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들하십니까?”에 답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인사는 서로의 편안을 물어주는 “안녕하십니까?”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힘없는 이들끼리의 인사는 서로의 안부가 아니라 생존을 물어야 했습니다. 제 경우에도 비정규직 시간강사인 동료들 끼리의 인사는 “요즘 뭘 관심있게 공부해?”가 아니라 “다음 학기는?”이었고 수강생들과 나누는 인사도 역시 “취업은?”이었지요.
강의실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상대평가라는 굴레 속에서 서로가 경쟁자가 되어 누가 프리라이더인지를 따져물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학점주는 사람과 학점따려는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가 되어갔지요. 가르치는 사람들도 자신의 삶에 급급하여 이것이 제대로 된 제도인가 따져묻지 않았으며, 함께 삶의 고민들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나의 안녕치 못함을 얘기하고 너의 안녕치 못함을 들어주고 우리가 왜 안녕치 못한가를 따져묻고 있는 중입니다. 이 물음이 얼마나 계속 될지… 또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물음 속에서 우리가 그간의 삶들을 돌아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조그맣게나마 답들을 찾아나갈 수 있겠지요.
루쉰은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고 했지만 여러분들이 딛을만한 지위도 학식도 여유도 갖추지 못한 저는 차마 그렇게 얘기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옆에서 같이 걸을 뿐입니다. 다시 루쉰의 말로 ‘희망’을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곳이 길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