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달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한 번 눈으로 보는 것이 무엇보다 정확하다는 옛 어른들의 믿음이 반영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과연 믿을만한 것일까?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을 보면 조금 다른 사실을 알 수 있다.
쇼윈도에 한 남자가 서 있다. 흔한 체크무늬 셔츠와 평범한 청바지를 입었다. 이 남자의 인상을 묻자 사람들은 “공장에 다닌다”거나 “음식점을 운영한다”는 등 일반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뒤, 쇼윈도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깔끔하게 잘 갖춰진 정장을 입었다. 사람들은 이 남자를 보고 “억대 연봉 변호사”나 “젊은 사업가”라며 극찬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두 사람은 동일인물이었고, 달라진 것은 복장뿐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영 다른 평가를 하고 만 것이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이 실험에 대해 “껍데기에 대한 영향으로 차별적인 행동”을 보인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우리가 빈번하게 경험하면서도 잘 깨닫지 못하는 사회적 착각”이라고 평가했다.
생각보다 우리의 눈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눈은 카메라의 앵글처럼 피사체를 무미건조하게 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각자의 입장을 바탕으로 무언가 바라보기 마련이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일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확증 편향이 사회적인 편견으로 이어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한겨레는 모 의료재단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탈락에 관해 보도했다. 면접에서 가장 높은 득점 순위를 받고도 후순위 지원자가 합격처리 된 것이다. 이에 관계자는 “원래 합격자는 여성이었으며, 잦은 해외 출장에 부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불합격을 통지했다고 한다. 장거리 출장이 여성에겐 ‘힘든’ 일이라고 판단한 기업의 눈은 이렇게나 잘못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발행된 한국의 청년 채용 시작 보고서는 좀 더 끔찍한 사실을 다룬다. 국내 매출액 상위기업들에 채용된 합격자들의 스펙을 조사한 결과 ‘학벌’이 가장 중시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해당 조사를 진행한 채창균 선임연구위원은 “상위 10개 대학 졸업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게 나온” 반면 “지방 사립대의 경우 선호도가 매우 낮아 서류 전형 통과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밝혔다.
보는 대로 믿은 결과: 그래서 잘 지내고 있나요?
한국은행은 2017 경제 성장 전망치를 2.5%로 변경했다. 연초 발표한 수치보다 하향 조정한 숫자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지 신문에서 성장과 호황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미 폭발적인 국가 성장의 시간이 지나서일까? 이런 단순함으로는 이미 그런 시기를 극복한 선진국들의 최근 성장을 설명할 수 없다.
선진국들은 채용에 대한 관점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력서에 이름 없애기” 만 해도 그렇다. 실제로 이름과 고용은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같은 내용의 이력서에 각각 백인과 흑인들이 주로 쓰는 이름을 적어 5,000장의 지원서를 뿌린 미국 국가경제연구소(NBER)의 실험을 보면 좀 더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실험 결과 백인 이름은 10% 내외의 합격 통보를 받은 반면 흑인 이름이 합격 통보를 받은 비율은 6.6%에 불과했다.
위와 같은 사례처럼 해외에서는 이력서에서 이름을 없애는 방법을 통해 성별 및 인종에서 발생하는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능력만으로 채용하고 있는 사례가 많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발된 인재들은 국가 성장에 활발하게 기여하고 있다.
사회적 낭비, 이제 ‘블라인드 채용’으로 보완하자
이미 기존의 산업은 정체기를 맞이한 지 오래다. 한정된 성장이 예견된 상황에서는 사회적 낭비를 막고 실력 중심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갈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기업들은 학력이나 스펙과 같이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인재가 없다고 말하지만 정작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인재들은 구직난에 허덕인다.
그 와중에 기업들이 ‘자신들의 눈’으로 뽑은 신입사원의 절반 이상은 1년여 만에 그만두는 실정이다.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1년도 못 가 그만두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성에 맞지 않는 직무’ 때문이라는 응답이 22.5%로 가장 높았고, 이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해서’라는 응답도 19.2%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구직-채용단계에서 구직자나 회사 모두 ‘미스매치’된 결과 때문이 아닐까?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했듯 인간의 지성이란 어떤 의견을 채택한 이후에는 모든 이야기를 끌어들여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마련이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설령 정반대를 가르치는 중요한 증거가 더 있다 해도 무시해버리거나 간과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공무원 및 공공기관 채용에 학력, 출신지, 신체조건 등을 적지 못하게 하는 ‘블라인드 채용’이 정책적으로 전면 도입되는 것은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간 차별적 요소로 작용해 왔던 출신학교와 학력 대신 직무능력 등 실력을 바탕으로 공정한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취지의 블라인드 채용은 청년들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동시에, 궁극적으로 조직의 경쟁력에 도움 되는 일이다.
실제 사기업들도 학력이나 영어점수와 같은 스펙을 보지 않고 채용하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 예컨대 국내 한 그룹은 ‘스펙(SPEC) 태클 채용’을 진행했는데,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숫자 대신에 ‘시스템 장애 상황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라’는 것과 같은 실무 위주의 과제를 출제했고, 그 결과 기업에 정말 필요한 맞춤형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침몰 위기의 배에서 가장 불필요한 것을 맨 먼저 밖으로 버리듯, 이제 우리의 눈에서 비롯된 잘못된 믿음을 버릴 때가 왔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버리지 않는다면 4차산업혁명과 같은 대격변에서 생존하기 힘들다.
이번에 전면적으로 도입되는 블라인드 채용을 시작으로 배경과 연줄이 작용하지 않는 공정한 채용이 진행되는 동시에, 정말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당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