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월 작가 전혜린, 서른한 살로 지다
1965년 1월 10일 일요일 아침, 전날 지인들과 밤 10시까지 술을 마시다 자리를 떴던 작가 전혜린(田惠麟, 1934~1965)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은 그의 사인을 ‘심장마비’(<조선일보>)와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경향신문>) 등으로 전했지만 일반에는 자살로 널리 알려졌다.
유족이 입을 다물고 있어 자살 여부는 가릴 수 없는 일인데도 자살로 알려진 것은 죽기 이틀 전에 술자리에서 읊었다는 다음 글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인지도 모른다. 1월 8일 초저녁 술자리에서 그가 읽고 태워버렸다는 글이다.
몹시 괴로워지거든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
그때 당신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이미 살아있지 않으리라.
당신의 여인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노라.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지라도
나의 혼은 당신과 함께 있노라.다시 사랑하면서
촛불은 거세게 희망과도 같이
타오르고 있으리라.당신을 보기 위해 나의 눈은
멍하니 떠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글의 출처는 알 수 없다. 내가 소년 시절부터 알고 있는 버전은 위와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그것은 그가 ‘자살예찬론자’였고 끝내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렸다는 사실로 뒷받침되는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전혜린은 고작 서른한 살에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전혜린의 문학과 우리들 ‘사춘기의 공감’
우리는 전혜린의 유고 수상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비롯한 그녀의 저작들을 읽으며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그때만 해도 사춘기 아이들은 비슷한 책을 읽고 비슷한 감동을 나누곤 했다. 우리는 전혜린이 번역한 『데미안』을,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같은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우리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비롯한 에세이를 읽으며 확인하게 된 그의 독일 유학 시절을 마치 자신의 체험처럼 떠올릴 수도 있었다. 뮌헨의 ‘회색 포도(鋪道)’와 제복을 입은 할아버지가 긴 막대기로 한 등 한 등 켜 간다는 ‘레몬 빛 가스등’을 말이다.
‘우울한 안개비의 포장과 뜨거운 사기 난로, 구운 소시지 냄새’, ‘언제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짙은 회색 구름과 언제나 공기를 무겁게 적시고 있는 두꺼운 안개’로 떠오르는 ‘뮌헨의 10월’을 우리는 추체험했다.
그리고 전혜린이 살았던 ‘나의 도시’ 뮌헨, 그중에서도 그가 만 3년을 기거했던 슈바빙을, 레스토랑이나 다방에서 손님들이 데운 맥주를 요구하는 수가 늘게 된다는 그 도시의 10월을 우리는 마치 동화처럼 기억해 내곤 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금세 지나갔고, 우리는 이내 20대에 진입하면서 그를 잊어버렸다. 우리 같은 멋대가리 없는 사내아이들이 그랬을진대 같은 세대의 여자아이들은 오죽했을까. 나는 우리 10대의 기억 속에 남은 그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전혜린은 우리 뒷세대의 감성에도 만만찮은 화인(火印)을 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용언의 『문학소녀-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반비, 2017)를 읽고 나는 전혜린의 문학적 자장(磁場)이 생각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소녀 전혜린에 대한 빈정거림
김용언은 『문학소녀』를 통해 ‘전혜린에 열광했던 세대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 ‘문학소녀들의 통과의례’로 읽혔던 전혜린에 대한 열광보다 더 많이 들리는 ‘빈정거림’을 변호한다.(이하 인용은 같은 책에서)나와 비슷한 세대인가 했더니 김용언은 1976년생, 20년 아래다. 그런데도 그는 전혜린으로 대표되는 문학소녀 시절을 겪었단다.
김용언이 일러주는 전혜린은 ‘일제에 의해 이식된 근대 문화와 제국주의의 하위 파트너였던 식민지 최상층 엘리트가 가진 돈과 문화 자본에 의해 길러졌다.’ 그의 부친 전봉덕은 식민지 경찰 관료로 해방 당시 경시(총경) 자리에까지 올랐고 뒤에 군인으로 변신하여 헌병사령관까지 지낸, 『친일인명사전』과 ‘친일파 708인’에 오른 부일 협력자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꼭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자란 전혜린은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 식민지인으로 지닐 수 있는 민족의식 따위와는 무관하게 그는 비정치적으로 성장했다는 얘기다. 그의 내면을 채운 것은 역사적 정체성 대신 ‘무서운 인식욕’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인식에 대한 욕망이 그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짓게 되었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 거기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미국의 물질주의를 경멸하고 유럽의 정신적 풍요로움과 지적 탐구’를 찬양하게 된다. 그것은 곧 그가 ‘고국 아닌 다른 곳’에서 ‘순수한 향수’를 느끼고 싶은 ‘도착된 욕망’이었다.
귀국하여 서른 살에 대학교수가 되지만 그는 조국의 현대사와는 무관하게 ‘세계시민’이기를 원했다. 여전히 전근대적인 조국에 살면서도 그는 유럽의 삶과 정신을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점이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전혜린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를 폄하하는 시각의 근거이기도 했다.
동시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저작을 남겼지만 그게 일상적 에세이와 번역서라는 이유로 전혜린은 본격 창작자로 불리지도 않았다. 수필 장르 하나만으로도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한 남성 작가들이 적지 않은데도 말이다.
전혜린은 그러나 ‘절대로 평범해져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그를 여느 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절의 엘리트 집안에서 성장하고 독일 유학을 하고 돌아온 전혜린은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 보수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괴짜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환기해야 할 문학적 감수성과 문제의식
무엇보다 ‘불란서 시집을 읽는 고운 손’이라는 독재자 박정희의 지적이 겨냥하는 것은 문학소녀를 생산과 건설에 참여하지 않는 반사회적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문학소녀는 졸지에 ‘공공의 적’,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적폐’로 떠올랐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읽고 쓰는 여자’에 대한 멸시는 1920~30년대 이어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소녀’ 전혜린을 대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이상이 김용언이 제사한, 전혜린에 대한 빈정거림이 계속되고 있는 근거다. 그러나 전혜린이 쓰고 번역한 책을 읽으며 젊음의 한 시기를 지났던 청년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쓴 글을 통해서 환기된 문학적 감수성과 철학적 문제 제기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비록 ‘소품 수준의 일기, 편지 등’(서강대 박숙자)에 불과했지만 그것이 동시대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 문학 주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서은주(연세대 국학대학원) 교수가 지적한 바, “전혜린에는 대중을 매혹하게 하는 문학적 감수성과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는 문제의식, 그리고 문학계 주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주변성이 혼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문학, 교양의 시간(소명출판, 2014)』
서은주는 한국문학사에서 전혜린의 존재를 배제시키는 논리의 저변에는 한국문학이라는 제도의 보수성과 편협성이 작동하고 있다며 ‘전혜린’이라는 텍스트를 지금 다시 호명하는 작업은 한국문학 혹은 남성중심주의 문학의 완고성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후 반세기 만에 다시 우리 문학에 소환된 전혜린과 그의 문학을 눈여겨 봐도 좋을 이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