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인체 면역계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이를 위해 비유적이거나 추상적인, 의학적으로 엄밀하지 못한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 이해를 바랍니다. 이 글에 사용된 짤방은 대부분 본문과 관계가 없습니다.
민주주의 과잉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민주주의 과잉’이라는 표현을 썼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이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자, 이에 대해 “무슨 소리든 다 하고 치고 빠지고, 그러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런 게 문제”라 주장하며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과잉 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이다.
당신이 ‘민주화’를 반대 버튼으로 쓰는 일베 유저 – 그중에서도 민주화가 진짜 나쁜 말인 줄 아는 바보가 아니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민주주의란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헌법이 규정하듯, 민주주의란 대한민국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과잉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알레르기
여기에서 나는 김진태 의원의 놀라운 의학적 식견을 엿보았다. 그는 인체의 면역 시스템에 빗대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면역 시스템은 우리 몸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는 중요한 방벽이다. 괜히 정관장이 홍삼을 팔면서 면역력 얘길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몸을 지키는 근간인 면역 시스템도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정말 위험한 침입자를 감지하여 막아야 할 면역체계가 오히려 사소하고 별 문제 되지 않는 작은 자극 하나하나에 반응하면서, 인체가 오히려 그 면역반응에 의해 괴로움을 겪게 되는 현상을 알레르기라고 부른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정작 중요한 사안에서는 물타기나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사소한 자극에 대해서만 과잉반응한다면? 이런 ‘민주주의 알레르기’가 횡행한다면 이는 결코 훌륭한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진태 의원의 발언은 마치 민주주의 자체가 나쁜 것처럼 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런 ‘민주주의 알레르기’는 민주주의의 한 단면일 뿐 결코 민주주의를 깎아내릴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면역 시스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면역 시스템은 억 단위에 달하는 다양성을 통해 우리의 건강을 지켜내고 있다. 민주주의가 다양성으로서 우리의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선천면역
면역 시스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선천면역(innate immunity)과 적응면역(adaptive immunity)이 그것이다.
선천면역은 말 그대로 선천적으로, 건강한 사람 누구나 가지고 있는 면역 시스템이다. 우리 몸의 1차 방어선을 담당하고 있는 피부도 선천면역의 구성원이다. 또 침입자가 이를 뚫고 들어오더라도 포식세포, 내츄럴 킬러 세포 등 이름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세포들이 출동하여 이를 제거하게 된다. 선천면역은 인체엔 없지만 외부의 침입자들은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물을 인식하며, 이를 통해 침입자를 분별한다.
그러나 이런 강력한 선천면역 시스템에도 한계는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시스템인만큼, 인식할 수 있는 구조물의 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 약 천여 가지 패턴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또 선천면역은 같은 침입자를 또 만나더라도 더 효율적으로, 더 빨리 처리하지 못한다. 그저 전과 똑같이 처리할 뿐이다. 침입자가 그동안 인체에 끼칠 해악을 생각하자면, 이는 몹시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래서 적응면역이 필요하다.
적응면역
앞서 설명한 선천면역과 비교해 적응면역의 큰 특징 중 하나는, 그 이름처럼 면역계가 ‘적응’한다는 것이다. 적응면역은 외부의 침입자를 인식한 뒤 이를 ‘기억’하여, 다음에 재차 같은 침입자가 나타났을 때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격퇴한다. 또한 일생에 걸쳐 더 많고 다양한 외부의 침입자를 새로 배우고 인식한다. 말하자면 점점 더 발전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적응면역이 인식하는 침입자의 수는 선천면역보다 훨씬 많은 억 단위에 이른다.
외부의 침입자들이 인체에 들어오면, 인체에서는 이를 잡기 위한 전문가들이 먼저 출동한다. APCs라고 불리는 이 전문가들은 침입자들을 인식하고 잡아 다른 면역세포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한다. 다만 이들은 침입자를 잡기 위한 전문가들일 뿐이며, 실제 이 침입자들을 제거하는 것은 다른 면역세포에게 맡긴다.
면역세포는 이를 직접 처리하기도 하고,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이를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이는 크게 세포매개 면역과 체액면역으로 나뉘는데, 내용이 워낙 복잡하므로 그냥 그런 것들이 있다는 정도만 알아도 무리가 없겠다.
침입자들의 진화
그러나 면역계가 발전하는 것처럼 침입자들도 발전한다. 자신이 침입자라는 것을 발각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표면적인 부분을 변화시켜 더이상 자신을 침입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 면역 시스템에 관여하는 ‘전문가’ 세포들의 일부 분자를 제거하거나 하여 침입자를 처리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또는 면역 시스템상의 주요 세포를 직접 죽여버리기까지 한다.
이처럼 침입자가 면역 시스템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만큼, 우리 몸도 새로운 위협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며, 이를 격퇴해야 한다. 면역 시스템은 다양한 세포가 다양한 기전 속에서 역할하며, 억 단위의 개성을 갖고 있어 그만큼 다양한 침입자들에게 대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날 경우 이를 인식하고 배우기까지 한다. 그 다양성이야말로 위협에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시스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