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월, 박애주의자이자 배우였던 오드리 헵번 떠나다
1993년 1월 20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이면서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렸던, 모두가 사랑한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이 스위스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4세.
그는 영화를 통해 다양한 여성의 삶과 성격을 창조하면서 미국영화협회(AFI)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세 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이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영화는 그 개인의 필모그래피를 넘어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작품들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예순 살 즈음하여 은퇴한 뒤 나중에 말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유엔 아동기금, UNICEF)에 헌신했다. 1954년부터 이 기구의 조직에 참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공동체에서 일했다. 사람들은 오드리 헵번을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유니세프의 아름다운 활동가, 박애주의자로 기억한다.
오드리 헵번(본명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Audrey Kathleen Ruston)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벨기에와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 발레 공부를 시작하여 1948년 런던으로 가서 수업을 계속했다.
헵번은 어린 시절 나치 치하의 네덜란드에서 힘겹게 살았다. 이 시절에 헵번은 굶주림과 영양부족에 시달렸고 나치 저항 운동에 가담한 가족들을 잃었다. 그는 튤립 구근을 캐 먹고 쓰레기까지 뒤져 먹을 정도로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네덜란드가 해방된 뒤, 연합군이 지원해 준 연유를 허겁지겁 먹다 탈이 나기도 했다.
그가 ‘박애주의자’로 기억되는 까닭
화려한 조명을 받는 은막의 스타로만 헵번을 기억하기 쉽지만 어린 시절에 겪은 처절한 경험은 그를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인도주의자의 삶을 살게 했다. 그는 굶주림, 특히 아이들에게 배가 고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1989년에 유니세프를 통해 헵번은 그렇게 말했다.
“나 역시 2차대전 때 음식과 의료 지원을 받았던 수혜자였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 안다.”
영국으로 간 헵번은 웨스트 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에서 코러스 걸로 활동했고 몇몇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후,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Colette)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45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를 원작으로 한 1951년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로마의 휴일>(1953)에서 주연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브리나>(1954), <파계>(1959),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샤레이드>(1963),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어두워질 때까지>(1967)와 같은 성공적인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헵번은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영국아카데미영화상(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 Arts, BAFTA), 뉴욕비평가협회 등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4관왕’이 되었다. 이후 그는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 그리고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을 모두 받은 첫 번째 배우였다. 1954년 헵번은 연극 <온딘(Ondine)>으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연기력에 대한 의구심도 잠재웠다.
헵번은 1967년까지 영국아카데미상(BAFTA) 여우주연상을 세 번 받았고 EGOT(에미-TV, 그래미-음악, 아카데미-영화, 토니-연극)상을 모두 수상한 12명의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990년을 전후하여 영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영국아카데미에서 평생공로상, 세실 B. 드밀 상, Screen Actors Guild Life Achievement Award와 토니상 특별상을 받았다.
외모와 스타일로 패션과 유행을 창조하다
헵번의 전성기는 할리우드의 황금시대였다. 그는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 등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를 얻고 있던 시절에, 호리호리하고 지적이며 고전적인 얼굴과 몸매로 등장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작 그 자신은 만족하지 못한 외모지만 그는 ‘미의 상징’, ‘세기의 미녀’로 불리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외모와 스타일로 패션과 유행을 창조한 배우였다. 그가 선보인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 옷차림은 현대에도 꾸준히 재유행하거나 변형되고 있다. 그의 등록상표였던 짙은 눈썹과 큰 눈을 강조한 메이크업, 데뷔작 <로마의 휴일>에서 선보인 단발머리는 지금도 ‘헵번 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영화 <사브리나>에서 입어 ‘지방시’를 세계적인 패션 하우스로 격상시켰으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선보인 헤어 스타일과 검은색 드레스, 긴 장갑도 ‘헵번 드레스’라고 불리며 유명해졌을 만큼 전성기의 헵번은 유행의 선두주자였다. 헵번은 미국영화연구소로부터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에도 헌정되었다.
은퇴를 전후하여 헵번은 영화 출연 대신 유니세프 굿윌 홍보대사로 지내며 그 활동에 헌신했다. 마지막 작품 <영혼은 그대 곁에>(1989)에 출연한 뒤, 그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공동체에서 일했다.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 활동에 참가하고 제삼 세계의 오지 마을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며 미소짓는 헵번은 노년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암 투병 중이던 1992년에도 그는 소말리아를 방문하여 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오드리 헵번은 이러한 활동으로 1987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코망되르를 받았고, 1992년에는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을, 1993년에는 아카데미의 진 허숄트(Jean Hersholt) 박애상을 수상했다.
사후, 유엔이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
헵번의 사후, 유엔과 ‘세계 평화를 향한 비전’은 오랫동안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헌신한 그를 기리기 위해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이 상은 문인과 철학자, 시각 예술가와 연예인,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선정하며 수상자에게는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평화의 비둘기’ 모양의 핀이 수여되며 ‘유엔의 친구’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오드리 헵번은 훌륭한 배우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박애주의자였다. 숱한 배우들 가운데 그가 단지 배우로서만이 아니라 은퇴 이후에 보여준 인류에 대한 헌신으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배우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이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