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하반기부터 공공 부분의 블라인드 채용제도가 도입되었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라는 도덕적 선의를 앞세워 이력서에 사진, 학력, 출신지, 스펙과 같은 차별을 만들 수 있는 요인을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블라인드 채용이 가진 핵심 사항이다.
한국 사회에서 긴 시간 동안 객관적인 인사평가를 방해하는 요소가 외모, 학연, 지연이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불편한 진실’에 변화를 주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정책이다. 특히 언론이 ‘학벌주의 타파’에 프레임을 맞추어 제도 전반에 관한 보도를 하는 것을 보면 대중이 ‘대학교 서열화’를 가장 불편해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학벌은 보통 서열화를 기초로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왜 ‘학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는가
한국 사회가 오래전부터 민감하게 느꼈던 만성적인 학벌주의를 지금까지 타파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는 학벌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를 게이트키핑(gate keeping) 이론과 관련을 지어 설명한다.
독일의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만든 게이트키핑 이론은 어떤 식품이 생산지를 출발해서 한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요인을 고찰한 연구에서 탄생했다. 연구의 결론은 이렇다. 식품을 이동하게 하는 유통의 원동력은 식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품을 구매하는 가정주부에 있다. 즉 가정주부는 가족 구성원들의 식성을 변화시켜 장기적인 유통 성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다.
강준만 교수는 레빈의 논리를 한국 사회 전체에 적용했다. 언론은 가정주부에 해당한다. 언론은 대체로 학벌 경쟁을 사실상 긍정하거나 불가피하다고 보는 프레임을 고수하고 변화의 동력을 누그러뜨리는 사회적 분위기를 유도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시야를 오랫동안 흐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강 교수는 행정가들도 알게 모르게 기존 학벌주의를 고수하는 방향으로 교육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한다. 강 교수의 분석이 과격하게 느껴지지만 통계를 보면 이상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14년 11월 기준으로 한국의 25개 신문 방송 통신사의 편집∙보도국장 및 정치∙경제∙사회부장급 이상 간부 가운데 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출신은 78명으로 전체의 74.9%를 차지한다. 심지어 2016년 3월 방송기자연합회가 발표한 자료에서도 결과는 유사하다. 취재기자 1,011명을 대상으로 출신 대학을 조사한 결과 SKY 출신이 절반을 상회하는 비율(60.1%)을 보인다. 언론기관이 게이트키핑 기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의 결속을 다지는 처사가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수치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특정 기관의 의도적 조정행위보다 한국인들의 내면을 강하게 파고든 문턱 증후군이 우리 사회가 학벌주의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도록 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특정 문턱만 들어서면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문턱 증후군은 계급 사회에 만연했던 수직 문화를 완전하게 제거하지 못해서 생긴 부작용이다. 보이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다.
명문대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사람, 그리고 의사나 검사와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향한 경외심이 한국 사회에서 유달리 심한 편이다. 최근에는 권위를 향한 동경이 문턱을 넘은 사람들에 대한 반감으로 바뀐 것 같다. 특정 직업이나 신분, 직위를 겨냥한 불신이 매우 크다. 때로는 공정성과 정의를 표방하여 강력한 규제 성격을 띠는 정책을 도입할 수 있도록 정부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런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배치표 트라우마를 던져버릴 때가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비교를 당연시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시험을 보든 성적표에는 석차 혹은 백분율이 표기되어 있다. 즐겨가는 음원 사이트에서도 인기 있는 노래의 선호도 변화를 실시간으로 반영한 순위표를 볼 수 있다. 극장 데이트를 위해 현재 상영 중인 영화를 검색할 때도 예매 순위를 확인한다.
우리는 이미 어떤 분야의 대상들을 특정 기준에 따라 서열화하는 것, 그리고 서열에 따라 선택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 익숙하다. 한정된 재화와 제한된 시간을 가진 상황에서 기회비용을 줄이면서 최대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행동이다. 오히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현대인이라고 비난받을지 모른다.
매해 재계 순위도 나온다. 매출 순위 혹은 보유 자산을 기준으로 매겨진 일련의 순위가 항상 발표된다. 직장인 대부분은 그 서열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직장인이 겪는 어려움은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공감이 직장인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출 순위가 1등인 삼성**에 취업하지 못했으니 거기에 입사한 A군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하다.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기업에서 일하더라도 좋은 동료와 상사를 만나 자신의 업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고, 성과에 따라 승진이나 임금 상승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점들을 종합하여 나타낸 서열 자료는 없다. 측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학교 서열화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면 된다. 수년 동안의 입학생 성적 결과를 비교하고 종합하여 만든 ‘대학교 배치표’가 줬던 공포와 좌절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대학교 서열화에 민감해할 필요가 없다. 대학교가 인생을 결정해주지 않는다. 유사한 교육환경과 커리큘럼에서 공부한 같은 학교의 동일 학과 대학생들도 다양한 인생을 산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기회 혹은 불운이 각자의 인생 방향을 다르게 한다. 인생의 승부가 고작 대학교가 가진 이름 빨(?)이나 명예로 결정이 나지 않는다.
때로는 감성적 편향이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킨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 ‘학벌주의’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자신이 겪었던 경험과 특정 기관이 도출한 통계자료를 근거 삼아 호소한다. 개별적인 사례를 모두 언급하기는 불가능하므로 통계수치가 가릴 수 있는 맹점을 말하고자 한다.
2014년, 대학교육연구소는 현안보고를 통해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학벌을 중요시한다고 주장했다. 법조계를 비롯한 여러 계열에서 산출한 통계 수치를 근거로 들었다.
통계는 잘못 활용하면 사실 왜곡을 위한 수단이 된다. 학벌은 대학교 입학시험 점수를 서열화하여 배치한 순서에 근원을 둔다. ‘획득한 점수’를 ‘학습능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두 대상이 서로 비례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을 할 것이다. 특정 시험에 합격할 확률도 학습능력에 상응한다. 즉 학습능력이 비교적 우수한 사람이 모인 집단에서 합격자가 많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율을 산정한 표본수도 고려해야 한다. 합격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수험 생활과 혹독한 노력이 요구되기에 상대적으로 학업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시험에 응시할 가능성이 높다. 숨김없이 과격하게 말하면, 서울대학교 재학생이 사법 시험에 많이 응시하기 때문에 합격자 수도 많은 것이다. 임용이나 임명으로 선발되는 직위에서의 특정 대학교 출신 비율도 합격자 비율에 따라 상승할 수밖에 없다. 다소 빈틈이 있지만 가능성은 높은 추론이다.
표면에 드러난 수치만 보고 무작정 ‘학벌주의 만연’이라고 외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출신 대학교에 따라 차등적으로 시험 응시기회를 부여한다면 문제가 크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자유의지에 따라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특정 상위 대학교 졸업생을 위주로 선발인원을 계획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공정하지 못한 것인데 이 점은 해당하는 계열의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이다. ‘학벌 중용’ 정황이 의심되는 것은 사실이나 확인할 방법이 없다.
‘블라인드 채용’이 아닌 ‘다 보이는 채용’을 해야 한다
블라인드 채용은 ‘눈 가리고(Blind) 아웅’하는 제도를 의미하는가? 문제점을 제대로 잘못 파악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괜히 ‘일정 수준 이상의 성실함’을 인정받은 ‘SKY’를 비롯한 상위 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이중적 피해만 안길 수 있다.
‘이렇게 강제로 평행선에 놓일 운명이었다면 난 고등학교 시절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는가?’
‘대학교 동기들이 가진 학습 능력이 제법 높아 학점 따기가 상대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내 장점은 대학교 이름 빨(?)밖에 없는데… 그것을 지워버리네’
상대적 박탈감과 역차별을 걱정하는 그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숭고한 노력의 결과물을 강제로 빼앗는 것이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가? 진정한 문제는 ‘대학교 서열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채용 및 인사 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에 있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채용과 인사 과정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정의 구현을 위한 해답이다.
모든 전형을 객관화하여 점수로 만들어야 하고 결과를 지원자들 혹은 후보자들에게 공개해야 한다. 자기소개서가 어떻게 평가되었는지, 다른 지원자에 비해 부족했던 점이 무엇이었는지, 각 전형별 점수가 어떠했는지 공개하면 괜한 의혹을 사지 않는다. 투명한 인사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블라인드 채용제도만 운영하는 것은 답답함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애먼 사람들의 열정만 저하시키는 행정이 될 것이다.
채용을 투명화하는 작업에는 많은 인력과 부가적인 비용이 필요하다는 기업과 정부 기관의 핑계는 내가 2011년에 취업준비를 할 때도 있었다. 문 대통령의 정책 1순위는 일자리 늘리기라고 한다. 인사 과정의 투명화를 위해 채용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 숫자를 늘려 대통령에게도 잘 보이고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어떠한가? 제도가 뒷받침된다면 추가 채용에 상승하는 세금 감면도 받고 말이다.
지난 7월, 고교 서열화 폐지 정책의 일환으로 외고, 국제고, 자사고 등을 없애는 것이 공론화되었다. 특정 분야에 재능이 있거나 관심이 많은 학생을 전문가로 양성하기 위한 의도로 설립되었던 특수목적 고등학교(이하 특목고)는 20년 만에 존폐를 논하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은 특목고의 위기는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원래의 목적이 변질되어 명문대학교를 진학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특목고의 폐지를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대부분이 노동 시장에서의 학벌 중시 현상을 인정하고 ‘대학교 서열화’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할 사항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대학교 서열화’를 제도로 없앨 수 없다. 서열화는 본능적인 감성이다. 어떤 집단이라도 특정 기준에 근거한 ‘관심 사항 순위 매기기’는 항상 존재한다. 한편, 상대적으로 우수한 순위를 가진 대상을 선택하려는 욕구는 합리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대학교 서열화’를 무작정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다. 바꿔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다. 어떤 사람이 내가 입학한 대학교보다 순위가 높은 대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에서 느껴야 할 것은 ‘나보다 잘했구나!’가 아니라 ‘저 사람이 열심히 했구나!’이다. 비교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열세 상황을 비관하거나 타인의 노력을 가치 폄하하는 것은 참 비생산적인 행동이다. 타인이 거둔 성과를 인정하고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을 반성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다.
사람들이 ‘대학교 서열화’를 쿨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 보여주는 투명한 채용 및 인사 제도가 확립되어 ‘공정함에 대한 믿음’이 보장되어야만 가능하다. 블라인드 채용제도가 과연 투명함을 확보하여 ‘공정한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엇이든 ‘가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