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살면서 느낀 대한민국 대중교통의 편리함
영국에 1년 반 정도 살면서 옥스퍼드에서 런던 사이, 또 주변의 여러 도시들로 기차를 많이 타고 다녔다. 영국은 기차가 처음 발명된 나라니 만큼 기차 시설이 잘 돼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비싸고 기차 내부도 지저분하다.
무엇보다도 표 한 장 사는 것부터가 일이다. 같은 노선이라도 기차를 운영하는 회사가 여러 곳이고, 시간대마다, 요일마다, 패키지에 따라, 왕복여부에 따라, 얼마나 일찍 사느냐에 따라, 또 환불 조건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창구 앞에 줄도 길다. 표 사다가 진이 빠진다.
가격 옵션이 많아진다고 좋은 게 아니다. 수많은 옵션들을 알아보고 뭘 선택해야 할지 고르고, 잘못샀다가 환불하고… 이러는 동안에 소비되는 시간과 정력의 비용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의 가격 시스템은 정말 급할 때일수록 더 많은 돈을 내도록 짜여져 있다.
기차가 싫다고 고속버스를 타려고 가보면 버스는 더 거지같다. 런던의 버스터미널부터가 우울하다. 표 한 장 사는데 30분 이상 줄을 서야 하기도 하고, 그나마 지붕이 있는 터미널이나 있으면 다행이다. 다른 도시에선 길에서 비를 맞고 서서 고속버스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맨체스터에서 런던까지 버스를 타고 온 적이 있었는데 차가 막혀 열 시간도 넘게 걸렸다.
악몽같았다. 거짓말 아니라 중국에서 탔던 장거리 버스만도 못했다. 영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 KTX나 새마을호 특실, 특히 우등고속버스를 타면 “아, 이 나라가 바로 선진국이구나! 영국은 거지굴이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대한민국의 대중 교통 서비스는 세계 최상위권이라 자부해도 좋다.
독과점 시장에서 자유경쟁 논리?
민영화가 서비스 품질 향상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업체 수십 개가 같은 상품으로 피터지게 경쟁해서 품질 향상 없이슨 살아남지 못하는 치열한 자유경쟁시장이라면 모를까, 철도같은 독과점 인프라 산업에서 무슨 놈의 경쟁논리?
해당 노선을 독점 운행하는 법인을 따로 만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고객서비스 개선에 힘을 기울일 거라고 믿는 게 우습다. 서비스가 개판이든 소판이든, 어차피 사람들은 그 노선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어차피 서울 강남권, 성남, 분당 사는 사람들은 수서발 KTX를 탈 수 밖에 없는데, 니가 그 회사 사장이라면 굳이 애써 서비스 품질을 최고로 유지하려 노력 하겠니? (아마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믿는 척 할 뿐이지)
그럴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빼먹으려고 다양한 가격정책만 도입할 것이다. 고르는 사람 골아프게.
철도를 사영화하면 경쟁력이 높아진다는 말에도 함정은 있다. 우선 ‘경쟁력’이 뭘 의미하는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해 철도 사영화를 추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경쟁력이란 회사 입장의 경쟁력, 즉 수익성을 말한다.
하지만 철도라는게 철도회사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건가? 아니다. 철도나 도로는 그걸 만들고 운영하는 회사 돈 벌라고 있는게 아니라, 국민들이 편리하게 이동하라고 만드는 거다. 돈은 그런 시스템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철도의 존재 목적 자체가 수익성이 아닌데 ‘철도경쟁력 = 수익성’이라고 논하는 것이 우습다.
좀 과격하게 얘기하자면 지하철 요금이나 철도요금이나 고속버스 요금은 완전 무료로 하고 세금으로 운영해도 안될 것이 없다. 공공 인프라고, 주로 서민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다. 국민 입장에서는 기차삯을 내나 그만큼 세금을 내나 달라질 게 별로 없고 요금 징수 과정에 들어가는 행정 절차가 없어지니 철도 운영 비용은 크게 절약될 거다. 아직 그렇게 하고 있는 나라가 없을 뿐이지.
적자 재정이 문제라고? 국가 재정이 적자가 좀 나면 어떠나. 미국이 왜 적자재정을 수십 년 째 유지하면서 무너지지 않는데?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국가는 가계부 쓰는 가정이 아니다. 국가는 돈을 찍어내는 능력이 있고 세금을 거두는 능력이 있다. 돈을 만드는 국가에게 돈 자체는 국가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부의 회계장부가 마이너스가 나더라도 대한민국 전체가 좀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면 그것으로 정부의 소임은 충분히 완수한 것이다.
철도의 적자 재정 때문에 철도서비스라는 공공자산을 민간/금융자본에게 팔아넘겨야 한단 얘기는 국가의 부강과 국민의 행복이 목적인 국가의 회계를 수익을 내는 것이 존재의 목적인 기업의 회계와 착각한 바보들의 생각이다.
4대강 MB도 눈치 보던 철도 사영화
박근혜 대통령이 왜 자꾸 철도 사영화를 추진하는지는 모르겠다. MB가 4대강을 할 때는 본인과 주변사람들의 이익관계 때문에 그랬다면 용서는 안되도 이해는 충분히 가지만(능히 그럴만한 분 아닌가), 박근혜의 KTX 사유화/사영화 추진은 이해가 안된다. 심지어 MB도 추진하다가 너무 눈치보여서 중단한 사업 아닌가.
주변의 의견을 구해보면 “그는 생각이 없어서”라는 대답이 많다. 깊이 생각해보고 또 똑똑한 학자들을 만나서 의견을 구해야 할텐데, 우리집에서 청와대까지 10분 거리밖에 안되는데 나라도 좀 불러서 콜라 한 잔 하면서 얘기하면 좋을텐데. 아마 철도 사영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거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걸까? 국민들의 의견을 물어보면 아마 절반 이상은 철도 사영화에 반대할텐데 왜 하필 대통령 주변에는, 그리고 메이저 언론사에서는 철도 사영화를 찬성하는 목소리만 들리는걸까? 철도 사영화를 통해서 떨어질 떡고물을 받아 먹을 기업들과 사람들이 로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PR 회사중에서는 국가 정책을 움직이기 위해 대정부, 대언론 로비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로비는 불법인 걸로 알고 있지만 이들은 어쨌든 로비한다. 언론사에 돈 좀 쥐어주고 원하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기사를 써달라 한다. 도덕성이 마비된 언론사들은 너무 티나지 않는 선에서 기사를 써주거나 기고문을 실어준다. 입장에 맞는 글을 써주고 연구를 해줄 교수들도 마찬가지로 관리 대상이다.
아마도 지금도 이런 회사들은 언론사와 정치인과 관료와 학자들에게 돈을 뿌려대고 있을 거다. 언론사와 정치인과 관료와 교수들은 항상 돈을 원한다. ‘철도 사영화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나름대로의 논리도 있잖아? 난 그런 논리를 좀 더 돋보이게 해줄 뿐이야. 그게 뭐 나쁜짓인가?’ 하면서.
철도 민영화 파워블로거 포스팅 청탁의 추억
2011년에 어느 PR 회사에서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 ‘철도민영화 공청회’에 참석한 후 블로그에 글을 하나 써달라 했다. 내가 기자인지는 몰랐던 것 같다(그때 잠시 쉬고 있기도 했다). 네이버 파워블로거 리스트에서 보고 연락한 것 같다. 그 공청회는 (당연하게도) 민영화를 찬성하는 측에서 주최한 공청회였다.
그러면서 첨부로, 가이드가 될 만한 언론 기고문도 보내줬다. 친절하다. 블로거들이 철도 전문가는 아닐테니까 참고해서 포스트 작성하라고 아예 모범답안을 보여준 거다. 연세대 경영학과 주인기 교수님의 글이다.
주 교수님은 이 글에서 민영화/사영화를 하면 일자리 1400개가 생긴다고 하시면서도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지금 민영화 한다는 건 쓸데없는 인건비를 줄이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고용이 늘어나는데 인건비는 줄어들어? 무슨 마법의 민영화인가? 그런 마법이 일어날 수 있다고 쳐도, 주 교수님은 민영화/사영화의 예상되는 문제점들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모범답안 뿐 아니다. 이 회사는 나에게 아래와 같이 상세한 블로그 포스트 작성 가이드라인도 함께 보내줬다.
아마 언론사용으로 만든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특히 “(대외용 메시지)”라고 써놓은 부분이 재미있다. 그럼 대내용 메시지는 뭐였을까? 뭐긴 뭐야, “이거 꼭 해서 우리 돈 많이 벌자!” 였겠지.
나는 공청회와 언론기고문 역시 모두 그 PR회사가 만든 기획의 일부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 공청회의 패널 중 한 분은 바로 저 기고문이 실린 신문의 경제연구소장이었다.
이 e메일 안에선 나에게 돈을 준다는 얘기는 안했지만 아마 그 공청회에 참석했다면 현장에서 보상에 대해서 얘기했을 거다. 파워블로거들이 아무리 케백수들이라도 주말도 아닌 평일 오후 두 시에 양재동 구석탱이 AT센터까지 가서 아무런 대가 없이 이런 취재 서비스를 해줄 리야 없지 않은가. 설령, 블로거들에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PR회사가 공짜로 이런 일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돈에 의해 여론이 조작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시시한 블로거에게까지 이런 자본의 작업이 들어오는데, 대형 언론사에는 기름칠을 잔뜩 해놨을 게 뻔하다. 전형적인 후진국 자본주의+민주주의의 모습은 이렇다. 이해관계가 크게 걸린 소수의 사람들은 로비를 열심히 하고, 이해관계가 작게 걸린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은 로비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정치인과 관료와 언론인의 도덕성과 양심의 수준이 높지 않다면 정책은 이해관계가 크게 걸린 소수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대다수의 일반국민들에게는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정해지게 된다. 안타깝지만, 국민들이 침묵하면 나라가 이렇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결말이다.
[note note_color=”#ffffff” radius=”10″]참고: 이 글은 예전 포스팅을 상당 부분 재탕한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시 옛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 썼던 글보다 감정은 더 넘치고 분석은 조금 줄었습니다.[/no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