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10시 구미시청 현관에서 ‘초등 전면 무상급식 촉구 및 남유진 시장 규탄 구미지역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 기자회견’이 열렸다. 30여 명의 시민단체 대표, 정당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은 “구미시는 초등 전면 무상급식을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전면 무상급식, 구미 등 3개 시만 빠졌다
뜬금없이 무상급식 얘기가 나온 까닭은 최근 구미시가 상주시, 문경시와 함께 초등학교 무상급식을 전체 지원이 아닌 일부 지원으로 계획하고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 무상급식이 이뤄지고 있던 군 지역에 이어 2018년부터 다른 시부에서는 전면 무상급식이 예정돼 있는데 유독 구미시를 비롯한 4개 시만이 여기서 빠진 것이다.
경주와 김천시는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전면 무상급식이 계획돼 있고, 올해 일부만 지원하던 포항, 영천, 안동, 경산, 영주 등에서도 내년에는 전면 무상급식을 시행할 예정이다. 올해까지 미지원이었던 경산시도 내년부터 전면 무상급식에 들어간다.
그런데 자타 공인 경상북도 재정자립도 1위(2017년도 47.57%)의 구미시가 전면 무상급식 실시 시군에서 빠졌다. 구미지역 시민단체에서 구미시가 ‘박정희 제사상 차리느라 아이들 밥상을 걷어찬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시민의 지속적 반대에도 1,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박정희 우상화 사업에 퍼부어 온 구미시가 수십억 원 예산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일을 외면한 것이다.
구미 시민단체에서 지적한 대로 지난 2년 동안 구미시는 ‘박정희를 우상화하기 위해 1,5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낭비해 왔다.’ 박정희 생가 공원화 사업, 새마을 테마 공원 건설에다 마침내 지난 11월 14일에는 말도 많던 ‘박정희 유물전시관’도 공사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란 이름으로 착공한 이 건물은 구미 시민단체들에 의해서 ‘유물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미 그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다. 정치인 박정희의 역사 자료라면 이미 만들어진 시설로도 넘친다. 그런데 고작 그가 신던 슬리퍼나 소파, 자전거나 골프채 따위로 구성할 역사가 대체 뭐겠는가.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 숭모 제례와 역사자료관 기공식과 기념식이 열린 지난 11월 14일 박정희 생가 주변은 마치 세대 전쟁터 같았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생가 주변을 오갔고 확성기를 매단 차량에선 고음의 새마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마치 그간 요동친 정국 속에 숨을 죽이고 있었던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의기양양했다.
곳곳에 걸린 펼침막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소환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드러낸 문구로 가득했다. 그들은 국정농단과 탄핵으로 이어진 정국 속에서 어느새 소수가 돼버린 자신들의 자존심을 되찾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대다수 참배객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에서 나눠준 ‘박정희 정신’을 들고 행사장을 오갔고 곳곳에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박정희 100돌 행사를 가능한 한 경건하게 치르고자 하는 것 같았다.
결국 ‘200억 유물전시관’은 공사에 들어가고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앞에서 구미차인연합회 회원 100여 명이 진행한 과일과 맑은 차를 바치는 ‘헌다례’ 행사는 참석자들의 경건과 흠모의 정이 이를 수 있는 절정을 보여줬다. 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동상 아래 소복한 수십 명의 사람이 고개 숙여 절을 하는 풍경은 낯설고 낯설었다.
이날 행사장 곳곳에서 목격된 풍경은 박정희가 주도한 근대화에 대한 구세대의 향수를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그것은 한편으로 박정희와 그로 대변되는 근대화의 전설을 통해 구세대가 돼버린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받으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물전시관 기공식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남유진 구미시장, 김관용 경북도지사 등 주빈들이 하얀 면장갑을 끼고 새 삽으로 준비된 모래를 한 삽 떠넘기는 걸로 마감됐다. 그 한 삽의 모래가 200억 원 공사의 시작을 알렸다.
생가 앞에서 시민단체의 ‘유물전시관 건립 중단 요구 기자회견’이 열렸는데 보수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욕설 섞인 비난을 해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경찰들이 이들을 둘러싸 간신히 충돌을 막았지만 사방에서 틀어놓은 확성기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비난에 묻혀 시민단체의 회견문 낭독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박정희주의자’들이 잊은 것
행사장에 모인 보수단체 회원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 남 시장을 비롯한 보수 정치인들의 ‘믿는 구석’일 것이었다. 그들의 지지는 박정희 사업을 펴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판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 ‘박정희주의자’들이 잊은 게 있다.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이제 소수가 됐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은 모멸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들 보수 정치인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를 연출한 김재환 감독의 충고는 예사롭지 않다. 《노컷뉴스》에서 연재한 ‘박정희세대 관찰 보고서’ 3편 「“청년 전원책도 박정희라면 이를 갈았다”」에 따르면 그는 남유진 구미시장에게 해 주고 싶은 얘기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렇게도 꿈꾸는 경북도지사가 되고 싶다면, 박정희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관을 짓고 동상을 세우는 데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으면 안 된다. 박정희 정신의 핵심이 정말 ‘애민(愛民)’, 그러니까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애민을 실천하는 데 그 돈을 써야 할 것 아닌가.”
그는 구체적으로 ‘박정희 시대에 가장 고생했던 가난한 어르신들 복지를 위해 2/3을 쓰고, 나머지는 그분들 손주 세대의 창업 등 새로운 도전을 지원하는 데 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정책 전환이 ‘경북도지사에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 시장이 가는 길을 거꾸로다. 그는 200억 유물전시관의 기공식에서 시원스레 한 삽을 뜬 것과는 달리 내년도 초등 무상급식은 올해보다 한 개 학년이 는, 1~3학년에 한해서만 실시하기로 했다. 경북 최대 도시 포항을 능가하는, 연속 7년 동안 재정자립도 1위를 기록해 온 구미시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다. 비록 학생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다른 시에서 실시하는 전면 무상급식이 구미에서 멈출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시민단체 대표자들은 남 시장의 정치적 감각도 꽝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김영석 영천시장은 ‘박정희는 영웅’이라고 추어올리는 점에선 남 시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올해 저소득층 지원에 그쳤던 초등학교 급식을 내년도에 전면 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남 시장과는 다른 길을 제시했다.
현관에서 시민단체의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남 시장은 시 청사에서 출입 기자들과 간담회를 벌이고 있었다. 간담회에서 그는 ‘한정된 예산’을 이야기하며 전면 무상급식이 불가한 이유를 설명하려 했던 듯하다. 그는 자신이 ‘평등과 공정’을 중시한다면서 부유한 집 아이까지 무상급식을 할 까닭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고 했다.
기자 없는 기자회견을 마친 시민단체 회원들이 청사 1층의 시민사랑방으로 몰려가 시장 면담을 요구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루 전에 구미참여연대가 신청한 시장 면담을 시장이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반 시간가량 복도에서 밀고 당기는 승강이 끝에 결국 시장은 시민단체 대표를 만나야 했다.
구미시민은 ‘제사장’ 아닌 ‘시장’을 원한다
그리고 이 면담에서 남 시장은 무상급식을 촉구하는 시민단체 대표들에게 ‘내년부터 무상급식 실시’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유를 들든 구미시가 타 시군에서 시행하는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 무상급식은 더 이상 논란의 대상이 아니다. 선별과 보편으로 나누는 복지의 이분법도 필요 없다. 우리 헌법 31조는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원과 제주도에서는 내년부터 고교까지 무상급식을 시행한다고 하는 상황이니 더 무엇을 말하랴.
내년 지방선거에서 남 시장의 도지사 출마 여부는 유권자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따른 책임은 스스로가 지면 될 일, 남은 일은 그가 구미시장으로서 임기를 마칠 때까지 시정에 전력하며 시민들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든 피켓에 쓰인 아래 문구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 까닭이다.
“우리는 제사장이 아니라 시장이 필요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