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일을 미루는 편이다. 회사 업무처럼 돈 받고 하는 일은 제때제때 해치우니까 공적인 자리에서는 티가 나지 않으니 망정이지, 사적인 자리에서는 모든 일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뤘다 한다.
하루의 시작과 끝을 보내는 내 모습은 가관 오브 가관. 아침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 퇴근하고 나서는 샤워하는 것, 밤에는 심지어 잠자는 것을 미룬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다음날 아침이 되면 이불을 부여잡고 일찍 잘 걸 후회하지만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 어느새 이런 미룸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미루는 과정에는 귀찮다는 묘사가 덧붙는다. 일어나기 귀찮아, 회사 가기 귀찮아, 퇴근하고 집에 가기 귀찮아, 씻기 귀찮아, 자는 건… 귀찮나? 잠깐, 스마트폰 내려놓고 눈만 감는 게 귀찮다고?
표현력이 풍부하지 못하면 슬픔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모조리 묶어 ‘짜증나!’ 한 마디로 요약정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버릇처럼 말하는 내 귀찮음도 그 뒤에는 사실 다른 감정들이 숨어있는 건 아닐까.
귀찮음을 무릅쓰고 내 귀찮음의 뒤를 밟아 보았다. 일어나서 회사 가기 귀찮은 건 전 세계 사람들과 위아더월드! 를 외칠 수 있는 소재니까 넘어가고, 나머지 상황에서 귀찮음과 미룸이 찾아오는 데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 일을 하고 난 다음 시작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
퇴근하고 집에 오면 글을 써야 한다. 가끔 그림도 그려야 한다. 뒤처지지 않으려면 요즘 이슈라는 콘텐츠도 확인해야 하고 인사이트를 얻으려면 책도 읽어야 한다. 모두 좋아하고 즐기는 일이지만 나중에 이런 일들로 먹고살겠다는 욕심이 있기에 취미 이상으로 시간을 쏟고 노력해야 한다.
칼퇴가 보장된 좋은 회사에 다닌다면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겠지만 내가 다니는 작은 스타트업은 일이 넘쳐난다. 쌓인 일을 밤늦게까지 쳐내다 집에 돌아오면 운이 좋아야 밤 열 시나 열한 시. 씻고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다. 아침에 출근을 해야 하니까 황금 같은 귀한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음,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 글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측할 수가 없다. 주제를 잡고 콘티를 짠 다음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는 나름의 과정은 있지만 문장을 쓰다가 콘티 단계로 돌아가기도 하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까지 찍어 두고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고 모든 과정을 되짚어 보기도 한다.
막힘 없이 쓰인 글이 내 맘에 쏙 드는 운수 좋은 날도 가끔 있지만 보통은 삼 분이면 읽을 글을 쓰는 데 세네 시간 이상이 걸린다. 문제는 긴 시간을 들여 수정을 거듭해도 결국에는 ‘누가 이런 허접한 글을 썼지…?’ 싶을 만큼 형편없는 게 완성될 때가 있다는 거다. 내 고생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작가의 서랍’ 한구석에 머무를 걸 생각하면 글을 쓰는 게 두려워진다.
그래, 시작을 미루는 건 욕심 때문이었다. 마음에 드는 글을 완성시키겠다는 욕심
글이 마음먹은 대로 술술 나오는 날만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지금 쓰게 될 글이 망했을 상황에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욕심을 버리자. 심호흡 몇 번 하고, 귀여운 고양이 사진 몇 장 보고, 유튜브 영상 몇 개 틀어놓고 5분만 10분만 미루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새벽 두세 시가 된다.
그러고 나면 나란 인간은 이렇게 만사 귀찮다고 대충 살며 산소나 낭비해도 괜찮은 걸까 자책하며 잠이 드는데, 귀찮아하지 말자고 아무리 다짐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나는 대충 사는 귀차니스트가 아니었다. 제대로 살고 싶은데 실패할까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욕심쟁이었다.
이 두려움을 없애려면 실패하지 않는 글만 써낼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실패하는 글이 나오는 걸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지를 알아내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안의 관심종자를 먹여 살리는 조회수나 댓글을 얻지 못해서? 꾸준히 글 쓰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뒤쳐질까 봐? 이런저런 팩트가 묵직하게 마음을 때리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완성되어 다른 사람에게 읽히지 못할 글을 쓰면 난 시간만 낭비하는 걸까? 당연히 아니지!
글을 쓴다는 건 게임으로 말하자면 경험치를 쌓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막 아이디를 만든 신규 유저라면 레벨업이 어렵지 않지만 어느 게임이든 랭킹에 드는 수준, 흔히 말하는 ‘네임드’가 될 만큼 레벨을 올리려면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소싯적 메이플스토리에서 슬라임 좀 잡아봤다 하는 사람이면 다들 알 거다. 레벨 1에서 10까지 올리는 건 몇 시간이면 되지만 레벨 100에서 101이 되는 건 하루 이틀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하지만 레벨업이 까마득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경험치가 꾸준히 쌓이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첼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바흐의 무반조 첼로 모음곡을 지금의 위상으로 끌어올린 레전드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그는 93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도 매일 3시간씩 첼로 연습을 했다. 이유를 묻는 기자에게 “나아지고 있는 게 보이니까요.”라고 말했다는 그에게서 다음 레벨업이 까마득해 보여도 경험치 쌓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고수의 내공이 느껴진다. 나는 이제 막 튜토리얼을 마친 주제에 레벨업이 어렵다며 찡찡대는 뉴비었구나 싶어 문득 부끄럽다.
실패가 두려워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 자신을 돌아보자. 내가 지금 실패를 두려워할 레벨이라도 되나?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성장을 향한 경험치를 제대로 쌓을 수 있는 일이라면 잡다한 핑계 대지 말고 일단 시작하자.
글 하나 쓰다 망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계속하다 보면 실력도 어느 순간 레벨업하겠지. 어라, 이 생각이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있는지 이번 글은 미루지 않고 마무리했다. 몇 번 고민하다 발행 버튼을 누른다. 다음 글은 이번 글보다 좀 더 좋을 걸 기대하면서!
원문: 여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