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알고 싶은가? 그럼, 과거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은 그게 아이폰이든, 안드로이든 30년 아니 3년 앞에도 그대로 있을지 내다보기 어렵다. 그러나 당신이 앉고 있는 의자는 디자인의 디테일은 조금 바뀔 지 몰라도, 앞으로 30년, 아니 300년 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이래 의자는 지금까지 3천년 가까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예로, 서점에 가면 구석에 있는 게 고전 코너다. 그러나 지금 화려한 베스트셀러 코너를 장식하고 있는 책들이 아니라, 이 책들이 더 장기적으로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인문학 저서로 국내에서만 100만부 넘게 팔리는 기염을 통한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30년 후에도 잘 팔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100년 후에도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된 것은 사라진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오래된 것일수록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생물도 오랫동안 존재한 녀석들이 앞으로도 생존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친구 바퀴벌레의 유전적 조상인 Blattoptera는 3억 5천 4백만에서 2억 9천 5백만 사이부터 이 지구상에 존재했으며, 바퀴벌레는 아마도 우리 인류가 다 멸종해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라질 것이 대부분인 트렌드에 온 신경을 쏟고, 반면에 영속하는 역사의 패턴에 대해서 무관심한 건 어리석다. 과거가 곧 미래다. 우리가 부산하게 좇고 있는 트렌드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현실 속에 살아남이 있는 과거가, 우리의 앞날에도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알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과거를 알아야 한다.
혁신경제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미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라.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혁신경제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무엇을 봐야 하는가? 나는 ‘next big thing’이 알고 싶다. 이젠 무엇이 세상을 바꿀 것인지 알고 싶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 궁금하다. 그럼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주변에 ICT 산업, 금융, 학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나는 위와 같은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 당장의 트렌드만 좇는 것도 필요하지만, 불충분하다. 정말 더 깊이, 더 정확하게 미래를 알고 싶다면, 더 멀리 보라. 미국 근현대사, 정확히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반, 남북전쟁 이후부터 대공황까지의 미국 근현대사를 공부해라.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일단 회의적이다. 한국 근현대사도 잘 모르는데, 태평양 건너 나라의 근현대사를 알아서 무엇하는가하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이건 잘 모르는 소리다. 미국은 상징성이 있는 국가다. 강대국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 중 하나이며, 현대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어떤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고, 거기에 어떤 시행착오가 있었는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보통 피상적으로, 파편적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알 필요가 있다.
록펠러, 카네기, J.P. 모건의 시대
그리고 한 걸음 나아가서 혁신경제의 미래를 이해하려면, 그런 미국사 중에서도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을 꼭 봐야 할 이유가 있다. 20세기 후반, 개인용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명이 미국경제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처럼 그리고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새로운 경제적 영웅들이 부상했던 것처럼, 19세기 중후반 남북전쟁 이후 통합된 미국경제는 역사상 전후무후한 한 세대의 거물(tycoon)들을 탄생시켰다. 기업가가 미래를 만드는 혁신경제의 원형은 오히려 이 시기였다.
두 집 살림을 한 사기꾼 아버지와 독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역사상 최고의 부를 축적한 석유왕 존 D. 록펠러, 철도왕 밴더빌트의 라이벌인 톰 스캇의 후계자로 이후 록펠러의 일생의 라이벌이 된 스코틀랜드계 이민자 철강왕 카네기, 그리고 월가의 아버지이며, 이후 철도, 전기, 철강 산업 위에 군림하게 된 은행가 J. P. 모건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전설이다.
그리고 사실 말을 바로하자면 이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근현대사가 혁신경제의 오리지널이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디지털 혁명과 그 시대를 풍미한 기업가들의 전기적 스토리는 이 시대의 거인들에 비하면 오히려 스케일이 작다. 이들 전시대의 타이탄들은 문자 그대로 자기 산업을 지배했고, 규율했고, 아직도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큰 유산을 남겼다. 철도, 전기, 철강, 금융 등과 같은 산업 인프라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좋든 싫든 여전히 이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진정 스티브 잡스가 말한 대로 자기가 태어난 세상에 만족하지 않고, 주어진 방식이 최선이라 믿지 않고, 자신이 서야 할 땅을 스스로 만든 사람들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모르는 시대
그리고 이 시대를 알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대부분 이 시대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록펠러는 흔히 ‘석유왕’이라고 하니까, 석유채굴로 돈을 번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니다. 석유채굴은 골드러쉬와 마찬가지로 도박에 가깝다. 독실한 침례교인인 록펠러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도박이다. (록펠러 동생인 프랭크는 술, 도박, 근본적으로 열등감 때문에 망했다.) 록펠러는 석유 정제를 통해 돈을 벌었다. 처음에는 등불로 많이 사용된 케로신을 팔았고, 이후엔 엔진용인 가솔린을 주로 팔았다.
경쟁보다는 질서, 경쟁력보다는 지배력을 믿었던 기업가들
그러나 이것만 보면 록펠러의 기업가로서의 진정한 자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거물 기업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긴 하지만, 진짜 기업가는 상품이 아니라 시스템을 판다. 록펠러는 큰 그림을 볼 줄 알았고, 그릴 줄 알았다.
록펠러가 전후무후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어디서 어떻게 가치 사슬을 장악할 지 계산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사업 초기 단계에서 철도왕 밴더빌트와 독점 계약을 맺고 염가로 자신이 석유를 밴더빌트의 유통 채널을 통해 미국 전역에 판매한다. 이를 통해 록펠러가 자본을 축적해 강력한 사업자로 성장하자 철도 사업자들은 단합해 록펠러의 석유 판매를 거부한다. 그러자 현재 구글이 직접 통신망을 깔고 있는 것처럼, 록펠러도 이에 굴하지 않고 철도보다 더 효율적으로 석유를 유통할 수 있는 파이프를 직접 깔아 버린다.
이게 록펠러 스타일이다. 록펠러는 비록 고등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뛰어난 수적 감각이 있었고, 회계 작성에 익숙하고, 능숙했다. 그래서 자신보다 연장자이고, 업력이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현금 흐름을 볼 줄 알았다. 그리고 그는 망나니 아버지 밑에서 일찍이 가장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조숙했고, 그런 가정 환경의 도피처인 침례교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과묵해졌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고, 강점이었다.
이런 재능, 경험, 성격의 조합은 그를 침착하면서도 대담한 협상가, 경쟁자들이 자신을 압박할수록 더 강력한 수로 상대에게 반격하는 기업가로 성장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됐다. 이 록펠러 스타일을 통해 록펠러는 요즘 말로 석유에서 철도, 파이프에 이르는 에너지 산업의 ‘수직통합’을 달성했다. 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럼, 록펠러는 왜 비판을 받는가? 강도 귀족(robber baron)이란 말을 처음 들은 건 철도왕 밴더빌트다. 그러나 이후 대중에게 악질 부자의 대표로 꼽힌 건 록펠러다. 그 이유는 록펠러가 남달리 악해서라기보다는, 이들 중 가장 방대한 부를 가지고 있었고, J.P. 모건에 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독점 기업가가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건 록펠러뿐만이 아니다. 이 시대의 거물 기업가들이 공통적으로 ‘경쟁’이 아닌 ‘질서’를 믿었고, ‘경쟁력’이 아닌 ‘지배력’을 원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본질적으로 그들이 뛰어든 산업이 인프라 산업이었다. 인프라 산업은 특성상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고, 마진을 높이기 위해선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수요가 한정되어 있는데, 공급이 과다해지면, 결국 가격경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업자들은 다 손해를 보게 된다.
실제로 이 시기 가장 먼저 붐을 일으켰던 철도산업은 그 붐이 꺼지자 1873년대 불황으로 기록된 일시적 경제 공황을 일으켰다. 이 철도산업의 최강자였던 밴더빌트와 딜을 통해 성장한 것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록펠러였다. 따라서 록펠러가 철도산업의 전례를 생각해 ‘트러스트’(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주회사’인데, 당시에는 지주회사법이 없었다.)란 형태로 경쟁자들을 사들여 산업을 장악하려 했던 건 나름 명분은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경쟁법은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지므로, 이 당시에는 이러한 독과점 남용 행위가 위법은 아니었다. 카네기가 철강산업을, J. P. 모건이 투자은행가로서 철도산업, 전기산업, 이후에는 카네기로부터 철강회사를 사들여 철강산업을 독과점적으로 지배한 논리도 유사하다. 경쟁은 혼란이며, 독과점은 곧 질서였다. 그리고 그 질서를 만드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사람들은 경쟁자일뿐 아니라, 폭도였다.
그리고 사실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걸로 따지면 J. P. 모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시 금융은 가족이 경영하는 비즈니스였다. 가족의 이름과 신뢰가 전부였다. 전세대의 로스차일드는 유럽의 전란을 이용해 채권시장을 통해서 거부를 쌓았고, 모건가의 1세대는 투자은행가로서 미국의 성장에 배팅해 거부를 쌓았다. 그러나 J. P. 모건은 그 이상의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요즘 사모펀드(private equity fund)가 기업을 사고 팔면서 돈을 버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출혈경쟁을 하고 있는 철도산업을 정리해 돈을 벌었다. (끝판왕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디슨에게 투자해 전기산업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에디슨의 조수인 니콜라 테슬라의 교류전기가 에디슨의 직류전기보다 인기를 얻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 발전소 발주건까지 따내자, 모건은 자신의 월가의 영향력을 이용해 테슬라의 후원자인 웨스팅하우스의 자금줄을 흔들고, 테슬라의 특허를 사들인다.
그렇게 테슬라를 경쟁의 시야에서 제거한 모건은, 이후 에디슨이 설립한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주식을 공격적으로 사들여, 자신이 직접 전기산업의 지배에 나선다. 은행은 보통 배후에서 움직이는 걸 생각했을 때, J. P. 모건은 그 상식의 룰을 깬 것이다. 이후, 모건은 카네기가 록펠러와 경쟁에 휘청하면서, 철강산업에 손을 땔 의향을 보이자, 미국 연방정부의 1년 예산에 가까운 금액(4억 8천만 달러)을 주고 카네기의 철강산업까지 인수한다.
록펠러, 카네기, J. P. 모건, 이들 모두 새로운 기회를 보면 놓치지 않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망설이지 않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두 독점을 꿈꿨고, 이뤄낸 사람들이다. 경쟁력이 아닌 지배력을 믿었고, 그것이 효율적일 뿐아니라 정당하다고 판단한 점에서 그들은 동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승자독식 자본주의와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반격
사실, 이들 거물 기업가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이 자신들의 산업에서 독과점을 이뤄냈다는 것보다 이들이 만들어낸 승자독식 자본주의가 미국 민주주의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는 데 있다.
이들은 경쟁자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용인에게도, 그들이 자신의 이윤 추구에 방해된다면 무자비했다. 예를 들어, 이 셋 중에서 돈 버는 것보다 좋은 일에 돈 쓰는 게 더 즐겁다는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과 같은 훈훈한 글을 써서 가장 선량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앤드류 카네기도 비록 자기 수하였던 헨리 프릭의 손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더러운 짓을 하긴 했다. 카네기 철강 회사는 1892년 ‘홈스테드 제강소 시위 사건’(Homestead Strike)에서 임금 협상을 놓고 시위하는 노조를 상대로 경비대를 고용해 발포하는 우를 범했다. 돌이킬 수 없는 악수였다.
또한, 이들은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이들의 승자독식 경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대중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자 그를 견제하기로 공모한다. 그들은 친기업적인 공화당의 맥킨리를 대통령 후보로 밀기로 합의하고 한화로 약 400억을 투자한다. 브라이언은 약 5분의 1의 정치 자금만 가지고 싸워야 했다. 또한, 당시는 공개 투표였기 때문에 이들 산업의 종사자들, 주로 북부와 동부 사람들은 맥킨리를 찍을 수 밖에 없었다. 브라이언은 전국 순회 연설까지 하지만, 결국 석패한다.
물적, 인적 물량 공세의 승리였고, 이들 자본가의 영향력이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 영역까지 확대된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산업계의 왕들은 대통령마저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승자독식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는 결과, 민주주의는 반격했다. 민주주의의 기습은 예상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왔다. 그들은 공화당의 기대주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뉴욕주의 명문가의 자제이긴 하지만, 강력한 개혁 성향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미리 손을 써서 맥킨리의 재신임 선거시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으로 지명한다.
그러나 여이있게 연임한 맥킨리가 미국 대통령 중 당대 기준으로 역대 세 번째로 암살당하자, 일은 이들이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로 전개된다. 에고가 냉장고 만큼이나 큰 사나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가 대통령으로 임명된 것이다. 역사에 남는 영웅이 되길 원했던 그는 자본의 회유와 협박에 개혁을 양보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대통령 임명 후, 루스벨트는 백악관 서관에 공보실(‘웨스트윙’이란 미드의 배경이 된 곳이 이곳이다.)로 개방해 당시 탐사보도를 꽃 피우기 시작한 언론과 긴밀하게 공조를 시작한다. 록펠러의 독과점 비리를 폭로한 아이다 타벨, 육류산업의 문제점을 파헤친 업튼 싱클레어 등이 이 시대 대표적 기자들이다.
그렇게 여론의 지원을 받아 시어도어는 링컨 이후 가장 인기있는 대통령으로서 자본을 규제하기 위한 개혁법안을 추진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연방정부가 독과점기업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은 1890년에 오하이오주의 존 셔만 상원의원이 주도한 셔만 반독점법이 의회에서 통과됐을 때부터 존재했으나 이 법안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경제 권력의 집중을 견제한 것은 루스벨트 때부터였다. 연방경쟁위원회(FTC, 우리로 따지면 공정위)의 전신인 기업국(the Bureau of Corporations)이 만들어진 것도 역시 루스벨트의 재임 기간이었다.
록펠러의 오일 제국이 분열된 것도 이 시기였다. 비록, 나중에 이들 록펠러의 자식들, 스탠다드 오일의 자회사들이 엑슨, 모빌 등 또다른 글로벌 에너지 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1911년 미국 대법원의 반독점법 판결이 난 후에 주가가 급등해 록펠러를 더 거부로 만들기도 했으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전까지만 해도 록펠러의 오일 제국에 손을 댄다는 건 신성불가침이었다는 점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개혁시대’(The Progressive Era)의 기운은 그리고 쉽게 꺼지지 않았다. 이후 공화당의 윌리엄 태프트,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까지 그 기조가 이어져 미국 사회의 한 정치적 전통으로 남게 됐다. 오늘날에도 미국 사회에서 시장의 확장과 규율이 반복되는 패턴이 존재하다면, 그건 이 때의 기억과 경험 때문이다.
나아가, 자본도 이렇게 한 번 민주주의의 쓴 맛을 본 결과, 좀 더 자세를 낮추게 된다. 록펠러는 루스벨트에게 공격당하기 전부터 꾸준히 자선활동을 하긴 했었다. 예를 들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록펠러는 흑인 여성 교육에 많은 후원 활동을 해왔다. 카네기도 일찍이 카네기홀을 건립하는 등 교육, 문화 사업에 많은 자선 사업을 했었다. 그러나 말년에 재산은 많으나, 명예는 추락하자, 록펠러와 카네기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가문의 명예를 세우고자 하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미국 재계 1, 2위를 다투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 콤비가 자신들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여 다른 부자들이 욕을 먹는 가운데 존경을 즐기는 장면을 보면, 이 두 거물이 남긴 교훈을 기억하고 있는 건 이들의 직계 후손만은 아니지 않나 싶다. 젊었을 땐 서로 독점적 지배를 위해 애쓰던 록펠러와 카네기가 나이가 들어서 우선순위를 바뀌지 않았다면, 그들은 단지 희대의 스크루지 영감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의 미국 사회가 흥미로운 건 오늘날에도 비슷한 패턴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새로운 기술이 뜨고 사라지고, 새로운 산업이 흥하고 망한다. 기업가는 윤리와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려 하고, 그들간의 경쟁은 미사일과 탱크만 쓰지 않을 뿐 전쟁과 다름없다. 인프라의 건설, 경쟁의 도입, 자본의 규율, 혁신의 촉진, 경제사회적 불평등의 완화 등과 같은 핵심 쟁점 역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의미있는 주제다.
그러므로 어떻게 기업가들이 맨손으로 한 산업을 일으키는 지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그와 같은 기업가들을 한 세대가 아니라 연이어 탄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제도적, 정책적 장치가 필요한 지를 고민하고자 한다면, 이 시대를 놓치지 마라.
과거가 미래다.
덧1. 이 시대에 관심이 많다면 History Channel UK에서 방영한 The Men Who Built America(철도왕 밴더빌트부터 시작해 자동차왕 헨리 포드까지 나온다.)와 미국의 공영방송 PBS에서 방영한 American Experience: The Rockefellers(레전드인 존 D. 록펠러뿐만 아니라 그의 2, 3세대들의 얘기도 같이 나온다.)를 시청하길 추천한다. 전자는 tv조선(!)에서 개국 2주년 기념으로 새벽(!)에 방영한 바 있다.
덧2. 더 깊이 알고 싶다면 당연히 책을 읽는 게 좋다. Ron Chernow란 탁월한 비즈니스 역사가가 쓴 록펠러 평전 ‘Titan’과 모건가의 일대기를 그린 ‘The House of Morgan’을 추천한다.
덧3. 통신산업도 당연히 초기 역사에 거물이 존재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더 벨이 만든 AT&T를 실질적인 통신 제국으로 일궈낸 시어도어 베일이다. 통신산업의 시작부터 인터넷 산업의 위기까지 흥미롭게 잘 쓴 책으로 콜럼비아 로스쿨 교수 Tim Wu의 ‘The Master Switch’가 있다.
덧4. 항상 이 시대와 오늘날 사회를 엮어서 설명하는 강의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강의를 요청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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