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은 거의 모든 OECD 국가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에 대해 최근 조사하던 중 나는 이 사건을 대하는 학교 교사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특이한 나라를 발견했다. 이 나라에서는 학교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패턴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1.
혹시라도 만에 하나 가짜 피해자의 날조로 억울하게 가해 누명을 쓰는 사람이 생기면 안 되니까, 주변 사람들이나 학교 당국은 피해자의 진술을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왜 사건 직후 신고하지 않았지? 선생님이 중립적이지 않을 거라고 의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니? 혹시라도 가해자에게 폭력이나 분노를 유발시킬 어떤 언행을 했었을까? 네가 그렇게 억울한 상황이었는데, 설마 친구들이 다 가만히 있었니? 만일 그렇다면 왜 모든 친구들이 가해자 편을 들고 침묵을 지켰다고 생각해?
혹시라도 이게 거짓이면 결백한 사람에게 부당한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나쁜 일인 거 알지? 다시 한번 처음부터 자세하게 반복해볼래? 너를 믿지 않는 건 아니고, 혹시라도 없었던 말을 지어낸 것이라서 불일치가 발견되는지 확인해보려고 해……”
2.
가해자를 중심에 놓고, 그 ‘실수’의 무게와 그 가해자가 갖고 있는 유망한 잠재성, 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지 보여주는 사례들, 성적이나 집안 환경 등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자질 등의 무게를 비교하고, ‘정말로 전자의 실수 때문에 후자를 완전히 말살시켜도 되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나라에서 ‘퇴학’이면 실질적으로 생명이 끝나는 거잖아요? 보니까 가해자 XX이는 공부도 잘 하고 표창장도 여러 번 받은 학생이던데, 그 유망한 미래를 이런 사건 한 번으로 완전히 지워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동안 공부한 게 너무 아깝지 않아요? 식상한 이야기 같지만 국가와 미래를 위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 인재냐구요. 피해학생은 원래 사교성도 부족하고 공부도 못한다고 하던데…..”
3.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훈훈한 마무리>를 시도한다.
“자, 가해자 XX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어요. 학교 폭력을 문제삼는 건 가해자에게 마녀사냥을 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잖아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사회에 좋은 학생으로 복귀하도록 하기 위함인 거죠. 어쨌든 이번 일로 우리 가해자 XX이도 배우고 느낀 바가 클 거예요. 아무리 모범생이고 좋은 학생이어도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교훈을 다른 친구들에게 줬어요.”
“사실 안타까운 실수이긴 하지만, 우리 가해자 XX이가 지금까지 반장으로서 학교와 다른 학생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던 걸 다들 알죠? 학교 폭력 문제의 해결이란 잘못된 학교 문화를 고치고 같이 성숙해나가자는 것인데, 그걸 망각하고 피해자의 편을 든답시고 가해자에게 인격적 모독을 가하거나 학교를 그만두어야 한다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어야 한다고 비난하는 건 성숙하지 못한 일이예요.”
“(피해학생 쪽을 바라보며) 자, 그러니까 이제 피해학생과 그 친구들은 가해자의 반성을 받아들이고 가해자가 다시 우리 친구로 돌아오도록 협조해 줬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밝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는 게 좋지 않아요? 언제까지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사람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잔인한 짓을 할 건가요? 게다가 그 친구들은 본인이 당한 일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결론을 말하면, 며칠 조사를 한다고 학교에 나오지도 못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우리 가해자 XX이는 내일부터 다시 학교에 나오게 될 거예요. 어차피 정학처분 일주일인데 조사기간이 일주일이었거든요. 모두들 자기 죗값을 치르고 돌아올 가해자 XX이를 따뜻하게 맞이해서 부당하게 배척하거나 따돌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4.
결국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피해자로 밝혀진다.
결국 피해자는 그런 일을 당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어찌 됐건 학교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한 학생이라는, ‘무조건 편을 들기보다는 거리를 둔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지만 – 가해자는 지금까지 모두에게 우수한 모범생으로 알려져 있다가 이런 폭로 때문에 그렇게 쌓아온 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충격을 받아야 했으니 또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무조건 비난하지 않고 거리를 둔, 유보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의 혜택을 입는다.
그래서 정의에 미치기에는 턱도 없는 처벌과 고통을 받은 가해자가 다시 돌아오고 그걸 보고 있어야 하는 피해자는 ‘이미 끝난 사건을 가지고 계속 원한과 원망을 갖고 혼자서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심지어 가끔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이제 좀 그만 하라.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역성을 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피해자만 학교에서 사라지면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되는 상황이 마련된다.
가상의 국가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저 패턴이 친숙한 것은 이것이 현실의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4의 어디에도 ‘폭력’과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친구의 실수와 그로 인한 불편한 상황”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구조적인 폭력의 양태다.
구조는 구조에 속한 개인들에게 (1) 친숙하면서 쉽게 동일시가 되는 ‘우리’와 (2)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서 바라보며 거리를 두게 되는 ‘타자’를 구별하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에 속한 존재가 ‘타자’를 대상으로 폭력을 휘둘렀을 때, 자연스럽게 이 구조가 반복되며 2차 폭력이 생산된다.
하지만 2차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자기 성찰을 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자신이 “자연스럽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왜 폭력이 되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의 느낌, 반응, 생각은 구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의 성폭력에 대한 반응은 타고난 성별이 여성인가 남성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피해자 = 옳은 쪽 = 우리’, ‘잘못한 놈들 = 타자’의 구조로 생각하고 판단한다. 그래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가족을 찾아서 폭언을 늘어놓고도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이 사람이 생각하는 성폭력은 “여성이 구조적으로 열등하게 취급받는 남성지배사회에서 여성을 대상화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나쁜 놈들이 저지르는 짓”일 뿐이고, 자신은 나쁜 놈이 아니니까 그 나쁜 놈들에게 뽄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가족에게 연좌제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에 아무 문제가 없다.
어떤 여성들이 가해자인 남성에게 지지를 보내며 ‘가해자를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가 반성하게 하는 것이 미투 운동의 목적 아니냐. 그가 자숙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수 있도록 관심과 배려가 있으면 좋겠다’는 요지의 말을 할 때, 그 여성은 가해자와 같은 사회적 집단(예술인 집단이거나 사회 지도층)에 속해 있어서 그쪽에 동일시하며, 피해자인 여성을 시야에서 배제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이 말은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있지만, 피해자인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다시 생산해서 휘두르는 2차 가해이다.
미투 운동은 그동안 이렇게 구조적으로 타자, 대상, 사물로 취급받던 존재들이 ‘나도 동등한 존재이다. 그래서 말할 수 있고 말하려고 한다’고 나서는 운동이다. 여전히 그들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낡은 구조(와 그 산물들)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구조를 깨는 것이 미투 운동의 귀결이 될 것이다.
“무서워서 어디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겠냐.”
“그렇게 따지면 가해자 아닌 사람이 어딨냐”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 텐데, 이게 바람직한 운동이냐”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주인인 우리=수컷>의 자리에서는 당연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분들은 잠자코/닥치고 기다려 주셨으면 한다. 위의 글에 나온 저 이상한 나라는 이제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