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지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만화 주인공이 곤경에 빠졌을 때 주변 인물이 자주 외치는 대사다. 비단 만화 주인공 뿐 아니다.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에서 헤매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도대체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이 질문의 주어를 ‘우리’로 확장하면 또 다시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인가? 문장의 성격이 다시금 극적으로 바뀌면서, 이 말의 무게와 폭력성은 한 개인을 넘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강력하게 힐난하고, 또한 추궁한다.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의 저자인 오카모토 유이치로 씨는 이러한 무게감을 이겨내고 “지금 세계의 철학자들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우리는/세계는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현장 요약 보고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 보고서의 초점은 이 질문이 주로 던져지는 몇 가지의 ‘계기’에 놓여 있다.
- 우리의 태도나 생각에 변화를 요구하는 새로운 기술과 지식이 있고(바이오테크놀로지, 인공지능),
-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맥락과 환경이 문제가 되고 있으며(자본주의 체제, 온난화 등 생태적 위기),
- 이런 변화 속에서 급진적인 도전에 맞부딪치고 있는 태도나 갈등이 있다(종교의 문제).
이 주요한 계기들에 얽힌 질문과 대답들을 통해 “지금 세계의 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일본어 원제)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자 의도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지도’는 가질 수 있다
책에서 다루는 것들은 모두 ‘지금, 여기’의 문제들로 신문이나 잡지, 방송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들이라서 친숙하고 낯설지 않다. 그리고 그 주제에 대해 최근의 철학자들이 내놓은 논점이나 주장이 구체적인 논문에 근거해서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흔히 생각하는 ‘철학’의 이미지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상세한 철학적 논변이나 난해한 개념은 모두 생략한 채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그 주장의 핵심적인 요지만을 설명하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핵심적인 요지만을 설명한다는 것은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낯선 곳을 탐험할 때 전체적인 지형을 알 수 있던 지도를 지참하듯, 자칫 하나의 분야에 깊숙하게 빠질 수 있는 약점을 극복하고 이렇게 전체적인 ‘지형도’를 그려주는 책은 분명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필자가 저 넓은 분야의 저술들을 언제 다 읽었을까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철학’이라는 단어가 제목에 들어가면 딱딱한 철학책으로 알고 독자가 줄어들까 봐 역자와 출판사는 아주 신중하게 (정말 너무나 열심히) 제목과 본문에서 ‘철학(자)’을 지우려고 노력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영 어려워 보인다면 제1부에서 다루는 1990년대 이후의, 우리 세대(지난 30년간)의 철학적 조류에 대한 개관을 건너뛰어도 좋다. 결국 우리가 궁금한 것은 미래, 그러니까 나머지 부분(제2~6부)이 아니겠는가.
일본에서 가장 대중적인 해설자가 선보이는 ‘미래’
저자 오카모토 유이치로 씨는 현재 현대 철학에 대한 대중적인 해설자로 일본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저술가다. 복잡한 맥락과 쟁점, 주장의 요지를 이렇게 쉽고 명료하게 물 흘러가듯 쓸 수 있다는 것에서 저자로서의 내공과 기예가 보통이 아님을 보여준다.
다만 각 쟁점을 소개할 때 약간 피상적인 수준에서 논의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은데, 이해는 한다. 전체적인 지형도를 보여주는 게 목적인 책에서 “자, 같이 이 문제를 고민해보자.”고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고 사람에 따라 저자의 어떤 편향성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인데, 이 정도면 상당히 중립적인 위치에서 서술하는 데 성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제2~6부 사이에 페미니즘 철학과 퀴어 이론의 도전이 없다는 것은 다소 아쉽다. 물론 자본주의를 다룬 부분이나 종교를 다룬 부분에서 정치철학적 논쟁을 조금은 소개하지만,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의 한계와 타자성을 중심으로 한 급진적 민주주의의 고민을 독립적인 장으로 다루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통해 소개된 다른 자료들은 상당수가 번역되어 독서 안내서로도 충실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기도 하다. 이 장점만으로도 위에서 트집 잡은 걸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자. 이런 책을 안 보고 세상을 논하다니, 지금 뭐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