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000 입니다. 회사 디자이너분 좀 바꿔주시겠어요?” 왠지 바꿔주면 안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폰트 저작권 관련해서요… 웹페이지에 윤고딕체 쓰셨죠?” 쎄했다.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하려다가 지금 개드립을 할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서 참고, 바쁘다고 관련 정보를 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새로고침을 해볼 틈도 없이 메일이 도착해 있다.
내용인 즉슨 우리가 자기네들 고객인 폰트 회사의 폰트를 막 갖다 써서 저작권법을 위반했으니까, 위반하지 말고 몇백 만원짜리 패키지 상품을 사라는 거였다. 안 사면 저작권법 위반이고, 경찰이 어쩌고 법원이 어쩌고 한다. 그리고 2일 안에 답변을 달란다.
사장님이 지시한 보고도 2일 안에 완성이 안 되는데, 얼굴도 모르는 법무법인의 요구를 받고 2일 안에 답변이 될 리가 있나. 그냥 무시했다. 이틀 후, 내용증명(A라는 사람이 B에게 어떤 메세지를 보냈다는 것을 증명)이 왔다. 역시 무시했다. 전화가 또 왔다. 내방하고 싶단다. 미쳤나. 현관에 전화해 입구에서부터 막게 했다. 이게 바로 요즘 기승을 부리고 있는 ‘폰트 저작권 단속’이다.
이들은 폰트회사로부터 ‘바른 저작권 만들기’ 어쩌구를 위임받았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표적으로 ‘법무법인 주원’, ‘법무법인 우산’, ‘법무법인 우성’, ‘법무법인 마천루’ 등이다. 사실 뭐 법인 이름이야 바꾸면 그만이고, 이름이 어떻든 하는 짓들은 똑같다. 대부분 폰트 위반이라고 하면서 패키지상품 구매를 강요한다. 그리고 의외로 피해자가 많다. 저작권법(구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 관련 판결문들을 일부 살펴보자:
“글꼴 자체와 같은 서체도안은 법에 의한 보호 대상인 저작물에 해당하지 아니함이 명백하다” (대법원 1996. 8. 23. 선고 94누5632 판결) “컴퓨터에서 사용되는 폰트파일은 컴퓨터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컴퓨터프로그램으로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다” (대법원 2001. 6. 29. 선고 99다23246 판결; 대법원 2001. 5. 15. 선고 98도732 판결 등)
전세계 60억 인구의 글씨체가 다 다른데, 개개인의 서체 각각에 일일이 저작권이 등록된다면 글씨를 쓸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저작권은 ‘폰트파일’에 적용된다. 즉, 당신이 ‘윤고딕 서체’를 구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윤고딕 서체’ 파일이 당신의 PC에 설치되어 있다면 이것은 저작권법 위반일 수 있다.
하지만 ‘윤고딕 서체’를 사용하여 인쇄 출판을 하거나 웹디자인에 사용했을 때, 이 결과물을 놓고 저작권법 위반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다. 2차 결과물에는 저작권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법무법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저작권 위반이라고 겁을 준다.
“당신 홈페이지 메인 타이틀에 <윤고딕>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매확인증 주세요.” 라고 하는 소리에 겁을 먹고 몇백만원짜리 패키지 상품을 구매하는 촌극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런 곳들이 많아서 아예 폰트업체에서는 저작권관련 설명을 공지해 놓았다:
이와 같은 내용을 공지한 한글과컴퓨터의 공지사항도 있다. 폰트 시리얼 넘버를 달라고 하는 법무법인 놈들도 있다. 보통 영업사원들을 시킨다. 하지만 줄 이유가 없고 줄 수 없다. 누군가 당신에게 전화해서 ‘윈도우 CD키 알려주세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알려주겠는가? 내방해서 저작권 검사 응해달라 하기도 한다. 영장 가져오라고 해라.
그리고 내가 저작권법 위반한 게 확실해서 자수하고 광명찾고 싶을 때는 그냥 바로 폰트회사로 가라. 법무법인에 빌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전혀 상관없는 일반인이 ‘당신 죄 지은것 같다. 그래서 회사 좀 뒤질테니 응해주세요’ 라는 것과 같다. 응해주지 말자.
피해자가 하도 많아서 카페도 생겼다.
- 네이버 카페: 저작권 / 퍼블리시티권 등의 고소 협박에 대응하는 모임
문체부와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관련 자료를 내놓았다. 꼭 참고하시길 바란다.
블로터 닷넷에서 최신 내용을 정리했다. 역시 참조하시길 바란다.
원문 : Lael’s 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