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후, 소상공인에게 대출한 유일한 은행
1906년 4월 18일,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지진으로 몇 명이 죽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분명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적어도 사망자는 3,000명을 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었다. 지진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까지 흔들었다.
도시 여기저기서 가스관이 터지자 주민들이 한꺼번에 길로 쏟아져 나왔다. 피난 와중에 약탈이 이어졌다. 땅의 흔들림은 멎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생계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도시 경제를 재건하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은행가들은 적어도 가을까지는 은행 문을 열 수 없다며 돈을 풀지 않았다. 은행가들 자신도 아직 충격에 휩싸여 있기도 했지만 일단은 잿더미 속 철제 금고를 식히는 데만도 몇 주가 걸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한 은행가가 내일 바로 은행 문을 열겠다고 나섰다. 4월 22일, 심지어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예금주들한테 편지를 보내 지진이 났으니 은행도 휴일을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고는 지진 와중에 금고에서 미리 꺼내 숨겨놨던 은행 예금 8만 달러 중 1만 달러를 꺼내 사륜마차에 싣고는 그 위에 과일과 채소를 산처럼 쌓아 부둣가로 향했다. 약탈자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멋진 눈속임은 잘 통했다.
은행은 고객들에게 소액 대출을 제공했다. 또, 집안에 현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설득해 은행에 예금하게 했다. 그들은그 돈을 복구를 위한 목재 구입 등 복구 작업에 투입했다. 사람들은 은행의 도움으로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돈은 잘 상환됐다. 그해 12월 다른 은행이 문을 열었을 때, 이 은행의 자산은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서민을 위한 저리 대출의 시작
남자의 이름은 아마데오 피터 지아니니, 21세기 들어 미국 최대 규모의 상업은행이 된 뱅크오브아메리카(이하 BOA)의 설립자다. 1930년 뱅크오브아메리카로 이름을 바꾸기 전 그가 세운 은행의 이름은 뱅크오브이탈리아(Bank of Italia). 이름 그대로 그 자신과 같이 이탈리아 출신인 미국 주민들을 위해 세운 은행이었다.
지금이야 은행에 예금하고 대출을 받는 게 모든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지만 110년 전만 해도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은행들은 마치 일종의 비밀 클럽처럼 부유한 계층을 위해 운영됐다. 부둣가의 장사치들은 은행의 문턱조차 넘을 수 없었다. 대출은커녕 예금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시에도 서민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고리대금업자였다. 월 대출이자는 20%에 달했지만,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돈을 빌려 쓸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새로 이민 와 생활기반은커녕 종잣돈 없는 이민자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들은 요새 언론이나 금융전문가들이 쓰는 말로 금융소외층이었다.
지아니니는 그런 금융소외층 서민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은행에 돈을 맡길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3%의 예금금리를 줘서 돈을 받아오고, 돈이 필요한 자영업자와 서민들에게 6%의 대출금리로 돈을 꿔줬다. 이들이 낮 시간 내내 일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해 저녁에도 은행 문을 열었다. 당시에도 다른 은행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영업하던 시절이었다.
다른 은행가들은 비웃었지만 설립 1년도 되지 않아 뱅크오브이탈리아의 자산은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빠른 성장세였다.
소액주주의 반란, 월스트리트의 도전을 막다
그러나 지아니니는 은행을 자신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은행 전체 발행주식 3,000주 중 100주 이상 소유하지 못하게 제한했다. 지분 소유의 편중을 막아 소액주주들의 참여를 늘렸다. 지분 분산을 통해 기업의 사명을 지키는 ‘지배구조(Governance)’를 만들어둔 것이다.
이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1931년, 월스트리트의 금융업자 출신으로 이 은행의 지주회사를 이끌던 엘리샤 워커가 대공황 때문에 은행 가치가 떨어졌다며 은행을 헐값에 매각하려 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지아니니는 분노에 차 벌떡 일어났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부터 캘리포니아 일대를 돌며 20만여 명의 은행 주주를 설득했다. 워커와 지아니니의 결투는 주주총회장에서 벌어졌다.
결론은 지아니니의 승리. 그는 지분 60%의 지지를 받는 데에 성공했다. 지아니니는 다시 은행 로비 중앙에 의자를 놓고 일을 시작했고, 직원들은 수천여 명의 동료를 해고하는 대신 급여 삭감을 받아들였다.
만약 이때 BOA가 매각됐다면 지금 미국 금융계는 어찌 되었을까? 일부 투자은행들의 탐욕으로 2008년 금융위기가 미국 전역을 강타했을 때에도 BOA는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그해 9월에는 대형투자회사인 메릴린치까지 인수해 미국 2위 규모의 금융사로 올라섰다(1위는 시티그룹). 비록 높은 모기지대출 비중 때문에 2013년까지도 각종 소송과 모기지 부실화의 진통을 겪고 있긴 하지만, BOA는 지금도 미국 곳곳에 지점을 둔 대표적 상업은행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아니니가 남긴 창업 이념은 아직도 BOA의 주요 사업으로 남아 있다. 이 은행은 2004년부터 2013년까지 10년 동안 7,5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806조 원에 이르는 돈을 저소득층 대출, 소기업 투자 등 지역개발금융에 배정했다. 그 전에도 이 은행은 지역개발금융에 돈을 배정하곤 했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배정액이 2,300억 달러, 우리 돈 247조 원이었으니 모두 합해 1,053조 원에 달하는 거액을 지역사회에 투자한 셈이다.
지아니니의 창업 정신은 다른 후배 은행가들의 삶에도 영향을 줬다.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일어났을 때 혼란에 빠진 한인 고객들에게 무담보로 10만 달러씩 대출해줬던 은행이 있었다. 미국계 최초의 한인은행인 한미은행이었다. 당시 은행장이던 벤자민 홍은 지아니니의 전기 중 지진에 관한 대목을 읽고는 이러한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좋은 의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시 손드라의 문제 제기, ‘좋은 의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로 돌아가 보자. BOA 정도라면 창업가의 좋은 의도가 충분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창업 100년 후에도 서민들을 위한 금융 서비스를 유지하고 있으니까.
아마 부실 모기지 상품의 피해자들은 그 말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듯하다. 2013년 11월, BOA는 연방법원으로부터 법이 허용하는 최고 액수인 8억 6,4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9,180억여 원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은행이 위험을 알리지 않고 부실 모기지 상품을 판매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혐의가 인정됐다고 보도했다. (‘BoA, 부실 모기지 판매 혐의 9,180억 원 벌금 물어야’ <파이낸셜뉴스> 2013년 11월 10일, 월스트리트저널 인용 보도 )
이 은행은 금융위기 발생 이전인 2007년 8월부터 2008년 4월까지 국책 모기지업체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에게 부실 모기지 상품을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창업자의 좋은 의도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지속되기 어려운 이유
창업자가 좋은 의도로 세운 기업이라 해도, 창업자 사후에도 창업 정신을 지키려 노력한다 해도, 기업이 커지고 사업 범위가 넓어져 직원·고객 등 이해관계자가 많아지면 상황은 의도대로 통제되지 않는다. 직원이 사기를 칠 수도 있고, 고객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의도가 있었건 있지 않았건, 기업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시장과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책임은 더 커진다.
한자로 책임은 꾸짖을 책(責)과 맡을 임(任)을 합한 말이다. 책(責)이라는 한자는 빚을 뜻하는 ‘채’로도 읽힌다. 그러니 책임감이란 맡은 일을 다 하도록 빚쟁이처럼 꾸짖음을 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 쓰이는 말인 셈이다. 하지만 빚도 능력이 있어야 갚지 않겠는가. 영어의 ‘책임(Responsibility)’은 반응(response)하는 능력(ability)을 뜻한다. 다시 말해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책임이다.
사람의 일도 그렇지만 기업 역시 모든 변수를 통제해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관계자들도 그건 안다. 그래서 지속가능보고서의 국제 가이드라인인 GRI(Global Reporting Initiatives)는 이해관계자와의 소통, 투명한 보고 등 일어난 일에 대한 성실한 반응을 중요하게 여긴다. 다시 말해 ‘책임’을 다하려는 기업 혹은 기업가에게 가장 크게 요구되는 것은 반응하는 능력이다.
기업이 자사가 끼친 영향에 대해 반응을 할 땐 어떤 기준이 필요할까. 《세계 최고 기업들의 기업시민활동》에서 브래들리 구긴스 보스턴칼리지 캐롤경영대학 교수와 저자들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 피해를 주지 말라(Do no harm). 이것은 기업이 사회에서 활동할 때 끼칠 수 있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을 말한다.
◇ 좋은 일을 하라(Do good). 이것은 경제적 부와 빈곤 감소, 보건과 복지 개선, 인력 계발, 자연환경 보호 등 사회적 공익 사이에서 공유되는 가치를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자신의 사업이 사회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을 최소화하는 것이 책임이다. 한편 자신의 사업이 사회와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면 그 사업을 확장하는 것 또한 책임이다.
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을 설립하는 동기나 사회적기업인지 아닌지의 여부보다 더 중요하다. 사회적기업이라 해도 기업행위로 인해 일어난 일에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 기업은 비판 받을 것이다. 영리기업이라 해도 자사가 속한 지역사회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높고 이해관계자를 배려한다면 존경 받을 것이다.
책임감은 책임을 지는 주체의 정체가 분명해야 생긴다. 뒤집어 말하자면, 기업의 책임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내가 이 기업의 주인’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한 주체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이 일으킨 일은 주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회 규범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지아니니가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지분을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 일대 지역민 등 소액주주들에게 분산시켰던 것은 이해당사자들이야말로 기업 정신을 지켜낼 진정한 주인이라는 걸 아는 창업가의 혜안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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