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신앙이 다르듯, 교육과 학습도 다르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배운 게 하나 있다고 한다면,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든, 절이든, 회당이든, 모스크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종교기관을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종교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한다고 해서, 꼭 신을 믿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교를 다니고, 학위를 받는 것(=교육)과 실제로 뭔가를 배우는 것(=학습)은 같지 않다. 긴 수업 시간에 졸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노트필기를 하고, 배운 내용을 정확히 암기해 답안지에 쓸 수 있는 능력과, 산재한 정보 속에서 중요한 통찰을 얻고, 그걸 바탕으로 상대방의 논리와 팩트의 헛점을 간파해, 자신만의 전략을 짜내는 능력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정답’이 이미 주어진 인공적 환경에서 유리하지만, 후자는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만드는 자연적 환경에서 유리하다. 조금 신랄하게 비유하자면, 잘 길들여진 동물원 원숭이의 곡예와 밀림의 야수의 사냥 기술간의 차이다.
교육만 있고 학습이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
그러나 가만히 우리 교육 현실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교육이 학습에 비해 압도적으로 비중이 높다. 교육이 무효하다는 건 아니다.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에 상관관계(어떤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지는 논의의 대상이다.)가 있다는 건 아래의 그래프에서 보듯 팩트다. 기회비용을 고려해, 받을 수 있다면 교육은 더 받는 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학습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사회 현실에 던져지면, 다시 어린애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것이 확실하고, 명확했던 세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을 익히지 못한다면, 학교에서 아무리 유능했던 사람도 사회에 나가면 바보가 될 것이다.
수동적 교육과 능동적 학습의 차이
그렇다면 교육과 다른 학습은 어떻게 하는가? 교육은 주어진 프로그램을 따라가면 된다. 시키는 대로 수업에 들어가고, 과제를 수행하고, 발표를 하고, 시험을 풀고, 평가를 받으면 된다.
그러나 학습은 자기 스스로 ‘자신이 무엇이 궁금한지’, 그리고 그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걸 시행착오를 통해 조정해가며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파악하는 걸 의미한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교육이 수동적이라면, 학습은 능동적이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는 중학교 때까지는 입시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학원을 다녀도 미술, 음악 등 예체능에 한정됐고, 그런 분야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다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은 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보냈다.
아주 어릴 땐 집에 있는 그림책을 읽었고, 조금 커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출판사 카탈로그에서 어머니와 상의 후 정기적으로 책을 구매해 읽었다. 이 때는 주로 문학전집이나, 역사책을 읽었다. 나이가 더 들자, 어머니가 따로 용돈을 주셨고, 그 용돈으로 내가 맘에 드는 책을 찾아 읽었다. 수학, 과학, 철학, 심리학, 사회과학 등에 관련된 교양서적을 주로 읽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대학 도서관에 고등학교 때까진 비싸서 구하기가 힘들었던 영어 책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책들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매학기에 수업을 듣는 것 외에 따로 내가 주제를 정해서 특정 분야를 파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학기는 동양사, 다음 학기는 제도경제학 이런 식이었다. 홍콩과 대만에 교환학생을 갔던 것도 당시 관심있던 중국 부상의 경제(홍콩), 정치(대만)적 측면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습관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은 미국의 19세기말, 20세기초, 정치경제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금융산업, 유통산업, 통계적 사고 등에 관련된 책들을 많이 보고 있다. 학교 수업은 내게 내가 스스로 하는 학습의 ‘부’였지 ‘주’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공부만 했다면, 진작에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더 제대로 자기 머리로 생각은 못하는 바보가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기심 없는 교육은 비극이다
그 결과로 (이런 말하면 욕을 들을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나의 가장 좋은 취미는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만일 나 역시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를 귀에 박히게 듣고, ‘성적’이 내가 지식을 습득하는 목적의 전부였다면, 공부가 즐겁진 않았을 것이고, 고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공부란 내 호기심을 충족하는 과정이었고, 내 자신의 지적 능력을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에 가기로 결정하고 입시에 전념했을 때도, 그건 내겐 ‘강요’가 아닌 ‘선택’이었다. 대학 때도 전공에 집중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틈틈이 도서관에서 계속 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겐 언제나 ‘학습’이 첫 번째고, 교육은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힘들고, 외로울 때도 나를 위로해주었던 것 중에 하나는 그런 과정 속에서 불멸의 작품을 남긴 사상가들의 책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장배경 탓인지 혹은 덕분인지 강남 대치동쪽을 버스를 타고 돌 때면 학교 앞에 길다랗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 학원버스들을 볼 때마다 궁금해진다. 이 아이들한테는 공부가 재미있을까? 즐거울까? 무엇에 호기심이 있을까, 그리고 거기에 대해선 어떻게 학습을 하고 있을까? 교육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학습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더 이상 경이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건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 못지 않은 난제니, 그 해결책이 무엇이라 아직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겠다.
그러나 사랑 없는 가정 만큼이나, 호기심 없는 교육이 비극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어떤 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원문: Pursuing the endless frontier, 편집: 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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