역의 변화와 변화하지 않은 것들을 곱씹는 것들이었다. 대구와 경북은 이번 선거에서 익숙한 보수 도지사와 교육감을 뽑았다.
그런 한편으로 뜻밖의 반전, 단연 민주당 시장을 뽑은 구미가 화제에 올랐다. 그 반전의 요인으로 구미시민의 평균연령과 30대 이하 비중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친구 장은 씁쓸하다고 고백했다.
젊어야 바꾼다는 것이 맞다면 우리 군 같은 경우는 바꿀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절망적 이야기야…….
그가 사는 군에는 민중당 후보로 나선 농민회장이 2,312(6.59%)표를 받아 낙선했다. 무소속으로 나온 군의회 의장은 1만 1,675((33.32%)표, 자유한국당 후보로 나온 현직 군수는 2만 1,049(60.07%)표로 재선에 성공했다. 무효표는 1,209표.
도의원은 민주당과 한국당, 무소속이 1명씩, 군의원은 11명 가운데 민주당 1, 한국당 7, 무소속 3명이 각각 당선했다. 그나마 민주당이 도와 군의원에 각각 1명씩 당선자를 내긴 했으니 예년에 비기면 그것도 변화는 변화다.
친구는 민중당 추천 6·9 사전투표에 참관인으로 들어갔다. 그는 난생처음 하는 참관인 노릇을 하면서 심사가 복잡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렇게 썼다.
겨우 눈만 뜬 어른이 불편한 걸음으로 들어오고, 같이 늙은 아들이 옆에서 거든다. 제대로 못 찾고, 못 찍으니 아들이 옆에서 ‘정당은 2번 찍으면 되고’란다. 가당찮은 일이나 사무원이 정리하고 나도 일어섰다가 슬며시 앉았다.
어쩌랴, 저 성실한 투표의 책무감. ‘내 꼭 하고야 말리라’하고 들어와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저 괴리와 무능한 자책감을. 저 눈먼 1표가 만들어 내는 그 장한 권력, 투표는 민심이 아니라, 촌 노인 살아있다는 확인. 연세가 아흔다섯, 삶의 마지막 찍기 신공의 한 표로 당선되는 이는 누구일까? 멍 때리며 지키는 이 허망한 민주주의의 꽃. 어쩌면 ‘쓰레기통에 핀 장미꽃’일 수 있다는 섬뜩함. 얼음 맛이다.
이 하루, 한 번의 존재증명을 위해 지팡이 짚고, 허리 부여잡으며, 눈도 침침한 할매, 할배가 온다. 나의 미래가 온다. 이 더운 날, 양복까지 챙겨입은 딱한 어르신도 온다. 7장의 투표용지에 기겁하고, 찍고 나서 돌아서면 누굴 찍었는지 기억마저 감감한 숱한 어르신들에게 기표소는 어떤 곳일까?
해방의 성지도, 성당의 고해소도, 해원의 우물가도 아닌 자기 존재 확인의 장, ‘나는 아직 한 표가 있는 사람이여, 우습게 보지들 말어’, 그렇다. 나 여기 살아있음에 도장 찍고 나온 손 부들거린다. 그걸로 끝이다. 투표의 권력은.
‘기초의원, 도의원 다 치우고, 투표 때 종이도 한 장씩만 해야지’라며 지청구하는 85세 어른, 글자 모르는 따님 사무원 도움으로 찍게 하는 엄마, 두 늙은이 겨우 오셔서 따로 기표소 들어갔지만 도움으로 투표할 수밖에 없는 최고령자 101세 할머니,
지팡이 겨우 끌고 들어와서 한문 공부하듯 기표소에서 온갖 궁리 하며 앓는 영감님, 투표소 앞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 쳐다보다 말 걸어주길 기다리며, 60년대 고무신, 막걸리 선거 때를 아득한 추억으로 생각하는 투푯날 마실 온 할배들도 보면서 오후 6시가 되었다.
그는 그렇게 치러진 투표 결과 나온 무효표를 이야기했다. 군수 투표에 나온 무효표는 1,200표쯤. 그런데 광역과 기초의회 비례대표는 갑절인 2,400표가 넘는다. 기호도 정당도 없는 교육감 투표에선 무려 3,200표가 넘었다는 것이다. 그 무효표는 투표의 어떤 성격을 말해주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1표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데도 투표의 권리가 온전하게 보장되는 것이 보통선거의 뜻일 터이다. 그런데 그는 만 하루, 투표 참관을 하면서 느낀 허탈감을 말하며 입맛을 다셨다.
뭐, 이건 노인들 투표권을 빼앗을 수도 없고,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투표권을 심사해서 줄 수도 없는 일이고…….
가당찮은 농을 하면서 우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게다. 어떻게 보면 맥락도 모르면서 투표를 하는 것도 주어진 권리다. 모두가 시민으로서 온전한 권리를 행사하는 상황은 현실과는 먼 이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선거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부터 반세기 넘게 이어져 왔다.
하긴 고무신과 막걸리 선거를 졸업한 것만도 적지 않은 변화다. 그렇게 이루어낸 게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렇다. 그래도 선거를 통해 세상은 변화하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게라고 우리는 짐짓 위로하면서 술자리를 접고 총총히 헤어졌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