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3일 JTBC의 교양 프로그램인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을 다루었다. 강연자는 전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이자 서예가인 김병기였다. 김병기는 시종일관 광개토왕비가 일본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본인의 견해를 바탕으로 강연을 진행하였고, 그가 하는 주장들은 방송에 출연한 패널들의 과장된 리액션을 통해 놀라운 탁견, 셜록 홈즈가 하는 기가 막힌 추리인양 연출되었다.
인터넷 반응을 보니 방송 내용을 좋게 보는 시청자들도 많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방송을 보며 전공자로서 화가 많이 났다.
광개토왕비는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연구사 정리만도 굉장한 품이 들 만큼 100년 이상 수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어 연구를 수행하였다.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이 제기된 것은 1972년 재일 학자 이진희에 의해서였다. 그는 광개토왕비 탁본에 따라 글자가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을 문제 삼았고, 20세기 초 일본의 육군 참모부가 광개토왕비의 일부 글자에 대해 석회 도포 작전을 수행하여 의도적으로 비문 내용을 변조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학계에 무척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진희의 주장은 1980년대 들어 중국 학자 왕건군(王健群)의 연구를 통해 해명되었다. 왕건군은 광개토왕비가 서 있는 집안 지역에 장기간 머무르며 비를 상세히 조사하는 한편, 비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들과 상세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개토왕비에 칠해져 있는 석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들이 입수되었다. 왕건군의 조사에 따르면 비에 석회를 칠한 이는 일본 육군 참모부가 아니라 광개토왕비 근처에 살고 있던 초씨 성을 가진 중국인 부자(父子)였다.
이들은 광개토왕비 부근에 거주하며 탁본을 떠서 생계를 꾸렸다고 한다. 광개토왕비는 매끈하게 다듬은 비석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외형을 가진 비였기 때문에 탁본 제작에 어려움이 있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풍화가 이루어진 데다가 발견 직후 비를 뒤덮고 있는 넝쿨과 이끼를 제거하기 위해 중국인들이 비에 불을 지르는 과정에서 불길의 온도를 이기지 못한 표면이 갈라지고 깨지는 등 많은 손상이 발생하였다. 이 역시 좋은 탁본을 얻는 데 장애가 되었다.
이에 초씨 부자는 탁본을 쉽게 뜨기 위하여 울퉁불퉁한 비 표면에 석회를 발라 다듬었다. 흐릿한 글자들의 윤곽을 보다 뚜렷하게 보이도록 손을 대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엉뚱한 글자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원래의 비문에 왜곡이 가해진 셈이었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석회 탁본’은 그전에 만들어진 탁본들보다 글씨가 선명하고 깨끗하여 탁본 구매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꽤 오랫동안 탁본업에 종사하던 초씨 부자는 나중에 이 일을 그만두고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왕건군이 조사를 할 당시 마을에는 초씨 부자와 잘 알고 지냈던 이웃들과 일가친척이 아직 거주하고 있었다. 왕건군은 그들의 증언을 통해 광개토왕비에 석회 칠을 한 초씨 부자의 행위 전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장 조사에 근거한 왕건군의 연구로 인하여 일본 육군 참모부가 석회 도포 작전을 통해 광개토왕비문을 변조하였다는 이진희의 주장은 논파 되었다. 하지만 광개토왕비에 석회가 칠해진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탁본의 사료적 가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이에 학자들이 주목한 것이 광개토왕비에 석회가 칠해지기 전에 제작된 탁본들이었다. 이를 ‘원석 탁본’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확인된 원석 탁본의 수는 10여 개에 달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미즈타니본, 가네코본, 부사년본, 북경대 소장본 등이다. 우리나라에도 원석 탁본이 존재하는데 임창순본과 최근 조사된 혜정본이 원석 탁본이다.
역사학자들은 원석 탁본을 통해 비문의 재판독을 시도하였다. 석회칠로 왜곡되지 않은 원형의 텍스트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몇몇 글자들의 왜곡을 바로잡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광개토왕비에서 가장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신묘년 조’의 판독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일본 육군 참모부의 석회 조작설을 믿었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원석 탁본에서도 해당 글자들은 기존의 판독문과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원석 탁본에 대한 면밀한 조사 이후 광개토왕비문 연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판독 논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황에서, 이 텍스트를 어떤 맥락에서 읽어내야 하는가가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었다.
최근 역사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견해는 광개토왕비문을 독해할 때 비를 세운 5세기 고구려인들의 의도와 욕망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비의 목적은 광개토왕의 훈적을 과시하는 데 있으므로, 고구려인들에게는 이를 돋보이기 위한 서사가 중요하였다. 광개토왕의 업적이 부각되기 위해서는 그가 무찌른 적이 허약해서는 안 된다. 가급적 강하고 위협적인 존재여야 좋다.
이에 주목한 것이 ‘악역’으로 설정된 ‘왜’의 존재이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비에 ‘왜가 원래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공격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문장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광개토왕이 벌인 정복 전쟁에 당위성을 부여하였다.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달리 왜를 강대한 세력으로 과장해 묘사하여 광개토왕의 무훈 또한 더욱 빛나게 연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현재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 학계조차 더이상 광개토왕비 신묘년조 기사를 통해 임나일본부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김병기의 강연을 들으며 화가 났던 것은 이러한 역사학계의 연구사가 깡그리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김병기의 사고는 여전히 70~80년대 횡행하였던 낡은 문제의식의 틀에 머물러 있다. 신묘년 조 판독을 일본이 처음 제시한 판독과 다르게 해야만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강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이 부분이다. 김병기 개인이야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2018년에 방영되는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30~40년 전에나 횡행하던 낡디낡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나.
김병기는 석회로 인한 비문 변조설을 넘어서 일본이 원석 자체를 변조하였다는 주장까지 펼친다. 하지만 그 근거라는 것이 참으로 박약하다. 우선 본인이 광개토왕비 탁본 글씨를 구해서 그것을 따라 쓰다가 보니 ‘콱 막히는 부분’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변조된 부분이더라 라는 이야기. 그는 이것을 서예가로서의 육감이라고 했다. 하지만 방송을 보면서 ‘기가 콱 막힌’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무슨 학문을 육감으로 하나.
김병기가 비문 변조를 문제 삼는 부분은 그 유명한 신묘년 조 문장이다. 광개토왕비 1면 9째줄에 있는 문장으로, 그 내용은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소개한 대로 다음과 같다.
김병기의 주장은 이 문장에서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를) 깨뜨렸다”는 ‘도해파(渡海破)’ 부분이 변조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변조되기 전의 원래 글자까지 제시하였는데, 그가 제시한 변조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김병기의 주장에 따르면 ‘도해파(渡海破)’는 원래 ‘입공우(入貢于)’였고, 이렇게 복원한 글자로 문장을 다시 배열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入貢于百殘□□新羅 以爲臣民”.
김병기의 해석은 이러하다.
“백제와 신라는 옛부터 속민이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가야와 신라에게 조공을 들여놨으므로 (고구려가) 일본을 신민으로 삼아줬다.”
대단하다! 글자 몇 개 바꾼 것만으로 내용을 반전시켜 일본이 백제와 신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 더 나아가 고구려의 지배를 받는 신민으로까지 만들어 버렸다.
방송에서 이 김병기가 이 해석을 제시하는 장면은 웅장한 BGM이 은은하게 깔리고, 패널들은 박수를 치는 형식으로 연출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패널들의 발언.
“(딘딘)우와, 멋있다.”
“(홍진경)만약에 이게 진짜라면 진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거네요.”
하지만 패널들과 달리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뒷목을 잡았다. 이건 철저하게 김병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은’ 판독이다. 세상에 자기 입맛대로 획을 넣고 빼고 하면서 읽는 판독이 어디에 있나.
김병기는 자신이 위와 같은 결론을 내린 게 서예학적 탐구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면서 제시하는 게 획의 수평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광개토왕비의 서체는 가로세로 획이 일관되게 수평-수직을 모습을 보이는데, ‘조작된’ 부분의 글씨는 오른쪽이 살짝 들려 있어 다르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인들이 근대에 들어와 명나라 서체를 참조해 만든 ‘명조체’의 흔적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광개토왕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적인 비와 달리 표면이 매끈하게 다듬어진 형태가 아니다. 비신에 부정형의 굴곡이 많이 있으며, 석재 역시 입자가 거친 응회암이다. 똑같은 글자라 하더라도 글씨가 새겨진 부위의 굴곡에 따라 획의 각도에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심지어 탁본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 방송상에서 보면 그는 글자의 대조를 할 때 ‘석회 탁본’을 사용하고 있다. 석회 탁본으로 글자를 대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광개토왕비에서 석회가 칠해진 부분은 신묘년조 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광개토왕비에 석회를 칠한 것은 부근에 살며 탁본 장사를 하던 초씨 부자였다. 그들이 석회를 칠한 목적은 ‘역사 왜곡’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탁본의 편이성을 확보하고, ‘예쁘고 잘 팔리는 탁본’을 생산하는 데 있었다. 때문에 신묘년조 뿐만 아니라 울퉁불퉁한 비의 표면 전체에 석회를 칠하였다. 즉, 김병기가 방송에서 보여준 비교 작업은 ‘석회칠로 오염된 글자’와 또 다른 ‘석회칠로 오염된 글자’들을 비교 대조하는 무의미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김병기는 글자 조작의 또 다른 증거로 글자가 서로 줄이 맞지 않고 비뚤어져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러나 이 역시 내가 앞서 말한 대로 광개토왕비의 비신 형태가 심하게 굴곡이 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게 의미가 없는 소리이다. 게다가 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사코오 가게노부의 묵수곽전본을 예시로 보여 주었다.
하지만 사코오의 묵수곽전본은 애초에 제대로 된 탁본이 아니다. 글씨 형태에 맞추어 윤곽선을 그리고 나서 바깥 부분에 시커멓게 먹물을 칠한 ‘유사 탁본’이다. 그나마도 조각조각난 종이들을 맞추어 조립한 것이다. 김병기는 사코오본에서 ‘도(渡)’는 오른쪽으로, ‘해(海)’는 왼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보여 주며 이것이 글씨가 조작된 증거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코오본에서 다른 글자들은 다 줄에 맞추어 글씨가 배열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사코오의 묵수곽전본을 보면 확실히 신묘년 조(빨간색 박스)에서 ‘도’는 오른쪽으로 , ‘해’는 왼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옆의 글자들(노란색 박스)를 보라. ‘도’의 오른쪽에 있는 두 글자도 일관되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고, ‘해’의 오른쪽의 세 글자는 일관되게 왼쪽으로 쏠려 있다. 김병기의 주장과 달리 줄이 안 맞는 현상은 다른 글자들에서도 나타난다. 심지어 근처에 모여 있는 여러 개의 글자들이 한꺼번에 한쪽으로 쏠리는 등 일관된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글자가 치우쳐진 현상은 조작 때문이라 볼 수 없다. 비신 표면의 굴곡 문제이거나, 탁본 자체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인 접근이다.
김병기는 자신의 주장이 서예학적인 접근의 결과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입공우’라는 판독은 너무나 무리한 주장,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세번째 글자, ‘파(破)’가 원래는 ‘우(于)’였다는 그의 주장을 한번 검토해 보자. 그는 광개토왕비문에 다른 ‘우(于)’가 있기 때문에 이를 참고하여 ‘파(破)’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심지어 그는 광개토왕비문에 참고할 수 있는 다른 ‘우(于)’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까지 했다고 한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광개토왕비에는 다른 곳에 ‘우(于)’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 김병기가 얼마나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왼쪽 빨간 박스(A)가 신묘년조의 ‘도해파(渡海破)’에서 ‘파’에 해당하는 글자이며, 오른쪽 빨간 박스(B)는 ‘우(于)’이다. 김병기는 ‘파(破)’에서 왼쪽 부수인 ‘석(石)’ 부분이 조작되어 붙은 것이라 하였고, 원래 ‘우(于)’였던 글자에서 첫 번째 가로획을 지우고 그 밑에 일부 획을 추가하는 식으로 조작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럴 경우 A의 원래 ‘우(于)’는 크기가 매우 작은 글씨로 상정해야 한다. 또한 오른쪽으로 매우 쏠려 있었던 형태로 이해하여야 한다. 누가 보더라도 궁색한 자형이 아닐 수 없다. 반면 B를 보면 광개토왕비에서 ‘우(于)’는 크기도 클 뿐 아니라 정사각형 공간 가운데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김병기는 본래 서예가이고, 방송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광개토왕비의 글씨가 멋지다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정작 ‘入貢于’라는 본인의 엉뚱한 추정을 증명하겠다는 욕심에 광개토왕비의 글씨를 아주 졸렬한 형태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깊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묘년조 문장에서 ‘파(破)’가 원래 ‘우(于)’였을 것이라는 김병기의 주장은 그냥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김병기가 지나가듯이 한번 언급하고 말았지만 광개토왕비문 연구에서 석회가 칠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뜬 원석 탁본은 매우 중요하다. 방송에서는 마치 일본인들이 처음 광개토왕비를 발견했다는 듯이 다루었지만, 실제로 광개토왕비를 발견한 것은 중국인들이었고, 처음 탁본을 뜨기 시작한 것도 중국인들이었다. 집안 지역에서 오래된 고비가 새롭게 발견되자 북경 등지의 서예 감상가와 수집가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고, 그 결과 북경의 유명한 탁본가들이 광개토왕비가 서 있는 집안 지역을 며칠씩 방문하여 탁본을 떠가게 되었다. 나중에 탁본업에 종사하게 된 초씨 부자는 원래 이들을 안내하는 이들이었으나, 어깨너머로 탁본 제작법을 배우고 나서 급기야 탁본업자로 직업을 바꾸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원석 탁본에서는 해당 글자들이 어떻게 보일까.
석회가 칠해지지 않은 원석 탁본에서는 두 번째 글자인 ‘해(海)’가 잘 안 보인다. 이 부분의 비신에 크랙 같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 ‘해(海)’를 판독불능자로 처리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학자들은 왼쪽에 물 수변을 인정하지 않고 ‘매양 매(每)’로 판독하기도 하며, 남아 있는 몇 개의 자획과 전체 문장의 맥락을 감안하여 ‘해(海)’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쨌든 나머지 글자들은 획이 비교적 분명하게 확인된다.
김병기가 광개토왕비는 석회가 칠해지기 전인 원석 단계부터 이미 조작이 있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석 탁본의 글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 원했던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본말이 전도된 이야기다. 탁본은 일본인들에 앞서 중국인들에 의해서 이미 제작되고 있었고, 사코오가 광개토왕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묵수곽전본을 구한 것은 나중 일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 중국인들이 제작한 광개토왕비 탁본의 글자들은 모두 일관되게 위와 같은 자형으로 판독되고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광개토왕비의 원래 글자가 맞다고 판단하는 것이 순리이다. 이를 끝내 부정하는 것은 ‘일본이 분명 비문을 조작하였을 것’이라는 최초의 선입관이 합리적인 사고 흐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기의 주장처럼 원석을 조작하는 것은 석회를 조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있다. 석회칠은 글자의 획을 지우거나 새로 만드는 게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원석을 조작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있는 글자에 새로 획을 추가해 새기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획들은 어떻게 지운다는 것인가. 탁본에 보이는 획은 비석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있는 획을 없애려면 돌에 새겨져 있는 획을 메꾸어 채워야 한다. 원석에서 그러한 작업을 어떻게 하였다는 것일까.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도 원석 단계에서 글자가 조작되었다는 김병기의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탁본업에 종사하던 중국의 초씨 부자는 비면에 석회를 칠한 행위로 광개토왕비를 훼손하고 후대 연구에도 커다란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들에게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손님들이 좋아하는 깨끗해 보이는 탁본을 떠 팔기 위해서 석회를 발랐을 뿐이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이들의 무지는 결과적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큰 해가 되었다.
나는 <차이나는 클라스>가 석회 탁본을 만들어 팔았던 초씨 부자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지식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적당히 가공하여 방송하는 것이 과연 교양 프로그램의 본령과 어울리는가.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식을 전파하는 사람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원문: 기랑의 백지 채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