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블록체인은 현재의 기업 중심 자본주의 사회의 패러다임을 쉬프트시킬 수 있는 기반 기술이다. 모든 새로운 기술이 그렇듯 블록체인도 시장이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캐즘을 넘지 못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암호화폐는(가상화폐와는 다르다, 가상화폐와는!) 이 새로운 패러다임과 기술이 개발될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자, 일반인들이 펀딩을 할 수 있는 기회이다.
현재 암호화폐 중 미래가 밝다고 점쳐지는 화폐들은 대부분 커널 내지 미들웨어 기술을 개발하는 화폐들이다. 조악하게 비교하자면 윈도우나 맥OS를 개발 중이거나 TCP/IP 같은 프로토콜을 개발하는 것이다. 아직 페이스북이나 아마존, 구글 같은 서비스는 나오지도 않았다. 돈 버는 어플리케이션들이 나오려면 멀었다는 뜻이다. (송금용 medium이라는 구체적인 어플리케이션 용도로 나온 암호화폐들도 물론 있다)
현재의 웹, 인터넷 기술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대부분 나랏돈이다.
TCP/IP는 알다시피 미국방성의 DARPA에서 ‘펀딩’한 실험에서부터 시작했다. 정부와 군대의 돈이 들어가 만들어진 기술이다. HTTP는 팀 버너스리가 CERN에 있을 때 처음 프로포즈 된 프로토콜인데, CERN은 유럽연합이 ‘펀딩’해서 돌리는 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이다. Wi-Fi의 핵심 요소는 CSIRO라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연구기관에서 한 연구의 byproduct로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 같은 OS 계열은 가라지 벤처 창업의 원조들이다. 본인 자산 팔아서 ‘펀딩’, 패밀리 ‘펀딩’, 지인 찬스 ‘펀딩’ 등으로 부트스트래핑 했다. 이후의 많은 IT 기업들도 비슷한 루트를 따르면서 VC ‘펀딩’을 많이 받으며 크게 컸다.
현재 우리가 공기처럼 여기는 인터넷(이라 부르고, 페북, 인스타, 네이버, 카톡이라고 읽는다)은 다~ 저 기술 위에서 돌고 있는 것이다. 이 기업들은 현재 인터넷 산업의 총아들이며 돈을 엄청나게 벌어들이고 있다. 시작은 따지고 들어가면 나랏돈과 VC 펀딩으로 개발된 기술들로 돈을 벌고 있는 셈.
2.
새로운 사업 혹은 기술은 위험성이 높다. 흔한 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하다는 말은, 사업을 개발하는데 돈은 많이 들어가는데 완성 후 시장에서 안 먹히면 들인 돈을 회수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사업에는 보통 전문적 지식이 있는 VC들이 면밀히 검토한 뒤 투자에 들어가고, 국가는 이런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할 경우 일반인으로부터도 소액 투자를 받을 수 있게 허락을 해준다. ( = IPO, Initial Public Offering을 한다)
암호화폐는 ICO, Initial Coin Offering을 한다. 주식과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의 토큰을 발행하고, 사업(or 기술)을 개발할 ‘펀딩’을 일반인으로부터 받는다. 말하자면, 기존의 화폐 시장에서 일반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아서 이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시장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다른 화폐를 만들고 그쪽으로 펀딩을 받는 것이다.
게임이 바뀌는 순간이다. 전문화된 VC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링 위에 군중들이 떼거지로 몰리는 것이다. 부작용이 없으면 그것이 말이 안 되는 격변의 시기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거래소 투기 행태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될 때 따라오는 흔한 부작용 같은 것이다.
3.
세상의 모든 패러다임은 소수에게 집중되어있던 권한이 다수에게 열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디어가 대표적인 예다. 라디오와 제한된 채널의 TV만 있던 게 고작 10~15년 전 이야기다. UCC, 아프리카, ustream 등 여러 버즈 워드들이 있은 후 1인 미디어 시대로 가고 있다.
투자도 마찬가지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전문 교육을 마친 엘리트인 VC들이 전문적인 식견으로 투자처를 고르지만, 새로운 사회에서는 일반인들이 인터넷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룹채팅방에서 정보를 공유한 뒤 투자처를 고른다. 웹2.0이라 불리는, 다수의 사람이 정보를 올리고 다수의 사람이 정보를 공유하는 인프라가 만들어졌기에 가능해진 매커니즘이다.
돈이 곧 권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교적) 분산되는 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상상할 수 없는 어떤 형태의 사회가 구성될 수 있다. (어떤 형태가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4.
그러니까, 나는 암호화폐를 도박 내지는 암 덩어리로 규정하고 거래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에 반대한다. 그건 적어도 시대의 흐름과는 반대되는 방향이다.
나랏돈으로 TCP/IP, HTTP 등의 프로토콜들을 개발할 때 망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성공했어도 시장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수많은 기술들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VC 들이 투자하는 수많은 스타트업들, 100개 중 90개는 망해서 본전도 못 찾는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에서 일반 시민들은 국가 내지는 VC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삼촌이 말했듯이.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냉정히 말하면, 그들은 근대 국가의 보호 장치를 거부하고 새로운 시장으로 뛰어들기로 했으니, 새로운 규칙 아래서 얄짤 없이 망하면 망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최소한의 국가의 보호 장치 혹은 규제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리고 상술했듯이, 현재 거래소의 암호화폐 가격 널뛰기는 확실히 비정상적이다. 오늘의 사업 개발의 진행 상황과 가치 평가가 비례해서 가고 있지 않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맞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말하자면, 분기 실적을 발표하지도 않았는데, 하루 안에 애플의 주식 가치가 $100→$200→$50→$10→$800 이런 식으로 바뀌는 꼴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현재 많은 암호화폐들은 미들웨어 기술을 개발한다. 제품 자체에서 돈이 바로 안나올 수도 있다. 물론 새로운 decentralized world에서는 비즈니스 모델이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꼭 돈이 크게 안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만, 사람들이 잘 이해하는 것인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이상한, 혹은 말도 안 되는 지점들이 나열하면 좀 더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으로 보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거나, 규제 및 보호 장치로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근본적으로 진입을 차단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근본적으로 차단도 불가능하다.
5.
Let people fail and learn이 내 생각이다. 문제가 있으면 답도 있다.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답을 찾을 것이다. 사람들을 어린애마냥, 왕이 어린 백성을 보듯 사람들이 답을 찾을 그 기회를 뺏는 것은 문제다.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들이 쉽게 뚫어버릴 것이다.
We will find a way. We always have. – <Interstellar(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