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4월 7일 오전 6시 30분, 조선혁명군과 광복군 소속으로 일제와 싸웠던 오광심(吳光心, 1910~1976) 선생이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예순여섯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남만주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 사령부 군수처에서 복무했고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한 전사였다.
오광심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어려서 남만주로 이주해 흥경현 왕청문에 있는 화흥중학(化興中學) 부설 사범과에서 공부하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화흥학교는 1927년 민족주의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설립한 학교였다.
1920년대 후반 만주의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정의부 주도의 전 민족유일당 조직 운동이 전개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재만주 독립운동 진영은 남만주의 국민부(國民府)와 북만의 혁신의회로 통합되었다.
남만의 대표단체로 성립된 국민부는 중앙의회를 개최해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함으로써 당정군(黨政軍) 체제를 수립했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한국독립당과 그 소속 독립군 부대인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게 되었다.
남만주 조선혁명당에서 항일투쟁 시작
오광심은 조선혁명당과 군이 창설되던 1929년 스무 살로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정규 교사가 되었다. 이듬해 남만주 한인자치단체이며 독립운동기관이었던 한족회에서 설립한 통화현의 배달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1931년 유하현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로 옮겨 동포 여학생들의 민족교육을 맡았다.
오광심은 배달학교 교사로 있을 때인 1930년 조선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만주의 조선혁명당은 조선혁명군(사령관 양세봉, 참모장 김학규)을 조직해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였다.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함께 흥경현 전투, 통화현 쾌대무 전투, 강전자 전투 등에서 승리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오광심은 교직을 떠나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복무했고, 뒤에 조선혁명군 유격대와 한중연합 항일전에도 참여했는데 주로 지하 연락 활동에 종사했다.
이 무렵, 오광심은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 활동하던 백파(白波) 김학규(1900~1967, 1962 독립장) 장군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되어 그의 참모이자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조선혁명군은 1931년부터 1934년까지 만주의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막강한 일본군과 대적하기에는 점차 힘이 부쳤다.
1932년 4월 상하이에서 윤봉길의 훙커우(虹口) 공원 폭탄 의거가 일제에 일대 타격을 가하면서 이에 고무된 임정과 중국국민당은 합작으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 설립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김구는 만주에서 악전고투하던 조선혁명군과 조선독립군을 관내 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해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의 일부는 후일을 기약하며 1933년 말 관내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관내 지역으로의 완전한 이동보다는 만주에서 항전을 계속하려고 했던 조선혁명군은 부족한 인력과 물자를 보충받으려 대표를 임정에 파견하기로 했다. 당과 군을 대표해 김학규가 난징(南京)에 파견되었는데 오광심은 남편을 따라 난징행에 동행했다.
이미 일본군이 장악한 지역을 통과하는 것은 여간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1934년 5월, 부부는 농부로 변장하고 안동(安東)을 거쳐 배를 타고 칭다오(靑島)까지 간 후에 비밀공작원의 도움을 받으며 난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광심은 이 험난한 과정에서 ‘님 찾아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지었다.
-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해라
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해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 날 위해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 날 위해 끝까지 가리라
그 무렵 난징에는 이미 남경 중앙군관학교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에 대한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또 임정을 비롯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관내 지역 독립운동진영의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라는 기구를 두고 활동했다. 김학규는 이런 여러 상황을 포함한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이를 몸에 지닌 채 만주로 가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오광심은 보고서를 통째로 외워 만주로 가서 구술로 이를 보고했다. 조선혁명당 본부는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의 한 한인의 집에서 난징에 보낼 지령문을 작성했는데 변절자의 방화로 집이 불타면서 오광심을 포함 겨우 3명만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오광심은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심한 화상으로 3개월 동안 만주 산간의 바위굴에서 이를 치료해야 했다.
1935년 1월, 오광심은 상처가 다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난징으로 가 당과 군이 난징에서 추진하는 단일당 조직 운동에 대한 당과 군의 비준서를 전달했다. 이로써 조선혁명당 대표 김학규와 최동오는 한국독립당(대표 김두봉·조소앙), 의열단(대표 석정·진의로), 한국독립당(대표 윤기섭·이청천)과 미주 대한인독립단(대표 김규식·신익희)의 통일전선 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1935년 7월 4일 민족혁명당을 창설했다.
남편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고 오광심은 민족혁명당에서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결성 직후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계열과 이청천, 최동오 등 만주세력이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계열과의 갈등으로 탈당하면서 분열되었다.
민족혁명당 거쳐 광복군 전사로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 난징이 일본군에 점령되기 직전인 1937년 11월, 중국 정부의 이동과 함께 임정도 후베이(湖北)성 한커우(漢口)를 거쳐, 그 1938년 2월에는 후난(湖南)성 창사(長沙)로 옮겨갔다.
그러나 창사 지역도 일본군의 침공 위협을 받게 되자 임정은 7월에 다시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로 옮겨갔다. 일본군이 광둥 지역에 상륙해 광저우를 위협하자 10월에는 다시 서쪽으로 철수해 난하이(南海)를 거쳐 11월에 광시(廣西)성 류저우(柳州)에 도착했다.
임정은 1939년 2월 류저우에 머물면서 산하 청년들로 한국광복진선(陣線) 청년공작대(대장 고운기)를 조직했다. 34명의 대원 가운데 11명이 여자였는데, 일찍이 만주에서 조선혁명군 전사로 5년간 항일전을 치른 바 있는 오광심이 그 일익을 담당했다.
벽보 부착과 합창, 연극 등의 활동을 전개해 중국인들의 항일의지와 반일감정을 고취했던 청년공작대의 활동은 이듬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되었다. 류저우도 위험해지자 임정은 1939년 5월, 쓰촨(四川)성 남부의 치장(綦江)을 거쳐 1940년에는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에 안착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체포 위협을 피해 중국 곳곳을 전전하면서 자체 군대 창설을 준비해왔던 임정은 충칭에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지청천 총사령, 김원봉 부사령, 참모장 이범석 아래 3개 지대를 두었는데 김학규 장군은 제3 지대장을 맡았다.
광복군에는 오광심과 김정숙(1916~2012, 의정원 의장 김붕준의 딸, 1990 애국장) 지복영(1920~2007, 지청천 장군의 딸, 1990 애국장), 조순옥(1923~1973, 조소앙의 아우 조시원의 딸, 1990 애국장) 등의 여군도 참여했는데 오광심은 주로 총사령부의 사무 및 선전사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여성들이 광복군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임정 수립 당시의 광복군에는 ‘여성 조항’이 없었으나 1940년 재창설된 광복군에서는 여성들의 참여를 보장했던 것이다.
한국광복군은 한국임시정부에 직할된 한국의 국군이다. 한국 임시정부 본신이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혁명기관인 만큼 광복군도 당연히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군사기구가 되는 것이다. 범 한국혁명 남녀는 누구를 물론하고 그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광복군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소유한 것이다.
- 총사령관 지청천
여성의 광복군 참여를 긍정하게 된 인식의 변화에는 조신성과 안경신, 남자현과 같은 독립투사들의 남성을 뛰어넘는 활약과 지도력이 있었다. 조신성(1873~1953, 1991 애국장)은 평남 맹산 일대를 중심으로 독립사상 고취, 군자금 모집, 부일분자 응징, 관공서 파괴, 관공리 처단 등 직접투쟁을 펴나가다 체포돼 2년 반의 옥고를 치렀다.
평남 대동 출신의 안경신(1888~?, 1962 독립장)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하자 국제여론 환기와 독립의욕 고취를 위해 평남 경찰국청사에 폭탄을 투척했으나 불발되었다.
경북 영양 출생의 남자현(1872~1933, 1962 대통령장)은 1925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암살하려다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끊어진 손가락 마디를 함께 싸서 보내어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던 이였다.
“여자가 없으면 세계는 물론 우리 민족도 구성하지 못한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위해 전선과 가까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으로 이동할 때, 여자 광복군 대원인 오광심을 비롯해 지복영, 조순옥도 함께했다. 오광심은 선전조에 편성되어 광복군에 대한 홍보와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光復)》을 한국어판과 중국어판으로 간행했다.
오광심은 창간호에서 여성 동지들의 약진을 격려·호소하는 글을 두 편이나 실었다. 그는 조국광복을 위해서는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게 참여해야 하며 여성의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여성의 임무가 어찌 집안에서 아이나 양육하고 밥이나 해주고 길쌈이나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남녀평등을 아무리 부르짖지만, 또는 여권을 찾아보자는 구호가 운소(하늘)에 높았지만 원래 이런 혁명적 임무를 지지 못하면서 어찌 권리를 말할 수 있으리오.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면 먼저 자체의 구투(舊鬪)와 능력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남자와 같이 부책(負責:책임을 짊)하고야 될 것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 농완물(弄玩物), 기생충 등등의 치욕되는 명사는 어느 남자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이 자취(自取)한 것이라 합니다. 동성 동지들! 말로 평등과 권리를 부르짖지 말고 실제 노력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쟁취합시다. 남자와 같이 피 흘리고 남자와 같이 국가와 사회에 부책하고 남자와 같은 능력과 인격이 있다면 누가 능히 우리 손에서 평등과 권리를 빼앗겠습니까?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오.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맞이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해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해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해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나가서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 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족사와 세계사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녔다. 그것은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했다.
우리 여자가 없으면 세계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우리 민족을 구성하지 못할 것이다.
시안에서 오광심은 1년 반 동안 《광복》 발행 등의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임정 군무부(軍務部)는 장차 당면할 대일 전쟁 준비로 초모공작(招募工作) 즉 모병 업무를 위해 시안에서 제3지대를 편성했다. 김학규를 지대장으로, 오광심과 지복영을 대원으로 둔 제3지대는 산둥반도를 향해 출발했으나 산둥의 정세가 급박해 안후이(安徽)성 푸양(阜陽)에 정착하고 말았다.
제3지대는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푸양에 거점을 두고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그러나 초기 성과가 미미했고,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44년에 들어서면서였다. 그동안 꾸준하게 전개된 지하활동을 통해 적 점령 지구에 있는 교포 청년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일제 패망까지 초모공작, 해방 후에도 교민 보호
이 무렵 중국 전선에 배치된 한인 학도병들이 대거 일본군을 탈출했다. 1944년 1월 ‘반도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한인 청년들이 2월 중순 쉬저우(徐州) 등 중국 전선에 투입되었고, 이들이 연이어 일본군을 탈출한 것이다.
제3지대는 이들을 중국군 중앙 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에 설치한 한국광복군훈련반(약칭 한광반)에서 훈련해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제3지대에서 초모한 인원은 전체 모병의 절반에 이를 정도였는데 이들은 광복군과 제3지대의 근간으로 성장했다. 김학규는 미 전략사무국(OSS)와 합작해 국내 정진 작전 추진하기도 했다.
광복 후 오광심은 김학규와 함께 상하이에 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駐滬辦事處)를 설치하고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3만여 교민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데 진력했다. 오광심은 1946년 가을 김학규와 함께 만주로 가 선양(沈陽)에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오광심이 조국에 돌아온 것은 선양이 중국공산당의 공세에 함락 위기에 처하던 1948년 4월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남편 김학규는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다가 김구의 살인교사범으로 몰려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4·19혁명이 직후 석방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오광심 선생은 국립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의 남편과 합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김학규(1962 독립장)에 이어 오광심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