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과 미사일은 한마디로 말해 ‘환상의 궁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전에서 핵탄두를 2차대전 히로시마에 떨어뜨리듯이 폭격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떨어뜨리는 것은 비효율 적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전에서의 방공망은 핵폭격기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핵포탄으로 만들어서 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현존하는 야포의 최대사거리가 40킬로미터대임을 감안한다면, 이 역시도 핵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써는 불만족스러운 사거리일 것이다.
반면에 탄도탄이라 불리는 것은 개별적으로 그 파괴력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탄두중량이 아무리 커봤자 1t인 상황에서 이걸 아무리 날려봤자 전술적 효과는 미미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심리적으로 상당한 위압감을 줄수는 있겠지만, 그 가치는 1톤짜리 폭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다. 왠만한 전폭기의 무장 능력이 4,5톤을 훌쩍 넘어가는 요즘 세상에 1톤짜리 폭탄은 빛바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재래식 탄도탄의 위력과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에 있었던 ‘도시전투’라 불리는 이란과 이라크의 미사일 전쟁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이란과 이라크는 서로의 도시에 되고 스커드 미사일 변종들을 가지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양국의 수도 국민들은 패닉상태에 몰려 도시를 떠나려 했었고, 도시는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엄청난 공포병기로서의 위력을 보여주었던 그때 실제로 이들 탄도탄에 의한 피해는 여타의 다른 공격체제에 비해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탄도탄과 핵이 결합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핵이 가지고 있는 약점, 즉 투발수단의 불안정성과 탄도탄이 가지고 있는 약점 ‘한방이 부족한 점’이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이번 연재는 한반도에서 미국을 제외한 북한과 남한의 탄도탄 개발역사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남과 북이 어떤 방식으로 미사일을 얻게 되었고, 어떤식으로 미국의 압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이 두개의 국가만을 비교해 한번 풀어 보려 한다.
1960년대
1960년대를 말하자면, 한반도에 미사일이라 불리우는 탄도체를 유일무이하게 가진 미국과 그 뒤를 따라 미사일이란 것을 처음 접하게 되는 북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때까지한반도에서의 미사일이란 개념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병기라는 개념이었다. 이미 1958년 제7 보병사단을 팬토믹 사단으로 개편하면서 어네스트 존을 정식으로 편제하에 넣었고, 그 이듬해 마타도어(Martardor) 크루즈 미사일 1개 중대를 배치한 미국은 적어도 미사일에 있어선 한반도의 절대 강자였다. 문제는 어네스트 존을 제외한 마타도어(Martardor), 메이스(Mace) 미사일이란 것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한 투사무기가 아니라 북한 넘어에 있는 중국과 소련을 겨냥함으로써, 한반도 자체에 과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80년대에 도래할 미사일 개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1963년 이집트와 북한 수교…이후 북한 미사일 개발의 주요한 변수로 자리잡게 된다.
1969년~70년 이시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프로그 3, 5, 7형이 단계적으로 들어왔다. 그 동안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어네스트 존에 열세였던 상황을 만회할 수 있었다.(유도체에서는 만회했을 지언정 탄두에서는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이때 당시 어네스트 존은 핵탄두를 탑재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프로그나 어네스트 존 둘다 미사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다 무유도 로켓이란 점이다. 즉, 어떤 유도나 조종이 불가능한 상황의 커다란 로켓탄이라 보면 될 것이다.
1970년대
1970년대는 한국과 북한 미사일 개발 역사상 질풍과도 같은 시기였다. 한국은 닉슨독트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자주국방을 부르짖는 와중이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미사일 개발에 나섰고, 북한 역시 69년부터 들여오기 시작한 프로그 무유도 로켓을 분해해 역조립하면서 프로그 생산 기술을 익히고, 더 나아가 중국에 기술진을 보내 미사일 개발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뛰어다니게 된다. 여기서 80년대 90년대 북한 탄도탄 개발의 주요한 변수로 자리잡게 되는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 시기 남북은 미사일 개발에 골몰했던 것이다.
1970년 2월 18일 닉슨 독트린 발표. 한국 핵개발의 기폭제가 된 닉슨 독트린… 당시 베트남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던 미국은 결국 [탈아시아 정책]을 내놓게 된다.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발언을 듣고 한국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불과 6개월 전인 1969년 8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였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패닉상태에 빠진 한국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주한미군에 대한 철군이 없을 것이란 낙관론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다.
1970년 6월 북한 경비정에 의한 한국 선박의 납북사건이 터졌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기구로 국방과학 연구소의 창설을 검토.
1970년 7월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는 70년 6월 30일 ‘미군 철수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달성되어 우리의 전투능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하게 되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있을 수 없다’라며 당시 언론에서 흘러나온 ‘주한미군 철군’에 대한 관측기사를 전면 부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발표가 있은지 1주일 뒤인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
1970년 8월 대통령령 제 5267호로 국방과학 연구소 창설…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밀기관 설립
1971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수, 같은 시기 비무장지대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2사단도 서울 북방 휴전선 근처로 이동 배치. 이대 주한미군 제7사단의 장비 중 어네스트 존 1개 대대분이 한국군에게 이관된다. 당시 어네스트 존의 장비이관 배경은 북한의 프로그 시리즈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이유에서였으나, 미군들이 보기에도 이 어네스트 존이 너무 낡았기에(1953년에 첫 양산형이 나왔다. 전세계 유일하게 지금까지 어네스트 존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유지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고, 결국 이 어네스트 존을 우리나라에 넘기게 된다. 1979년 주한미군의 마지막 어네스트 존 대대가 철수하면서 이 장비도 한국구니 인수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은 프로그의 배치를 마치고, 이 프로그의 분해에 들어갔다. 프로그 양산을 위해 분해 역조립의 수순을 밟아 간 것이었다. 북한 탄도탄 개발 역사의 시작이었다.
1971년 12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유도탄 개발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후 다방면으로 미사일 개발 추진에 대한 기술 타전을 하게 된다. 결론은 우리나라에 지대공 미사일로 들여온 나이키 허큘리즈(아직도 국내 방공미사일로 자리잡고 있다. 진공관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 당시에도 구형이었다)의 지대지 미사일로의 변환이었다.
당시 맥도널 더글라스사(나이키의 제조사)와 타전해 18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240킬로미터로 늘리는 계약을 추진하였지만, 당시 3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는 통에 그 전에 예비가능성 검토란 걸 하자고 해서 180만 달러짜리 계약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ADD의 요원 10명이 가서 MD사의 기술을 요령껏 배워와 그 뒤의 계약을 체결하지 않게 된다. 배울건 다 배웠다는 것이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욤 키푸르 전쟁 발발) 그 동안의 1,2,3차 중동전과 달리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군을 초전에 압도하게 된다. 지대공 미사일과 보병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의 위력을 전세계에 보여준 이 전쟁기간 동안 북한은 이집트와 ‘혈맹’수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북한 공군의 파견이었다. 당시 북한은 Mig-21 1개 비행중대와 파일롯들을 파병한 것이었다. 이집트와 북한의 밀월관계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 시발점이었다.(이 시기 이후 이집트 군은 보유한 스커드B 탄도탄의 운용유지와 후속지원을 북한에게 부탁하게 된다. 당시 소련과의 외교관계가 급랭하였기에 이집트는 혈맹인 북한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1974년 1차 율곡사업(1974~1981) 시작
1974년 5월 박정희 대통령 ‘유도탄 개발에 관한 기본방침’ 재가. 당시 문제는 아무리 프랑스 기술을 들여와 추진체를 개발하고 유도탄을 개발한다 하여도, 기본적인 설비는 미국의 기술을 도입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미 국방부에서 군수물자 및 군수물자 제조용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MCB(Munition Control Board)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ADD는 미국과 협상을 하기에 이르른다. 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허가를 받는 대신에 미사일의 성능에 대한 조정에 들어갔다. 당시 ADD와 주한 미군 사령관 스틸웰과 타협을 하게 된다. 이때 나왔던 타협안이 사거리 180킬로미터(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직선거리) 탄두 1천파운드 미만 이었다. 이후 한반도 미사일은 MTCR에 가입하기 전까지 대체로 이 정도 수준에서 미사일 개발을 하게 된다.
1976년 북한 탄도탄 개술진들을 중국에 보내게 된다. 이들은 사거리 600km 탄두중량 0.5t의 DF-61 탄도탄 개발계획에 투입된다.(이들은 약 2년간의 개발 끝에 1978년 북한으로 귀국하게 된다)
1976년 12월 2일 대전기계창 준공 본격적인 유도탄 개발에 돌입. 이 날 그 동안 한국이 개발한 추진체의 성능시험을 보였는데, 이걸 보고 미국측에서 대전기계창에 CIA요원 2명을 상주시키겠다고 통보했으나, 한국측이 거부. 이 당시 기술은 프랑스에서, 추진체 설비는 미국에서 들여오게 된다. (당시 ADD의 서울본부에는 미 고문관실이 따로 있어 한국의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일일이 감시하였다)
1978년 4월 한국 유도탄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최초의 한국 유도탄 1호가 개발되게 된다. 그뒤 9월초에 제 8호기까지 완성시키게 된다. 3호부터는 시험발사에 성공하게 된다.
1978년 9월 26일 국산유도탄 박정희 대통령의 참관하에 공개 시험발사. 성공. 한국 지대지 탄도탄 백곰의 등장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1970년대의 상황은 한마디로 질풍노도의 미사일 개발 시기 였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해 촉발된 자주국방에 대한 열망으로 박정희는 한국의 유도탄 개발을 지시내렸고, 미국의 딴지 속에서도 결국 유도탄 개발 계획은 성공하게 된다. 문제는 이 유도탄 계획이 성공한 다음이었다. 박정희가 암살을 당한 다음 이 미사일은 그야말로 붕 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80년대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거래(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정받는 협상) 때문에 애써 개발해 낸 미사일 개발 인프라와 인력체계를 공중분해시킨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핵이나 미사일 모두 애초엔 한국이 먼저 개발하면서 북한을 자극하였으나,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前 대통령이 피살되고 나서 이 모든 연구개발 성과를 담보로 해서 정권을 인정받기 위한 거래가 성사되면서 80년대 대한민국의 미사일+핵 기술은 허공위로 산산히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 당시 전두환 정부가 팔아먹은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체계는 F-16라이센스 개발계획이 가계약까지 가게 되었고, 덤으로 A-7 공격기 라이센스권도 가져올수 있었는데, 이걸 팔아 넘기고, F-5…우리들의 기억속엔 제공호로 남아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경전투기 15% 녹다운 생산 방식으로 바꾸어 한국 공군력을 근 10년 넘게 후퇴시킨 점(김영삼 정부때 실행된 KFP사업의 선정기가 F-16이었다) 그리고 핵무기의 반납과 미사일 개발의 후퇴였다. 그나마 미사일의 경우는 아웅산 테러의 여파로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다 할 수 있겠다.
1980년대
1980년대는 한마디로 말해 남북한 모두 미사일의 자국생산기술 획득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애초 미사일 개발에 먼저 뛰어들었고, 그 실력 역시 우위에 있었던 한국이 전두환 정권의 정권 안보 차원에서 이 미사일 기술을 [금단의 병기]로 규정해 봉쇄한 사이 북한은 차근차근 미사일 개발에 나섰고, 여기에 이란 이라크 전이 터지면서 북한은 비약적인 탄도탄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여담이지만 이 이란 이라크전은 한국과 북한이 같이 동맹이 되어 이란을 밀게 되어 전혀 색다른 남북협력을 하게 되었던 전쟁이기도 하였다)
1980년 1월 이집트 무바라크 부통령(당시 부통령이었음 사다트가 1981년 10월에 암살된 다음 대통령으로 올라서게 됨)이 북한을 방문하게 됨. 이당시 이집트와 북한은 서로 탄도탄 미사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친밀해진 상황이었음. 이때 무바라크 부통령은 북한에게 스커드B 탄도탄 2기를 제공하겠단 약속을 하게 됨. 이 2기의 미사일이 북한 탄도탄 미사일 개발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음. 북한은 이 두발의 미사일을 분해, 역조립하는 방식으로 탄도탄 미사일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1980년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설치,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취임
1980년 8월 ADD소장이며 미사일 개발의 총지휘자였던 심문택 박사 해임, 뒤이어 30여명의 핵심 기술자와 미사일 개발의 중추였던 이경서 박사, 강인구 박사등 미사일 개발의 핵심 브레인들이 줄줄히 ADD에서 숙청당함. 숙청의 배후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었음. 5.18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미국쪽에 제시하고, 더불어 전두환의 미국방문을 성사하기 위한 정치적 대응이었음
1981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란 이라크 전쟁의 발발로 북한은 탄도탄 개발의 비약적인 발전기를 맞게 된다. 이란과 이라크가 서로간의 도시에 대해 무차별적인 미사일 전쟁을 벌이게 됨으로써, 양국은 미사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게 됩니다.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은 소련측으로부터 지원받은 스커드 미사일을 가지고, 갖가지 재주(?)를 피워 개량을 하게 된다. 탄두를 줄이고, 미사일 동체를 연장시켜 사거리를 늘린 알-후세인 이나 알-압바스 같은 자체 개량형을 생산할 정도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란의 경우는 이렇다할 미사일이 없었다. 1979년 회교혁명에 의해 축출된 팔레비 정권이 있었을때 까지만 해도 미국의 혈맹으로써 갖가지 호사스런 무기를 거리낌 없이 사올 수 있었고, 운용할 수 있었으나(대표적인 것이 F-14전투기 였다. 미국 이외의 국가에 F-14가 팔린 역사가 없다. 값도 값이지만, 미국이 어지간히 믿지 않는 경우에 이런 최신 전투기를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메이니옹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미국이 일절 지원을 막아버린 상황에서 있는 전투기들도 부속품과 후속지원 부족으로 고철이 된 상황(결국 F-14는 그 강력한 레이더를 무기로 해서 조기경보기로 쓰이곤 하였다)에서 미사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다. 그렇다고 소련측으로부터 손벌리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나서게 된 것이다.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스커드B의 개량형들을 구하게 된다. 결국 자금과 관련장비는 이란이 지원하고, 기술은 북한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서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다.
한가지 아이러니컬한 상황은 이 이란-이라크 전에서 한국측도 이란에 무기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팔레비 왕조시절 공군력은 미군장비 일색으로, 육군은 영국군 장비 일색으로 통일했던 이란은 그 장비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물론 이란-콘트라 게이트 같은 건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우방국들, 그러니까 미국의 무기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이란에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 활용되었다. 미국 역시 이란의 몰락을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창구로 이용된 나라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 이란-이라크전 당시 이란공군의 747 점보 여객기가 한국의 성남 공항으로 날아와 F-4팬텀의 부속품과 각종 군수물자를 들고 간 것이었다. 이미 1980년대 남북한은 힘을 모아(?) 이란을 지원했던 것이었다.
(이 당시 이라크의 알-후세인 미사일의 제조방법은 지극힌 간단하였는데, 온전한 형태의 스커드 B형을 3발 준비한다. 이중 한발을 해체하여 다른 두발의 동체를 연장한다. 그리고 남은 탄두와 유도부 로켓모터에 새로 만든 ‘탄체’를 조립하여 3발의 알-후세인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이 스커드 미사일 자체가 현대전의 미사일과 거리가 먼 2차대전의 유물이었기에 최신형 미사일처럼 로켓 모터가 연소를 마치면 탄두부가 본체에서 분리되어 목표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자체가 통짜로 날아가는 방식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방식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공기저항에 의해 속도는 떨어지고, 미사일이 날아가는 것이 흐트러져 명중률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런 스커드를 누더기로 분해해 용접해 다시 이은 알-후세인의 경우는 날아가다가 탄두와 탄체가 공기저항을 이기지 못해 똑 부러지는 상황이 연출되곤 하였다. 이 덕분에 걸프전 당시 스커드에 대한 요격이 어려워졌다. 날아가는 중간에 똑 부러지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알-후세인의 경우 원형공산오차가 2,000미터 정도로서, 정확한 타격을 위해서 날아오른다고 볼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나르는 전봇대 였다)
1982년 12월 ADD에 새로운 소장이 취임하게 됨. 바로 김성진 소장(육사 11기)이었음. 훗날 과학기술처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라서게 된 김성진 소장은 당시 ADD 총인원(2400여명)의 1/3이나 되는 800여명을 감원하며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가게 됨. 미국측에 한국은 미사일 개발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였음
1983년 북한-이란 탄도탄 개발과 관련한 상화지원협정 체결. 이 협정에서 북한은 기술을 이란은 자금과 관련장비 지원을 약속하게 됨
1983년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 발생. 전두환 구사일생으로 생명부지, 귀국후 북측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게 됨.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 바로 박정희 정부때 개발해 놓은 백곰미사일의 ‘실전배치’였음. 백곰 미사일의 실전형 개발 재개 명령이 내려짐. 주영복 국방장관 백곰미사일의 실전형 개발에 앞선 장관공한으로 미국측에 ‘사거리 180킬로미터, 탄두중량 1000파운드’라는 1974년 5월의 약속을 공식화 하였음
1984년 4월 23일 북한 스커드 B의 불법복제(?) 미사일 개발성공. 미사일 발사실험. 발사는 성공했으나 CEP(Circular Error Probability 원형공산오차 : 탄착 정밀도)가 형편없었다는 후문, 발사성공과 함께 개량작업에 들어감(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1t)
198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이란인 사업가가 탄도탄 유도장치에 사용되는 전자부품을 구매해 북한에게 전해주려다 발각됨
1986년 LG정밀에서 현무미사일 양산체제 구축, 현무 미사일 양산 시작 이후
1999년까지 상당수량의 현무가 배치되었다. 450~600Kg의 이중목적 고폭탄을 탄두로 장착하고 있는 현무는 100미터라는 CEP를 자랑하지만, 탄두가 재래식 탄두란 점과 발당 가격이 10억원 정도란 점에서 비효율적인 무기체계라는 일각의 평가를 들어야 했다. 유사시 북한의 비행장과 주요거점에 대한 공격을 그 임무로 하고 있다.
1986년 5월7일 북한 스커드 C의 실험발사 성공(사정거리 500Km, 탄두중량 770Kg) 이당시 북한의 스커드 C개발의 이면엔 이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라크가 개발한 알-후세인과 알-압바스에 대응하기 위해선 사거리가 연장된 스커드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었고, 알-후세인이나 알-압바스처럼 탄두 중량을 줄이고, 동체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사정거리를 늘리자는 의견이 나오게 됨.
1987년 4월 평양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 스커드 B 불법복제 탄도탄의 양산체제 구축. 이후 본격적으로 이란에 스커드 B 불법복제 미사일을 수출하게 된다.(이란은 약 90~100발의 북한제 미사일을 수입하게 된다)
1987년 10월 1일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에서 백곰미사일의 실전형인 ‘현무미사일’일반에 공개 됨
1988년 12월29일 일명 ‘도시전쟁’이라 불리우는 이란과 이라크간의 미사일 전쟁 발발 52일간 상대방 도시로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함, 공포병기로서의 스커드의 영향이 확인됨
1989년 북한 노동1호 미사일 개발에 착수. 일전에 개발된 스커드C형과 달리 노동의 개발에는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89년과 91년에 각각 발사관 내부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늘어진 사거리만큼 CEP가 커지는 부작용이 속출하였다.
1980년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남한과 북한 공히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미사일 개발에는 성공은 했으나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남한의 경우는 전두환 정부가 부족한 정통성을 미국의 승인으로 메꾸기 위해 박정희 정부가 피땀흘려 개발한 미사일 기술을 봉쇄하였다가 아웅산테러 이후 대(對)북한용 억제전력이라는 명분이라고 70년대 개발된 백곰 미사일의 양산형인 현무를 개발하게 되었으나, 이것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배치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탄두가 재래식이란 점과 가격대 효과의 비효율성 때문에 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반면 북한의 경우는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 덕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미사일 수출과 노동, 대포동으로 이어지는 미사일 바리에이션의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1980년대는 한 국가의 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만약 ADD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의 미사일 개발기술이 어디까지 올라섰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들어가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배경지식
1990년대에 들어가면 본격적인 북한 미사일의 위협이 시작되는 시기가 된다. 그 전에 한반도 미사일 전력과 MTCR 등등 일반 독자들에게는 생경한 단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듯 싶어 몇 가지 주요 개념에 대한 정리를 잠깐 하려고 한다.
1> MTCR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 미사일통제체제)은 언론을 통해서 많이 알려진 ‘국제 비확산체제’중의 하나이다. 핵무기가 NPT에 의해 규제되는 것처럼 미사일 역시 MTCR에 의해 규제 되는 것인데, 엄밀히 말해 MTCR은 NPT와는 다른 형태의 비확산체제이다. NPT가 핵물질 자체의 개발이나 보유를 금지하는 방식이라면, MTCR은 MTCR회원국, 즉 일정 수준 이상의 미사일 개발능력을 가지고 미사일을 개발한 국가들이 그렇지 않은 국가들에게 미사일과 미사일에 사용될 부품, 기술에 대해서 수출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 MTCR 회원국은 비회원국에게 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이상의 미사일 완제품이나 그 부품, 기술을 수출할 수 없다.
이것이 MTCR의 전부이다. 여기서 MTCR의 맹점이 나오는데, MTCR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에 대한 수출통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달리 말해서 북한과 같이 자체개발해서 미사일을 보유하는 것은 ‘합법적’이란 것이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과 수출을 보고 놀란 미국은 서둘러 1990년 ‘MTCR 이행법’이라는 국내법을 만들게 된다. 이법의 내용은 아주 간단한데,
– MTCR 비회원국간에 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이상의 미사일 또는 부품을 수출입할 경우 미국이 쌍방 해당국가에 대해 일방적 무역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다
라는 내용이다. 엄밀히 말해 이법은 미국의 일방주의 법이라 할 수 있다. 주권을 가진 다른국가들끼리의 미사일 수출입을 제3자인 미국인 간섭해 이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한다는 자체가 NPT와 같은 불평등적인 요소가 강한 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문제는 이런 불평등적인 미국 내의 ‘국내법’도 북한을 막을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이 법의 내용이 MTCR비회원국간의 미사일 거래에 대해서만 제재를 한다는 것이다. 즉, 북한이 수출용이 아니라 국내용(?)이라며 대포동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해도 미국으로선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법을 위반하였다 해도, 미국으로선 그저 미사일을 수출한 국가나 수입한 국가에 대해서 수출입 제한을 한다 하지만, 그 수출입 제한 품목이 미국의 군수품에 한정되어 있기에 북한과 같은 국가나, 북한에서 미사일을 수입하였던 시리아나 이란같은 나라에게는 별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로 1990년 이 법이 발효된 이례로 MTCR 이행법을 어긴 14건의 사건중 9건이 북한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북한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재가 없었다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군수품을 수입하는 나라도 아니기에 그저 MTCR이행법을 어긴 불량국가라는 상징적인 의미만을 부여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의 경우는 2001년 이 MTCR에 가입하게 된다.(MTCR의 경우는 가입하게 되면 그 혜택이 의무보다 많다. 문제는 그 가입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일단은 엄격한 심사를 거쳐 MTCR회원국 전원의 만장일치에 의해서만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 스커드 (Scud)
현존하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의 실제적인 뿌리가 되는 스커드 미사일…지난 1차 걸프전 당시 패트리어트와 스커드의 대결을 보면서 일반에 알려진 이 스커드 미사일의 뿌리는 2차대전 독일이 만든 V-2(A-4)로켓이었다.
스커드 뿐만 아니라 2차대전 전후 서방과 동구권에서 개발된 모든 미사일의 뿌리는 바로 이 V-2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미국의 경우는 페이퍼 클립 작전(나치 전범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간 작전)을 통해서 V-2의 아버지인 폰 노이먼을 확보했다는 점이었고, 소련의 경우는 V-2 로켓 자체를 복사하면서 기술을 축적하였다는 점이다.
소련은 이 V-2로켓을 완벽하게 복사한 R-1을 만들어 낸다, 그 뒤 이 R-1을 개량한 R-2, R-11을 개발하게 되는데, 이 R-11의 NATO 코드네임이 스커드 A(Scud : 소나기)이다. 이 스커드 미사일은 독일의 V-2 미사일과 놀랍도록 유사한데 차이점이라면, V-2가 주입하는 즉시 휘발되어 사라지는 액체산소를 연료로 사용한 반면에 스커드에는 불활성 적연소산을 사용했다는 정도이다. 연료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복사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R-11(스커드A) 까지는 독일의 V-2로켓을 복사한 수준이었다면, 1960년대 개발한 R-17E(스커드B)는 V-2로켓의 확대발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커드의 기술수준은 ‘조잡’ 한 수준이었다.
유도장치는 관성유도방식으로 미사일에 장착된 가속도계가 검출한 가속도를 시간으로 적분하여 속도, 이동거리를 얻어 3차원 공간을 목표의 좌표와 자신의 위치에서 코스를 계산하여 비행하는 방식이었고, 동체는 철판을 용접하거나, 리벳으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결정적으로 미사일의 탄두부와 탄체부가 통짜로 붙어있는 방식이었기에 정점에 올라선 뒤 그대로 내려 꽂히게 되는 방식이었다. 이 덕분에 미사일은 공기저항을 받아 속도는 저하되고, 명중률은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라크나 북한의 사정거리 연장방식…즉 동체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제작한 ‘불법복제형식’의 스커드는 낙하도중 공기저항으로 미사일이 부러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전봇대가 되었던 것이다.
최근의 미사일은 거의 대부분(사거리가 짧은 단거리 미사일을 제외하고)은 정점고도에서 탄체부와 탄두부가 분리되어 탄두가 꽂히는 방식이었기에 공기저항을 상대적으로 덜받고, 속도의 저하도 막을수 있는 형태로 발전된 걸 보면, 스커드의 기술수준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스커드 미사일 자체의 기술 수준은 상당히 떨어진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미사일이 가지는 심리병기로서의 역할은 이미 지난 2차대전과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충분히 보여주었고, 여기에 재래식 탄두가 아닌 생화학무기나 핵무기가 장착되었을때의 위력은…전혀 별개의 위협으로 자리잡게 된다.
3> 노동과 대포동
언론에서 심심찮게 말하고 있는 노동 미사일과 대포동 미사일에 대해 일각의 오해가 있는데, 노동이 노동(勞動 : 일하다)이란 의미로 쓰인 것이다란 것인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대로 이 노동은 일하는 노동(勞動)이 아니라 북한의 동해안에 위치한 함경북도 김책시 부근의 노동리…즉, 노동(蘆洞)이란 동네의 이름이다. 이 동네에 미사일 실험장이 있고, 미국이 첩보위성을 통해 이곳에서 최초로 스커드C형의 개량형이 발견되었기에 미국이 이 미사일의 코드네임을 노동1호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걸 제인연감에서 노동(勞動)으로 오해하여, LABOUR 1이라고 명기하면서 노동(勞動)이라는 오해가 확산되게 된 것이다. 어차피 미국이 일방적으로 붙힌 코드네임이기에 이런 오기나 착각은 우리들만의 사정이지만 말이다. (북측에선 스커드 미사일의 개량형에 대해서 화성火星 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포동은 노동 바로 옆의 동네이다. 함경북도 무수단리 대포동…이 지역에서 최초로 1998년 8월 31일 대포동1호가 발사되면서 대포동의 지명을 따 대포동 1호란 코드네임을 부여받게 된다.
1990년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북한은 본격적인 미사일 수출길에 접어들게 된다. 더불어 노동과 대포동 미사일의 등장으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를 넘어서 일본과 미국을 위협할 정도로 급부상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미사일 발사 능력이 북한 핵개발과 같은 시기에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1993년~4년 북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의 클린턴 행정부는
– 북한이 최소 1발에서 3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핵무기는 그 투발수단(미사일)의 미확보로 한반도 안에서의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북한의 핵무기가 대규모 양산체제로 진입해 이 핵무기를 미사일처럼 중동의 불량국가들에게 판매되는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의 미사일 개발 능력이란 것이 스커드C형이나 노동1호의 최대수준이 사정거리 1천킬로미터 탄두중량 500Kg 정도로 보고 있었기에 미국에게는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클린턴은 북한의 과거의 핵을 용인하는 수준에서 현재의 핵과 미래의 핵, 즉 핵의 대량생산체제를 막는 방향으로 북핵문제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1998년 8월31일 대포동 미사일의 발사성공으로 이런 외교정책은 180도로 달라지게 된다. 북한의 핵이 미국에 실질적인 안보에 위협을 끼치게 되는 것이었다. 1990년대는 북한핵과 더불어 북한 미사일이 국제사회와 미국 외교에 화두로 등장한 시기였다.
1990년 5월 북한 노동1호 발사실험…실패. 노동미사일은 기존의 스커드 B탄도탄의 추진기관을 확대하고, 탄두 중량을 500Kg으로 줄여 사정거리 1천킬로미터를 확보한다는 개념으로 만들어 졌다.
1990년 8월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과의 양해사항이던 미사일 제한조건을 외교문서화 해서 미국측에 건네게 된다.
1991년 1월 걸프전 반발,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과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일전이 있었음. 이 당시 레이시온사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전세계에 탄도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이 당시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100% 명중률은 ‘조작된 환상’이었이 종전후 드러나게 된다. 당시 슈워츠코프 장군은 33발의 스커드를 전부 격추되었다고 자랑했으나, 개전 후 처음으로 날아온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하는데에만 패트리어트 시스템은 33번의 오작동을 보였다. 이들은 PAC-1과 PAC-2가 산탄총 형식으로 탄두가 터져나가 그 파편이 비산하여 탄도탄을 요격하는 시스템이라 완전하게 탄두를 요격할 수 없다고 변명하였으나(실제로 PAC-3형에서 부턴 탄두가 통짜이다) MIT의 종신교수인 시어도어 포스톨 교수가 걸프전 당시의 스커드 미사일 요격장면들을 비디오 판독으로 분석해 본 결과 단 1발의 스커드 미사일도 요격하지 못했음을 확인하고, 관련 자료를 들고 미 국방부를 압박하게 되었다. 결국 그 당시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환상적인 스커드 요격 기록은 급파된 레이시온社의 기술진들이 조작하였던 것이 드러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잠시 첨언하자면, 미군이 한반도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면 북한의 스커드와 노동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다고 말하며 걸프전 종전 이후 패트리어트 미사일 구매를 종용한 부분인데, 한반도에서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만약 북한과의 전쟁이 터졌을 경우 서울에서 100Km 떨어진 북한의 신계 미사일 기지에서 서울로 향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치자, 단순계산으로 신계에서 발사된 스커드 미사일이 서울에 날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3분40초이다. 이 3분 40초 동안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장 미사일이라는 것은 최고 고도까지 올라간 후에야 미사일의 탄착지점을 알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스커드 미사일이 발사 상승고도인 35킬로미터까지 날아간 뒤에야 미사일을 추적해 요격태세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스커드가 최고고도 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90초이므로, 패트리어트는 2분 10초 안에 스커드를 요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패트리어트 시스템은 패트리어트 미사일 자체만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일단 미사일이 발사 되었을때, 목표로 하는 미사일의 발사화염을 우주에 있는 미국의 DSP위성이 탐지, 이걸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는 미 우주군 사령부에 통보하게 된다. 이걸 처리에 미 우주군 사령부가 패트리어트 미사일 전개부대에 정보를 보내고, 이 정보를 가지고 미사일 요격에 나서는 시스템이다. 이론적으로 이 과정을 진행하는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이 5분이다.
이 말은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의 위협 앞에서 서울을 방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더 떨어진 지역은 어떨까? 부산을 겨냥한 미사일이 날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6분55초이다. 결론은 패트리어트 시스템으로 방어가 가능한 지역은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부산이나 제주도 정도가 다일 것이다.
(현재 국내에서 도입하려고 하는 SAM-X사업의 후보기종인 패트리어트는 대공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리즈의 전력대체로 거론되는 것이다. 이거 이미 도입됐다. 이때에는 아직 도입 전이었다)
1991년 5월 이란, 북한제 스커드 C 미사일을 실전배치하게 됨. 90년대 들어 동구권의 붕괴로 대외적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된 북한은 수출 상품의 판로 자체가 미국의 경제제재에 의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미사일 수출에 사활을 걸었다. 연평균 외화 수입액이 10억달러 내외인 북한으로서는 연평균 1억달러 이상의 수입을 보장해 주는 미사일 수출에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동구권의 붕괴와 미국의 경제제재 앞에서 북한은 미사일 수출로 겨우 연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90년대 북한이 미사일 수출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90년대 북한 미사일의 수입국을 잠시 살펴보면, 이란과 시리아, 파키스탄, 예맨, 이집트 정도인데, 이들중 북한 최대의 고객은 이란과 시리아였다. 이란은 1990년대에만 공식적으로 2회에 걸쳐 북한 미사일을 구매하였고, 2000년대 들어와서도 2회나 구입하며 북한미사일의 단골 구매고객으로 분류되었고, 파키스탄 역시 2회에 걸쳐 북한 미사일을 구입하였다.
1992년 6월 노동1호의 시험발사…실패
1993년 3월12일 북한 NPT 탈퇴선언. 한반도 북핵위기의 본격적인 시동
1993년 5월 29일 북한 노동1호의 시험발사…성공!! 북핵위기가 한참 고조되던 이 시기에 노동1호 미사일의 발사로 일본과 일본 내의 주일미군 기지가 북한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대외에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됨. 북한 미사일이 더 이상 한반도 내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안보에 위협을 끼치는 중차대한 위협이라는 것이 공식화 되었음. 이후 북한은 노동1호의 로켓부스터를 알루미늄합금으로 대체해 약 1t의 중량경감시키고, 탄두중량을 700Kg으로 늘이고 사정거리를 300Km 증가시킨 노동 2호 개발에 착수, 개발에 성공하게 된다.
1995년 북한 동해안의 용덕산과 문천에 탄도탄 기지를 건설함
1995년 7월 공노명 외문장관과 레이니 주한미국 대사 사이에 한,미 비확산 실무 협의체에서 향후 한국이 개발하는 탄도탄은 사정거리 300킬로미터에 탄두 500Kg을 넘지않는다는 제한조건 완화(?)와 추후 한국의 MTCR가입을 협조하는 대신, 한국 정부는 탄도탄 수출을 금지한다는 한미간 협의가 이루어짐. 결국 이 협의는 2001년 3월 26일 양국간 양해각서가 체결되면서 극적으로 마무리 된다. 이 양해각서 체결 직후 한국은 현무2 탄도탄 개발에 들어갔으나, 이미 한국은 탄도탄 미사일이 아닌 순항미사일 개발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순항미사일이란 걸프전때 미군이 사용한 토마호크 미사일이나, 하푼 미사일을 생각하시면 되는데, 탄도탄과는 달리 아음속 대에서 정밀타격을 목적으로 하는 미사일이다)
1996년 11월 북미 미사일 회담
1997년 노동1호 실전배치
1998년 8월 미국은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실험이 있을것이란 징후를 포착하고, RC-135S 정찰기와 오브저네이션 아일랜드 탄도탄 추적 전용 함정, 레이더 추적함인 인빈시블과 첩보위성들을 동원해 대포동 1호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준비태세에 들어가게 된다.
1998년 8월 31일 함경북도 무수단리 대포동에서 대포동1호라 명명되는 탄도탄이 발사되게 됨 이 미사일은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을 향해 발사되었다. 미사일은 약 1,600킬로미터를 날아올라 최종 단계인 제3단계까지 분리 되었으나, 대기권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당시 미사일 잔해의 일부가 알래스카 앞바다까지 날아감으로 해서 미국과 일본이 경악하게 된다.
이 당시 북한은 이 대포동1호가 광명성1호라는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한 발사체라고 말했으나, 지구궤도 상에서 광명성 1호가 발사하고 있다는 전파는 잡히지 않았으며, 광명성 1호가 지구궤도 상에서 발견되지 않았기에 실패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허나 북한은 광명성 1호의 발사성공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며 대대적인 선전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대포동 1호에 광명성1호가 실렸는지, 안실렸는지는 부차적인 문제였고, 북한이 알래스카까지 날아왔다는 점. 조잡하지만 대륙간 탄도탄의 원형을 갖췄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미 1996년 11월부터 미사일 회담에 들어갔던 미국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제네바 합의때 과거의 핵에 대해서 외면했던 이유가 북한의 핵투발 수단 미비 때문이었는데, 이제 북한의 미사일 수준을 알게 된 이상 서둘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당시 클린턴은 미사일 문제만 해결되면, 미-북한 수교를 단행하겠다며 북한을 설득하게 된다. 클린턴 행정부 이전 공화당 행정부는 대북한 수교의 조건으로 남북대화진전, 미군 유해 송환, 대미 비방 중지, 무기 수출 중지를 포함한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 테러지원 포기 보장, 인권개선 등 6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클린턴은 이 모든 조건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미사일 문제를 해결해야 겠다며 2000년 10월에는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북한을 직접 방문하게 된다.
(여담이지만, 북한은 이때 미국과 수교를 맺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였는데,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북한은 미국측에게 최대한 많은 걸 얻어낸 후에 수교를 맺으려 하였지만, 부시행정부의 등장으로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미국과의 수교를 북한 외교사 50년 지상과제로 알고 있었던 북한으로선 이때를 북한 외교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으로 꼽고 있다. 만약, 미국과 수교를 맺게 되어 테러지원국이나, 불량국가의 타이틀을 떼게되고, 미국과의 교역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북한은 세계에서 고립되어 홀로 살아가는 상황을 타파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지금 북한의 역사는 상당부분 바뀌었을 것이다)
총평
북한의 미사일의 경우 그 존재만으로 한반도에 심각한 위협으로 자리잡고 있다. 휴전선을 가로지르는 북한 야포들과 방사포에 의해 서울은 이미 그 숨통이 쥐어진 상태이고, 여기에 곁들어 프로그 시리즈의 로켓까지 합해지면, 서울과 수도권 지역은 말 그대로 북한의 사정거리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스커드 C미사일만 있어도 한반도의 거의 모든 전략 목표가 타격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정거리 1,000킬로미터짜리 노동이나, 대륙간 탄도탄인 대포동이 필요할까?
1차적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당장 한반도에 전쟁이 터진다면 미국의 증원군이 날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 증원군을 차단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탄도탄이다. 당장 노동1호와 2호로 일본 열도에 있는 주한미군 기지들과 제7함대의 전력을 무력화 시키고, 대포동 시리즈로 오키나와와 괌을 공격한다면, 한반도 증원병력의 상당부분은 걸음을 멈추게 된다. 아예 알래스카로 날려보내거나 하와이를 타격할수도 있다. 더 나아가 미국 본토도 노릴수 있게 된다. 북한은 미군의 증원에 따른 경우의 수를 차단할 수 있는 회심의 죠커를 쥐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은 이걸 핑계로 MD체계의 구축에 들어서게 되었다. 6조달러라는 천문한적인 예산을 쏟아부어 불량국가(북한이겠지만 말이다..)의 위협으로부터 본토를 지키겠다는 주장에 힘을 실을수 있게 되었다.
간략하게 한반도 내에서 남한과 북한의 탄도탄 개발 역사에 대해 정리해 보았는데, 보면 알겠지만, 핵의 개발역사와 마찬가지로 미사일의 경우도 수많은 정치적 계산과 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군의 철수 선언을 듣고는 핵과 탄도탄 개발에 나선 박정희 정권, 그리고 쿠데타로 집권해 정통성을 확보 할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의 매국(賣國)적인 미사일과 핵의 봉쇄와 헌납(?)…이와 반대로 미사일과 핵을 정권안보 차원에서 목숨걸고 개발한 북한의 차이는 지금의 대포동 미사일과 현무 미사일의 실력차이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핵개발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같이 따라오는 미사일 개발…핵의 제대로 된 투사를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잡은 탄도탄 미사일의 개발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안타까운 이야기이지만, 북한이 그 생존을 위해 미사일 수출로 연명하고 있는 1990년대의 상황은 작금의 북한 현실을 대변하는 에피소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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