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심심해서 또 인터넷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다가 알지롱 사이트에서 이런 걸 봤다.
오늘자 신문에 나왔을 것만 같은 이 4컷 만화는 53년 전인 1960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흥미가 생겨서 이 무렵의 고바우영감들을 살펴봤다. 네이버의 옛날 신문 읽기 기능을 사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신경한 사람들은 많다. 사회의 다수는 언제나 ‘내 일만 잘 하면 되는거지’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가며 남의 일, 공동체의 일에 참견하고자 하는 용감한 소수의 오지랖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은유적인 표현은 만화가의 재능이기도 하지만 검열 때문이기도 하다. 이 해 3월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이 재선을 위해 투표함을 조작하고 유권자를 협박하는 등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을 투입해 진압하고 학생들을 잡아들였다. 그는 또 시위를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라 비난했다.
‘대사’라고 써있는 차를 타고 온 사람이 어느 큰 집 앞에서 정부의 입장을 변명한다. 아마도 워싱턴에 보낸 주미대사가 미국 측에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시절이다. 아무리 독재자라도 미국의 눈치는 봐야 했다. 게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있던 지라 이승만 정권 입장에선 더욱 미국에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 컷에서 고바우 영감이 ‘잠간’하고 나와서 대사의 뱃속을 들여다보는데, 대사가 싹 지워져있다. 검열에서 삭제됐다. 원래 대사는 뭐였을 지 궁금하지만 내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알 수가 없다. 기회가 되면 김성환 화백에게 묻고 싶다. 여러분은 어떻게 상상하시는지?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다. 아래처럼 처참하게 지우개질되어 나간 날도 있다.
이 해 4월의 동아일보는 만화 뿐 아니라 여기저기 기사와 사진들이 이렇게 떡칠이 된 채로 찍혀 나갔다. 잔인한 검열이지만 그래도 검열이 있었다는 것은 알려주니 불행 중 다행이랄까. 독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감은 잡을 수 있었으리라.
그 다음엔 어떻게 됐을까? 맨 앞에 보여준 ‘빨갱이’ 만화가 실린 바로 다음 날, 즉 1960년 4월 19일에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경무대(청와대)로 몰려가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고 백 명 넘게 죽었다. 이게 바로 4.19 혁명이다. 이후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군중에 무차별 일제 사격이 벌어진 장소는 ‘효자동 전차종점’이라고 사진 아래에 써 있다. 효자동 전차종점은 경복궁 담장 옆, 지금은 청와대 앞 분수대와 청와대 사랑방이 있는 곳이다. 우리 동네다. 많은 학생들이 죽었던 역사의 장소이건만, 그곳엔 지금 아무런 표지도 없다.
일주일간 시위가 이어지고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났다. 신문은 이를 ‘역사적 시민혁명’ ‘고귀한 피의 승리’라 불렀다. 왼쪽 아래엔 ‘경향신문복간’이라고 다른 신문의 부활을 축하해주는 제목도 눈에 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고바우도 살아났다.
투명인간 마냥 지우개질 당했던 고바우 캐릭터를 담담하게 살려낸 김성환 화백. 당시 28세였다.
오른쪽에는 며칠 전 시위에서 친구를 잃은 고려대 행정학과 학생이 쓴 시가 실렸다. 그 아래는 소설가 정비석 씨가 ‘화근부터 근절’하자는 기고문을 썼다.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여당인사만을 기용하던 재래의 방침을 지양하고,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재야인사들을 대폭 등용하여 연립내각을 조직한다. 그간에 이번 사태를 빚어내게 된 부정선거 감행자의 책임을 물어야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역시 지금도 그대로 유효한 조언이다. 50년 전의 신문을 그대로 베껴다가 날짜만 살짝 바꿔 내일자 신문에 써도 될 것 같다.
덧. 김성환 화백의 인터뷰는 참 재밌다. 이승만 때는 그래도 언론 자유가 좀 있었고, 전두환 때가 최악이었다 회상한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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