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당시 5개 정도 기업에 최종합격을 했지만, 워낙 잘 나가는 STX그룹에 대한 환상으로 다른 회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바로 STX로 결정했다. 나는 팬오션이 해운회사인지도 몰랐다. STX가 뭔지도 모르는 부모님은 매우 감격해 하셨다.
STX의 짧은 리즈시절, 그리고 빠른 몰락
이후에도 회사생활은 아름다웠다. 국내연수는 제주도 롯데호텔에서, 해외연수는 크루즈호를 타고… 호프데이라면서 회사 옥상에서 맥주도 마시고, 회사의 성과에 대한 자축을 하고… 우리는 회장님 입에서 보너스라는 말만 기다렸고, 실제로 보너스를 꽤나 받았다. 2008년까지만 해도 그랬다.
But… 2009년 시황이 안 좋아지며 1,392억원 영업손실, 2010년 시황이 조금 좋아지자 37척의 선박을 발주. 이를 마지막으로 2011년, 2012년 내리 적자를 기록하며 회사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끔찍해졌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지옥.
2012년 12월 STX그룹은 STX팬오션의 매각의사를 밝혔다.
2013년 1월~3월 비공개매각, 공개매각에 모두 실패하였다.
2013년 6월초 주채권은행인 KDB가 인수불가 입장을 밝혔고, STX팬오션은 회생절차를 신청했다.
2013년 6월17일 개시결정 통보 받았다.
2013년 7월 KDB는 회사가 정상화되면 팬오션 인수를 검토할 수 있다고 하여, 직원에게 희망고문을 했다.
2013년 8월 법원에 1차보고서를 접수했다. 다행히 회사를 살리는게 좋다라는 결론이다.
법정관리 회사를 다니는 불편함과 괴로움
뭐 다 지나간 이야기고, 많이 경험하고 배웠으니 나의 첫 번째 직장으로 여기가 정말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다. 하지만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니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더라. 법정관리 회사 3개월 다니는 동안 내가 느낀 건 이러하다.
1. 동료들이 매일매일 나간다.
2013년 1월에서 8월까지 퇴사자는 100명에 육박한다. 자세히 보면 대리/주임이 50%, 과장이 25% 수준으로, 퇴사 인력 중 대부분이 회사의 핵심 인력이다. 육상 직원이 대략 500명 수준이니 20% 정도가 이미 이탈했고, 추가로 50~100명 정도는 자연이탈자가 생길거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어떤 팀은 팀장 빼고 팀원이 다 나가고, 어떤 팀은 팀장이 나가고 팀원만 남는 경우가 생긴다. 아직까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나에게 가장 신기한 것은 업무능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는 직원인데도 굉장히 좋은 곳으로 이직을 잘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다들 그렇게 이직을 잘하는 걸 보면, 나의 능력이 떨어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2. 일이 없다.
법정관리가 시작되면, 영업을 할 수가 없다. 법정관리 회사와 비즈니스를 하려는 회사가 없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모른다. 상당수의 직원은 아침에 와서 모든 웹사이트의 뉴스를 모두 섭렵하고도 시간이 남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특히, 바쁠 때에는 매일 12시~2시까지 야근을 하던 팀조차 일이 없어서 하루종일 회사에서 인터넷만 하다가 퇴근한다. 물론 기획, 재무/회계 부문은 법정관리 뒷처리로 최고의 업무 강도를 경험하게 되지만.
3. 주위의 과도한 관심
동료들이 빠져나가는 것도 기분 나쁘지만, 주위 사람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쁘다. 평소 팬오션이 굉장히 좋은 회사라며 칭찬하던 친구가 하루는 전화를 해서는, 당장 이직하라고, 이렇게 회사가 어려운 줄 몰랐다며 나에게 말했다. 정말 그 기분이란…. 기쁨과 슬픔은 나누면 좋다고 하지만,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 법정관리직원에게는 좋은 이직 정보만 주자.
4. 회사가 청춘사업까지 막는다.
소개팅 주선시 소개팅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력이고, 그 다음은 외모와 성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개팅녀가 법정관리회사 직원을 만날 의향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여자는 이를 거절한다. 미혼의 남자는 결혼하기 더욱 어려워진다. 누가 망해가는 회사 다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겠는가. 슬프지만 현실이다.
5. 우리사주의 빚
지금까지는 일반적인 법정관리 회사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사주 문제는 STX팬오션에 국한된 내용이다. 2007년 STX팬오션은 상장을 하면서 회사에서는 직원에게 우리사주를 주었고, 직원들은 모두 우리사주를 받았다. 17,500원에 주식을 받은 직원들은 (병합 후 가정), 2007년 말 50,000원이 넘어가자 환호성을 질렀지만, 지금은 2,500원 수준으로 폭락하면서 빚쟁이가 되었다. 직원들은 모두 5천만원에서 1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퇴사하려면 빚을 모두 갚아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퇴사하지도 못한다. 그러고 보니 노예계약이네…
구조조정을 기다리며
해운회사에서 매출액 대비 인건비는 1%도 채 되지 않지만, 법정관리에서는 채권자, 주주, 임직원 모두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조조정은 필수라고 한단다. 따라서 법정관리회사를 다니는 직원이라면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다. 지금도 많은 직원들이 퇴사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축소된 사업규모에 비해 직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마도 법원, 채권자들이…) 구조조정이 조만간 실시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구조조정 하려면 빨리 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데, 우리나라 같이 노동유연성이 떨어지는 곳에서는 구조조정을 빨리 하는게 불가능한가보다. 나는 짬이 얼마안 되니까 구조조정 대상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구조조정을 오래 끌어봤자 회사 분위기만 안 좋아지고 좋을건 하나도 없다. 보통 구조조정하면 50% 이상 축소한다고 하는데, 팬오션도 최소 100명은 조정하지 않을까. 이 글을 참조하시길.
아… 그나마 다행인 건 해운회사라서 건설회사처럼 미분양아파트를 받지는 않았다는 점. 한척에 몇 백억하는 미분양(…) 배를 주지는 않더라. 결론? 법정관리 경험은 군대와 같다. 무조건 피해야 하며, 두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