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짝사랑을 도대체 몇 번 해본 거야?”
〈전지적 짝사랑 시점〉을 쓰다 보니 자주 듣는 질문이다. 보통 그럼 5,000번쯤 했다고 말하고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남몰래 항변하자면 우리 모두 한 번쯤은 짝사랑을 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만약 없다면, 당신은 짝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 사람들은 짝사랑을 인정하지 않을까? 어쩐지 짝사랑은 대단히 지질하고, 짠 내 나게 애절하며,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듯 답답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은 짝사랑이라는 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야박하게 만들어낸 이미지인 게 분명하다. 사실 알고 보면 모든 사랑은 짝사랑인데 말이다.
큰일이다.
왜 너의 메일 주소까지도 이렇게 마음에 드는 걸까.
너를 좋아하기에
이 생명력 없는 알파벳 조합에도 반해버린 걸까.
- 「메일 주소」, 62쪽
처음 내가 짝사랑을 알아차린 건 어렵지 않았다. 태권도복을 입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던 내가 그 아이 앞에서는 모든 게 창피해졌던 그 순간. 친구들 앞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과장되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던 내가 그 아이 앞에서는 숨 쉬는 박자를 잃어버린 그 순간.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그 순간이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에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좋아해요.
내 마음 고스란히 들켜줄게요.
당신에게만큼은 자존심 세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만 내게 용기를 내줘요.
- 「좋아하게 해줘요」, 49쪽
고백도 못 했기에 중학생 고만한 키만큼 어설프고 풋내났다. 그땐 물론 나름대로 진지했고 사랑 때문에 아파했지만 돌이켜 보면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운 짝사랑이었다. 이런 게 짝사랑이라면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땐 ‘시시해서 못하겠다’고 자만할 만큼 알맞았던 정도. 하지만 돌이켜보니 이건 고작 프롤로그에 불과했다.
알았다면 좀 대답을 하든가.
몰랐다면 좀 알아보려 하든가.
…
그것도 어려우면
그냥 눈 딱 감고 나 한번 만나보든가.
- 「그만 좀」, 115쪽
대학이라는 나름 넓은 세상에 입학하자 본격적으로 짝사랑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여고에서 인터넷 강의 속 강사님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내게 한 번에 생겨난 수십 수백 명의 남자 사람의 존재는 굉장하고 대단했다. 눈만 마주쳐도 설레고 손만 닿아도 사랑에 빠지는 짝사랑 최적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달까?
그런 아이에게 ‘선배’라는 사람이 멋짐과 여유로움을 뿜어대니 또 짝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배와 나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신난 철부지였다.
그래도 짝사랑을 하고 싶어요.
그래도 사랑이잖아요.
그래도 그대와 나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낄 수 있잖아요.
- 「그래도 짝사랑」, 53쪽
하지만 끝내 선배의 마음은 알 수 없었고 그 역시 짝사랑으로 진단 내려졌다. ‘현자타임’이 왔다. 나는 왜 또 짝사랑일까. 그때 주변에 연애하는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아, 내게도 남자친구가 생기면 더는 짝사랑은 하지 않겠구나.
그 사람이 가져온 유일한 말은
‘미안해’ 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함의 대상이 되는 건
최악이었다.
- 「미안해」, 132쪽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리고 짝사랑도 심화 과정으로 들어섰다. 내가 좋아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지만 온전한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은 완전함과 편안함을 주는 것이라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할까? 불안과 확인의 연속이었고 그 모습 역시 짝사랑이었다. 기울어진 너와 나의 마음…. 이 또한 짝사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땐 모든 것이 어려워졌다. 짝사랑의 덫에 빠져버렸다.
보고 싶다.
이 한마디를 하지 못한다, 너에게는.
네가 대답하지 못할 말은 하지 않는 게
내가 해야 하는 배려가 되었으니.
- 「보고 싶다」, 158쪽
그래서 모든 순간이 짝사랑이었다. 짝사랑이라는 것이 나는 그대를 사랑하지만 그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라면 모든 사랑은 돌이켜 보니 짝사랑이더라. 우리의 인생은 안타깝게도 전지적이지 않아 나의 마음을, 너의 마음을 들을 수가 없다.
입을 거쳐 말하는 순간 그저 공허한 말이 될 뿐 온전하게 닿지 못하기에 끝내 알 수 없다. 온전하지 못한 그 이름이 딱 우리들의 사랑이었다. 혼자였을 때도, 함께했을 때도, 우린 짝사랑이었다.
처음부터 나였다, 이 관계의 갑은.
내가 놓으면
언제든 끝날 관계이기 때문에.
- 「갑」, 13쪽
그러니까 다들 짝사랑을 해봤고, 하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 할 것이다. 나 혼자 사랑하기 시작한 그때도, 너와 함께한 그때도, 헤어진 그 후에도 모든 순간은 짝사랑이었기에 짝사랑 이야기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있다. 풋풋하기도, 때론 철없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한 모습으로. 사랑할 줄은 알지만 이룰 줄은 모르는 우리이기에.
끝이에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겠죠.
내 짝사랑의 엔딩 크레딧에는
누구의 이름이 올라갈까요?
- 「엔딩 크레딧」, 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