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사드, 15년 추적 끝 학살자 아이히만 체포 압송
1961년 4월 11일, 이스라엘 검찰이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한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 1906~1962)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아이히만은 ①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수백만 명 학살, ② 치클론-B 독가스 도입 및 운용, ③ 리투아니아 8만 명 학살, ④ 라트비아 3만 명 학살, ⑤ 벨로루시아 4만5천 명 학살, ⑥ 우크라이나 7만5천 명 학살, ⑦ 키에프 3만3천 명 학살 계획 입안 등 모두 15가지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에 대한 단죄는 1946년 9월 30일, 뉘른베르크(Nuremberg) 전범 재판을 통해 이미 이루어진 바 있었다. 이 국제군사재판에서 12명의 나치 지도자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은 공군총사령관 헤르만 괴링,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비롯하여 독일군 수뇌, 나치당 고위 간부, 점령지 총독 등이었다 (관련 글 : 1946년 오늘, 나치 전범 단죄-뉘른베르크 재판).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holocaust:유대인 대학살)의 전범으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 즉 유대인 박해의 실무 책임자였다. 독일이 항복한 뒤 미군에 체포된 그는 가짜 이름을 사용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했고, 1950년 가족들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도주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약 10년 동안 건설사 직원, 유통업체 감독관 등으로 일하며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1960년, 15년 동안 그를 추적해 왔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정보망에 걸렸다. 아이히만이 모사드에 체포(납치)돼 이스라엘로 압송된 것은 그해 5월이었다.
수백만 명을 기아와 파멸 그리고 죽음으로 몰고 간 홀로코스트 주역 아이히만은 물 한 잔과 공책, 필기구가 놓인 방탄유리로 제작한 피고인석에 섰다. 그러나 나치 사냥꾼 지몬 비젠탈(Simon Wiesenthal)은 그를 “싸구려 검은 정장을 입은 허약하고 창백하며 누추한 존재이자 공허한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2차원의 비현실적인 형상인 듯했다.”라고 묘사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범죄 혐의에 대해 ‘유대인 학살이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고 인간적으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면서도 법적으로 자신은 ‘무죄’라고 강변하였다. 그는 자신이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한 일개 하수인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게쉬타포 아이히만, ‘유대인 500만명 수용소로 이송’
1932년 나치당에 가입한 아이히만은 같은 해,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 정책 결정 회의에 참석했다. 이듬해 나치 친위대 정보부(SD)에 들어가 유대인 업무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게슈타포 유대인 과장으로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폴란드 수용소에 열차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로 500만 명을 이송했다고 자랑했다.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나와 내 동료들은 1천만 명의 유대인, 아니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죽였다면 나와 동료들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랬어야만 나와 내 동료들이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단순하게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멍청이에 불과한 놈일 겁니다. 나는 나치당원들과 함께 똑같이 생각했으며 지구상에서 유대인을 지우고 싶은 이상주의자였습니다.”
– 1960년, 옛 친위대 동료이자 출판업자 빌렘 사센(willem sasen)과 인터뷰 중에서
검찰 측 증인 신문은 56일간 이어졌고 모두 112명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가스 살인, 구타, 시체 소각, 고문, 생체 실험 따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학살극의 참상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관련 글 : 히틀러 총리 등장- 홀로코스트의 서막과 <나의 투쟁> 재출간).
검찰 측이 신문에 앞서 밝힌 대로 아이히만은 ‘단순히 개인이나 나치 독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기소된 범죄 혐의에 대해 답변할 때마다 한결같이 “난 내 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거듭해 명령을 불복종하기엔 무력한 존재였기에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제시될 때가 돼서야 자신의 죄를 시인하곤 했다.
미국 잡지 <뉴요커(New Yorker)>의 요청을 받고 특파원 자격으로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하고 보도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란 저작을 통해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악의 평범성'(한나 아렌트) : 확신적 반유대주의자(데이비드 세자라니)
‘악의 평범성’이란 나치의 유대인 수송을 책임지며 홀로코스트의 주역이었던 아이히만은 악마적 본성을 지닌 흉포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관료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아렌트가 관찰한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고 나치즘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든 신념에 찬 나치’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선과 악을 구분할 줄 모르며 관료제적 타성과 인습적 관례를 따른 명령수행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탁상 살인자 아이히만>(2006)을 쓴 역사학자 데이비드 세자라니(David Cesarani)는 아이히만이 아렌트의 묘사보다 훨씬 더 확신에 찬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결코 ‘진부한 인간’이나 매일 자신의 명령에만 충실한 하위 관료가 아니었다.
그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확신에 넘치는, 급진적인 나치였고, 현장 관리자였고, 강제이주를 통한 ‘유대인 문제’ 해결을 추진한 특수조직의 전문가였고, 1942년, 대량학살의 주요 설계자였다는 것이다(관련 글 : 아우슈비츠 해방, 혹은 위안부 소녀상).
1961년 12월 15일, 아이히만 재판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아이히만은 기소된 15가지 혐의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그 범죄들은 그들의 본성과 능력에서 나온 전례가 없는 참상이다. 유대인을 겨냥한 범죄의 목표는 유대인만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제거하려 한 것과 같다. …법원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간재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형이었다. 사형집행 전 아이히만의 부인으로부터 선처를 요망하는 편지를 받은 이츠하크 벤즈비 이스라엘 대통령은 거절 회신에 성경 사무엘기 상권 15장에 나오는 구절을 육필로 적어 보냈다.
“너의 칼이 뭇 여인을 자식 없게 만들었으니, 네 어미도 여인들 가운데에서 자식 없이 지내야 마땅하니라.”
1962년 6월 1일, 아이히만 교수형 집행
1962년 6월 1일 새벽,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즉시 화장되었고 해군 경비선이 그 재를 지중해의 공해상에 뿌림으로써 아이히만은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전범들에 대한 단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유대인 학살 등 2차대전의 독일인 전범에 대한 독일 정부의 과거사청산은 계속되었다. 역사 청산의 지진아 대한민국이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83년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1994년 친나치 민병대 간부 폴 투비에(Paul Touvier), 1997년 비시 정부의 경찰 간부로 유대인을 강제송환한 모리스 파퐁(Maurice Papon) 등이 재판을 통해 단죄되었다(관련 글 : 1945년 오늘-프랑스 비시 정부 총리 라발 총살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