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난이 심하다고 하지만 모든 대학생들에게 취업난이 같은 수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공계가 위기라면 순수인문계는 오래 전에 다 굶어 죽어서 뼈도 안 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문학의 위기는 오늘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인문대생들이 지인들을 통해 힘겹게 취직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인문대 대표학과인 일명 ‘문사철’(문학, 사학, 철학)의 2011년 취업 성적표를 보자. 국문학과 졸업생은 39.3% 사학과는 43.6% 철학과는 38%가 정규직 취업했다. SKY를 필두로 한 명문대 인문학도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2011년 서울대의 동양사학과 졸업생은 20%가 취업했고, 철학과는 아무도 취업하지 못했다. 자연계는 ‘과’를 보고, 인문계는 ‘학교’를 보고 대학을 선택한다는 입시계의 격언이 민망할 정도다.
인문대에는 두 가지 유형의 학생이 있다.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학생과 취업이 일차적 목적인 학생. 그들이 당면한 문제는 각기 다르고 따라서 접근법도 달라야 한다. 인문학을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는 계속 공부하도록 독려할 수 있는 방법을,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인문학의 강점을 실용적으로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인문학 연구자가 되기 어려운 이유
인문대가 취업이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대가 본디 취업을 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부과정의 인문학과는 대학원으로 진학하기 전 기초적인 지식을 쌓는 가교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연구자나 교수가 되어 깊은 학문을 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디 목적인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학부생들에게도 이 길을 가고자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래 영상을 보자. (자막 있음)
위의 두 동영상은 인문학 전공자의 현실을 풍자한다. 영문학을 더 깊이 전공해 교수가 되고 싶은 한 여학생이 추천서를 부탁하기 위해 학과장 사무실을 방문한다. 영문학과 교수인 학과장은 그녀를 극구 만류한다. “적어도 7년에서 9년 정도는 더 공부를 해야 박사학위를 딸 수 있고, 학비를 위해 ‘조교’라는 이름의 노예가 될 거다. 이렇게 힘들게 박사학위를 받아도 그 중 극소수만 연구자나 교수가 될 수 있고 나머지는 비서나 수위보다도 못한 월급을 받으며 살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동영상과 인문학의 실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산학 협력 등으로 풍부한 자금원이 있는 상경계, 공대와는 달리 인문학과는 언제나 자금부족에 시달린다. 개인의 돈과 시간을 들여야 공부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투자에 비해 미래는 밝지 않다. “특수대학원들은 돈과 시간을 투자한 만큼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만 인문학은 그렇지 않죠. 그런데 누가 용감하게 인문대학원을 갈 수가 있겠어요.”라고 철학과 이미진씨는 말한다. 인문대학원 진학자들을 정부에서 보조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적 지원이 대학원생들에게도 고루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2012년 현재 정부의 연구지원 프로젝트인 ‘BK21’에서 인문학 분야에 대한 지원금은 과학기술분야의 8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인문학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팀 단위의 연구를 종용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다.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인문사회국가연구장학금 외에는 거의 없다. 풍부한 연구지원금이 있는 이공계와는 큰 차이가 난다.
공부를 마쳐도 문제다. 박사를 마쳐도 취업이 힘든 인문학의 특성상 연구자가 되어야 하는데, 정규 연구원이나 교수가 되는 것은 너무 어렵다. 새로 생기는 자리마저도 ‘외국인 교수’를 확충하기 위해 외국인을 뽑는 실정이다. 남은 선택지는 ‘시간강사’. 시간강사의 어려움을 확인해 온 학생들은 대학원을 다니면서도 평생 ‘시간강사’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수밖에 없다.
인문학과 정원 감축이 필요하다
진지하게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 교수들의 적절한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대학원 진학을 위한 제대로 된 상담이나 강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독일어나 프랑스어는 기본이에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시간이 있는 학부 시절에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없죠.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끼리 스터디를 꾸리는 게 전부예요.”라고 이미진 씨는 말한다. 인문학은 교수가 공부 방향을 끊임없이 잡아 주는 것이 필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학생 수가 많다는 점이 교수가 학부생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몇몇 인문대생들은 의외로 인문대 정원 축소를 이야기 한다. “인문학을 공부해서 직업을 꾸릴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어요. 그렇다면 진지하게 공부할 사람들만 받고 이들에게 더 많은 교육의 혜택을 주는 프로그램을 꾸리는 게 맞다고 봐요. 취업과 공부 모두를 잡을 수 없는 전공이니까요.” 인문학 전공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적기 때문에 적은 수를 뽑아야 오히려 인문학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필요하지만 누구에게나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모든 학생들에게 하는 기본 인문학 교육을 강화하고 학과 정원은 줄여 학부 수업을 심화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인문학도의 취업관문
인문학과의 한 켠에는 취업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인문학적 슬로건으로 훨씬 많은 입사지원서를 받고 있는 두산. 최근 서울대에 인문학 발전기금을 기부하고 인문관을 건설하는 등 인문학을 통한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두산은 이력서에 학점을 없애기도 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지만, 면접의 기회를 받은 인문대생은 거의 없었다. 두산의 최근 광고를 보고 지원을 결심했다는 인문대생 김하나씨는 “제가 지원했던 직군에 면접을 보러 갔던 친구가 30명이나 되는 면접자 중 상경계가 아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속았구나 싶었죠.”라고 실망감을 토로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인문대생들의 1차 관문은 ‘복수전공’이다. “상경계를 복수전공하지 않은 인문대생들에게 취업의 희망은 없어요.”라고 중문과 대학원을 다니는 이한솔씨는 말한다. 복수전공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복수전공을 허가받아도 많은 장벽이 남아있다.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이다. 과의 정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강의 수는 늘지 않는 상경계에서 인문대생들은 공공의 적이다. 성균관대처럼 복수전공과 원전공의 구별 없이 학위를 주는 학교에서는 인문대생들이 과 망신을 시킨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하게 흘러나온다.
대외활동에 공모전까지 상경계 못지않은 스펙으로 무장한 인문대생들도 여전히 면접장에서 좌절을 맞이한다. 복수전공을 하지 않은 러문학과 졸업생 박나희씨는”무슨 배짱으로 경영학 기본도 모르고 여기에 왔냐!”고 꾸중을 당했다. 면접관들의 얕은 지식으로 전공을 묻는 것도 구직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LG전자의 최종면접에서 “철학에서는 사람을 두 유형으로 어떻게 분류하는지 말해봐라.”는 질문을 받은 한 철학 전공자는 “철학에서는 사람을 분류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지만, 면접관은 자기도 인문학 강의를 들었다며 막무가내였다. 독문을 전공한 김이슬씨는 “세계 1,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국민성을 기반으로 어떻게 상품을 팔 것인지 제안하라.”는 몰상식한 질문을 받았다.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실무적 지식에는 약하지만 회사에서 분명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해요. 결국 이공계나 상경계같은 실용학문은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했거든요.” 경영학과 학생 김상현 씨의 의견이다. “제품에 인문학을 부여하여 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어야 실용적 목적에 대한 대가 이상의 이윤이 생기죠. 우리나라에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하지만 단기적으로 기업은 일 잘할 것 같은 상경계에 마음이 쏠리기 마련이다. 인문대생들보다 실무적인 지식이 더 많고, 정돈된 대답을 하기 때문이다. “인문대생들의 문제점은 면접에 가더라도 실용적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 하기 보다는 평소 습관대로 추상적으로 대답한다는 점인 것 같아요. 학문적 특성이지만, 면접관은 이해하지 못하죠.”라고 취업 재수생 박나희씨는 말한다.
인문대학생과 국내 산업의 상생
인문대 학생을 따로 선발하는 ‘인문대 전형’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인문대의 취업난을 해결함과 동시에 기업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혈할 수 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문과계열 채용인원의 10%정도를 ‘인문대 전형’으로 한다면 인문대 학생끼리 경쟁하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겨루어 볼 수 있는 전형과정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이 있는 면접관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글로벌 IT기업인 구글은 작년 채용인원 6000명 중 5000명을 인문학도로 채용했다. 10%가 많은 수치도 아니다. 기술발전이 가속화된 2012년의 시장은 ‘아이디어’싸움이 될 것이고 인문학의 중요성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박나희 씨는 ‘인문대 전형’도 궁극적인 해결을 해 주지는 못한다고 이야기 한다. “원서를 쓰기 위해 기업들을 보다보면 중공업과 건설 위주에요. 인문학을 차별하지 말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인문학이 거의 필요 없는 분야죠. 결국 중공업 위주의 우리나라 산업 구조가 재편되지 않고서는 인문학이 설 자리는 없어요.” 인문학을 필요로 하는 IT산업이나 문화콘텐츠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실용적이지 않은 학문이 아니에요. 같은 제품을 팔아도 인문학적인 가치가 부여된 물건은 훨씬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죠. 인문학을 우대하는 것은 인문학도들을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산업발전을 위한 것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