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이 에일리언 시리즈를 위해 디자인한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생김새, 스파 스파 스파 스파 전원을 켜면 들려오는 우렁찬 팬소리, 바이오스 설정으로 들어가려면 del을 누르라는 – 수십년 째 발전 없는 조잡한 부팅 화면. 당시 컴퓨터란 당연히 그런 것으로 생각했던 내게 아이맥은 꿈의 컴퓨터였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우윳빛의 흰색 몸체, 적막한 방에서도 소음이 들리지 않는 정숙함, 회색 화면 중앙에 애플 로고가 자리한 깨끗한 부팅 화면. 나는 애플 팬이 되었다.
그 이후로 애플은 수많은 변혁을 이뤄냈다. 아이폰은 말 그대로 ‘휴대전화를 재발명’했고, 아이패드는 태블릿 컴퓨터의 개념을 뒤흔들었다.
애플은 그러면서 때로는 로자 파크스(백인 좌석과 유색인종 좌석이 구분되어 있던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던 흑인 여성. 이는 흑인 인권운동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를 추모하고, 제안 8호(동성 결혼 허용에 반대하며, 이성간의 결혼만을 결혼으로 인정하는 캘리포니아의 주민 발의안)에 반대하며, Product(RED)(에이즈 치료 및 예방 기금을 모으기 위한 캠페인. 프로덕트 레드의 이름을 건 붉은 색 제품을 구입할 경우 일정액이 기금으로 적립된다)에 동참하는 등 좋아할 수 있는 회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 이후 애플은 어딘가 동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강력하지만, 그들만의 매력을 잃고 있고, 경쟁자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행보를 보이기까지 한다. 애플은 더는 애호의 대상이 아니다.
왜 한 명의 애플 팬이 2013년의 애플을 혐오하게 되었을까.
1. 이도 저도 아니었던 iOS 6와 청화대의 추억
iOS의 아버지 스캇 포스탈의 목을 잘라버린 iOS 6. 이 메이저 업데이트에는 ‘주요 기능’으로 내세울 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휴대전화 자체가 결제 도구가 되는 시대에 뜬금없이 나온 패스북도, 사상 최악의 전자제품 중 하나라는 애플 tv 없이는 쓸 수도 없는 에어플레이도 모두 매력이 없었다.
개중에서도 애플이 자체적으로 만들었다는 지도는 특히 재앙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재앙이다. 애플 지도 안에서 청와대는 강남의 한 중국집 이름이다.
한편 실제 청와대가 있어야 할 곳에는 시진핑 주석의 모교인 청화대(清华大)가 대신 위치한다.
자랑해 마지않던 플라이오버는 예쁘지만 쓸모없이 자리만 차지한다는 점에서 김태희의 연기를 연상케 한다. 플라이오버를 사용함으로써 나의 삶이 더 ‘나아지는’ 부분이 한구석이라도 있는가? 집 구석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삐뚤빼뚤 3D 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걸 효용이라고 볼 수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2. iOS 7의 그라데이션과 형광테러
미(美)에 어찌 기준이 있겠으며, 미추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얘기할 수 있겠냐마는…
사실 ‘더 단순하게’를 지향한 iOS 7의 방향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글이 한동안 인터넷에 떠돈 적이 있다. 요즘 어린 세대는 ‘저장’ 아이콘이 왜 플로피 디스켓 모양인지를 모른다고. 플로피 디스켓을 저장매체로 쓴 적이 없으니, 그게 왜 저장을 상징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아이튠스는 아이콘에서 CD를 버렸다. 본격적인 디지털 세대로 넘어오며, 현실의 어떤 물체에 빗대 아이콘을 만들 수 있는 시대도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그 ‘현실의 어떤 물체’가 오히려 덜 익숙할 수도 있으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iOS 7의 ‘단순함’이 그러한,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우리가 맞게 된 새로운 고민에 부합하는가 하면 그건 아니올시다다. 아마 사진 앱 정도만 그런 변화에 부응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파리의 아이콘은 여전히 나침반이다. 다만 더 못생겨졌을 뿐이다. 성인이 정성 들여 그린 나침반 대신 ㅍㅍㅅㅅ가 그림판으로 그린 나침반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오히려 퇴보한 것도 있다. 카메라의 아이콘은 렌즈 모양에서 실제 카메라 모양으로 바뀌었다.
카메라 렌즈는 스마트폰에도 달린 것이고, 앞으로도 한동안 사진을 찍으려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지만, 카메라는 – 이미 스마트폰에게 그 지분을 상당 부분 빼앗긴 물건이다. 이건 ‘디지털 시대’의 합당한 변화가 아니다. 블로거 미리야 님의 촌평처럼, “아사달 같은 데서 500개씩 묶어 30만 원에 파는 저질 스톡 이미지 끌어다가 붙인 것”으로 아이콘을 교체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눈을 괴롭게 하는 건 전반적으로 형광으로 떡칠된 색감이다. ‘통화 중’을 나타내는 상단 바는 형광 초록색이고 ‘테더링’을 나타내는 상당 바는 형광 파란색이다. 눈을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아니면 이런 색은 못 뽑았을 것이다. 거기에 사파리, 아이튠스, 앱스토어, 날씨 앱, 메일 앱 등 기본 앱 전반에 형광으로 과감하게 그어버린 그라데이션은…
3. LTE를 감당하지 못하는 배터리
일체형 배터리는 분명한 단점이다. 배터리가 떨어져도 교체할 수 없고, 배터리만 따로 충전할 수도 없고,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다. 다만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강점 – 아름다운 디자인, 얇은 두께 등 – 때문에 용인할 수 있는 것이지.
그래도 그나마 아이폰은 통화대기 시 소모전력도 적었고, 나름 배터리 수명이 괜찮은 편이라 버틸 수가 있었는데, 아이폰 5가 LTE를 채용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LTE 신호가 약한 곳에서는 배터리를 광속으로 빨아먹는다. 웹 서핑만 하는데도 세 시간을 겨우 넘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성, LG 등 안드로이드 제조사들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사용했다. 배터리를 늘려버린 것이다. 이들 제조사는 아이폰의 2배에 달하는 배터리를 장착한다. 그리고 배터리를 착탈식으로 만든다. 영 배터리가 모자라면 하나 더 들고 다니면 되는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충전기나 외장배터리를 들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뭐, 애플이 여분의 충전기나 외장배터리를 제공한다면 맞는 말이겠지만. 게다가…
4. 소니의 메모리스틱에 비견할 만한 명작, 라이트닝 케이블
애플의 독자규격 충전 케이블, ‘라이트닝 케이블’이 문제다.
물론 좋은 케이블이다. 작고 얇으며, 상하 구분 없이 어떻게 끼워도 잘 들어간다.
문제는 이 케이블이 그리 튼튼하지 않다는 것이다. 잘 단선된다. 음, 뭐 그럴 수도 있지. 케이블은 소모품이니까 단선되면 하나 새로 사는 게 당연하다.
… 이 선 쪼가리가 하나에 2만 6천 원짜리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넘겼을 것이다.
경쟁사들이 채용하고 있는 마이크로 USB 케이블은 옥션에서 삼천 원이면 살 수 있다. 상하 구분 없이 쉽게 끼울 수 있는 대가가 2만 3천 원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독자규격을 채택하면서, 아이폰 유저들은 밖에서 폰을 충전하기도 한결 어려워졌다. 엔간한 가게에는 마이크로 USB 충전기는 비치되어 있고, 안드로이드 사용자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폰을 충전할 수 있다. 하지만 예쁘고 상하 구분 없이 끼울 수 있어 편리하지만 2만 6천 원짜리인데다 고객의 5%도 채 쓰지 않을 라이트닝 케이블을 굳이 비치해놓는 가게는 애플 리셀러나 애플 팬이 경영하는 매장 외에는 없을 것이다. 소니가 꾸준히 반복했던 독자규격 삽질을 연상케 한다.
5. 5s까지 반복되는 핑퐁 전략
2011년, 애플은 작년 모델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데다 3g 더 무겁기까지 한 신제품을 내놓는다. 아이폰 4S다. 이걸 처음 봤을 때 황당했던 마음은, 올해 5s를 내놓는 걸 보고는 ‘이놈들이 뭐 그렇지’ 하는 방관자의 마음으로 바뀌었다.
휴대용 가젯, 그것도 최상위 제품군의 디자인을 ‘똑같이’ 우려먹는 걸 기꺼워 할 사람은 애플 주주 말고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자동차 회사의 패밀리 룩에 비견하기도 하지만, 그들도 “자 여러분, 새로운 5 시리즈를 공개합니다!” 라며 전작이랑 100% 똑같은 디자인을 내놓지는 않는다. 아이폰 5s는 금색이 생기고 홈버튼 모양이라도 바뀌었으니 그나마 다행일지도.
더 나은 성능을 제공하기 위해 새로운 디자인에 역량을 집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애플은 구성원이 다들 올라운드 플레이어라 작년 디자인 팀이었던 사람들이 올해는 프로그래머 팀이 되기도 하고 내년에는 마케팅 팀이 되기도 하는 그런 회사일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6. 개선은 커녕 악화되는 리퍼 정책
리퍼 정책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아이폰 5는 33만 6천 원, 아이폰 5s는 39만 6천 원을 요구한다.
이제 당신은 아이폰의 전원 버튼이 잘 안 눌릴 때, 당신의 아이폰과 39만 6천 원을 애플에게 바치고 대신 누군가 쓰던 재생품을 받아오거나, 거기에 6만원만 더 내고 막 공장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넥서스 5를 사오고 당신의 아이폰도 그대로 가지는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7. 한국 시장에서 쓸모없는 수많은 기본 앱들
한국에 아이튠스 스토어는 없다. 따라서 저 보라색 그라데이션으로 눈을 테러하는 아이튠스 스토어 앱은 쓸 방법이 없다. 그래도 기본 앱이다.
패스북은 쓸 데가 없다. 당신이 쓰는 프랜차이즈 중 패스북과 제휴한 곳이 한 곳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잡스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열 일이 없지만, 그래도 기본 앱이다.
미리 알림 앱에는 특정 장소에 도착하거나 떠날 때 알려주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연동되는 지도가 애플 맵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지하철역도 검색 안 되는 이런 석기시대 물건으로 무엇을 할 수 있으리.
아이폰 4S부터는 국내에서 아이폰의 입지가 많이 좁아졌지만, 아이폰 3GS와 아이폰 4는 메가히트를 기록한 물건이다. 그런데도 사정이 이렇다.
아이튠스 스토어야 멜론 등 기존 음원 사이트의 비정상적인 수익 구조나 저작권자들과의 협의 등 거쳐야 할 산이 많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패스북이 여전히 텅텅 비어 있고 애플 지도가 지하철역조차 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 개발자가 애플의 소통 부족을 토로하는 현실까지는 실드를 칠 수가 없다.
심지어 애플은 iOS 6까지 사람의 이름을 표기할 때 성과 이름을 한 칸 띄어 썼다. 성과 이름을 붙여쓰는 한글맞춤법·표준어규정이 고시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이십오 년 전, 1988년의 일이다.
iOS 7에선 그래도 성과 이름을 붙여 쓰게 되었으니 한 걸음 나아간 거 아니냐고? 그렇지만도 않다. 연락처 앱에서, 임씨 성을 가진 예인 씨는 ‘임예인’으로 검색되지 않는다. ‘예인’이나 ‘임 예인’으로는 검색되지만.
아이폰은 훌륭한 폰이다. 미국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미국과 미국이 아닌 나라에서 아이폰의 효용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한국에서 아이폰은 그리 훌륭한 폰이 아니다.
그래서 이제 애플을 버려야 할까? 세계 최고 매출의 가전 회사이며, 한국 경제를 일으켜세워야 하니 엔간한 범죄는 사면해 마땅하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의 은공까지 돌려야 할 건희대제의 삼성전자만 믿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아래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안드로이드라 한들 흠잡을 수 없는 완성품인 건 아니니까. 쓸모없는 기본 앱과 디자인 문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에서 더 크게 보이니까.
한때 나는 애플을 구멍가게로 표현한 적이 있다. 가게도 작고, 상품 종류도 다양하지 못해 단점도 극명하지만, 독특한 매력을 잊지 못해 결국 다시 찾게 되는 가게.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 애플은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애플은 정체해 있다. 구멍가게 시절의 단점은 그대로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던 매력은 점점 그 색을 잃어가고 있다. 2013년의 애플이 싫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