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하는 생각인데, 남자친구보다 친구 사귀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
연애야 말랑말랑하게 썸 좀 타다가 서로 마음이 맞다 싶으면 “우리 오늘부터 1일!” 하고 연인 관계가 성립된다. 연인이니까 매일 전화를 하고, 주말에 데이트를 하고, 인스타에 #럽스타그램 태그 달아 사진 올리는 게 이상하지 않다.
친구 관계는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리 친구 된 날’을 디데이 앱에 기념일로 등록해 두는 사람은 없을 거다. 어느 순간 스리슬쩍 친구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지만 소심한 나는 눈치부터 살피게 된다.
나만 이 사람이랑 친하다고 생각하는 거면 어떡하지? 지금 수다 떨고 싶어서 전화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주말에 만나서 밥이나 먹자고 하면 부담스러우려나? 이 사람을 친구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더군다나 나는 낯을 가리는 편이라 친구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도 다들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주말에 보통 뭘 하고 지내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다.
“저 주말에 집에서 하루 종일 자다가 일어나면 치킨 시켜 먹어요. 히히. 만날 친구가 별로 없어서요.”
“엇, 여름님, 우리는 친구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니까 섭섭하다~”
“…?!”
“맨날 친구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럼 뭐가 돼요~”라고 이야기하는 이 사람들은 요 몇 달 동안 함께 동호회 활동을 하는 분들이다. 이날은 마침 주말에 일정을 맞춰 같이 영화를 보러 나왔다가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던 차였다. 사실은 주말에 시간 많으니까 앞으로도 같이 놀자는 뜻이었는데 내가 말을 잘못 꺼냈다.
“아, 정말요?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거예요?! 사실 저도 우리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친구라고 불러도 괜찮나 해서… 그러면 부담스러우실까 봐서요.”
내 말에 섭섭했겠구나 싶어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뻤다. 내가 많이 좋아하는 분들이라 더 친해지면 참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입 밖에 내어 말하기 부끄러웠지만 오해는 풀어야 하니까 저렇게 이야기했더니 ‘여름님 나름의 자기방어였구나’, 하고 넘어가게 되었는데… 자기방어. 그래. 내가 함부로 친구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된 데 큰 계기가 된 사건 하나가 있다.
몇 년 전 내가 취준생이었을 때, 내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곧 결혼한다며 날아온 그 사람의 카톡에 진심으로 축하를 전했고, 며칠 후에 있을 웨딩 스튜디오 촬영을 도와달라는 말에 하루 짬을 내 따라다니며 12시간 동안 스냅사진을 찍었다. 천 장 넘게 찍은 사진 중에 백여 장을 골라 보정까지 해서 보내줬고 결혼식 땐 없는 돈 털어 축의금도 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신혼여행 다녀와서 보자는 인사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는 내게 연락하지 않았다.
주위에 이 이야기를 꺼내면 “너 호구였구나? 보통 그렇게 촬영 도와주면 조금이라도 돈을 주거나 축의금을 내지 말라고 하던가 하는데. 밥도 한 끼 못 얻어먹고 고생만 했네.” 하더라.
당시 ‘지인페이’로 거하게 능력을 착취당한 것보다 더 나를 속상하게 했던 건 그 사람과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였다. 그 사람은 나를 고작 자기 인생에서 ‘지나가는 행인 23(스냅촬영 가능)’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었다니. 이렇게 마음에 생채기가 한번 나니까 새로운 사람과 친해질 듯 말 듯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친구가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미어캣마냥 경계 태세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었다. 지금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그때 나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마음의 문을 쉽게 열지 않기로 마음먹은 다음부턴 예전만큼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건 그만큼 내가 여러 관계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문제가 생길 것이 두려워 피해 버리니 당연히 관계 때문에 고통받을 일도 없다. 하지만 이건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온 사람들마저 섭섭하게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짓이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가 혼자 먹는 치킨보다 맛나다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친구 없이 사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없다. 용기를 내 지인에서 친구로, 한 걸음 더 앞을 내딛는 수밖에.
밥 한번 먹자! 는 뻔한 말 대신 언제 시간이 되나 물어보고, 문득 네 생각이 났다며 카톡이라도 한번 해 보고, 당신이랑 이야기 나누는 게 즐겁다는 표현도 좀 해 보고. 아, 진짜. 연애보다 어렵구만!
원문: 여름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