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7일, 포시즌스 서울에서 열린 비즈한국의 브랜드 콘퍼런스에 다녀왔다. TBWA 박웅현 님이 ‘브랜드와 창의성’을 주제로 강연을 했는데 공감도 가고 인상적인 내용이 많았다.
브랜드에게 창의력=발상이 아닌 이유
박웅현 님은 30년간 광고업계에서 일하다 보니 ‘창의력=발상’이란 말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브랜드의 창의성과 시인의 창의성은 다르다. 시인의 경우 발상이 시 한 편이 되고 창의성이 될 수 있지만, 브랜드의 경우는 다르다. 브랜드는 혼자서 하는 ‘발상’이 단편적인 생각이나 반짝하고 사라지는 인사이트나 아이디어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진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짜 아이디어는 실행이 되었을 때 그 힘이 발휘된다. 브랜드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혼자의 힘보다는 ‘여럿의 힘’이 필요하다.
박웅현 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 장표에 축약되어 있다면서 어떤 그래프를 보여주셨다. ‘발상’ 두 글자가 작은 원 안에 들어가 있고, 그 원 밖에는 몇 배는 더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적혀있었다.
“과정 관리. 실행력. 무모함. 대단함. 용기. 실패. 고집. 위험. 끈기. 자기 확신.”
그는 ‘발상은 점(.)’이라고 표현했다. 브랜드의 창의력에 있어 ‘발상’은 그만큼 작은 존재다. 실행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그냥 끝이다. 발상에서 시작한 아이디어가 실제로 탄생하기까지는 저렇게 수많은 과정이 존재하고, 그 과정은 브랜드에게 있어 절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연에서 보게 된 인상적인 예시 중 하나는 나이키 창업주 필 나이트(Phil Knight)의 이야기였다.
대략 10년 전, 나이키는 칸 광고제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광고주(Advertiser of the year)’ 상을 받았다. 이 상은 그해 가장 많은 광고상을 받은 기업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찾아보니 나이키는 올해도 이 상을 받았다. 10년 후에도 여전히 레거시를 이어가고 있는 게 참 대단하다.
나이키가 올해의 광고주로 뽑히고 나이트와 인터뷰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도 필 나이트의 친구였는데, 둘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Q. 어떻게 하면 이런 광고를 만드는 브랜드를 할 수 있나요?
A. 비밀을 하나 알려줄게요. 당신이 본 광고를 만드는 데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그냥 청소하고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필 나이트가 이런 답변을 하고 질문을 던진 인터뷰어 친구는 이렇게 얘기했다.
바로 그 점이 당신을 이 자리에 서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박웅현 님은 ‘창의력이 곧 발상’이라는 전제에 갇혀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덧붙였다.
우리는 ‘창의력’이라고 할 때 ‘창의적인 발상을 더 해야 한다’ ‘나도 숟가락을 얹어야 한다’ ‘내 것이 되려면 나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힌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모두가 발상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예시로는 ‘세종대왕’도 있었다. 입 모양으로 자음을 만들고 천(·)지(ㅡ)인(ㅣ)으로 모음을 만든,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이자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져 있는 유일한 언어 한글. 한글은 세종대왕 혼자서 만든 게 아니다. 함께 만들어간 집현전의 수많은 학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글을 창시한다고 했을 때 세종대왕은 분명 수많은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중‘국과의 외교에 안 좋고’ ‘백성들이 읽기 쉽게 만든다는 건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세종대왕은 수많은 반대를 뚫고 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게 도왔다. 그 결과 한국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유산인 한글을 탄생시켰다.
박웅현 님에 의하면 필 나이트, 세종대왕과 같은 사람들이 훌륭한 면은 이것이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막힌 벽이나 뚫을 수 없는 길을 시원하게 팍! 뚫어 놓고, ‘마음껏 뛰세요. 어우 잘 하시네요. 훌륭하십니다.’ 이런 역할을 해냈다는 점.
정리하자면 그 일을 가장 잘할 사람들이 발상이 된 아이디어를 ‘마음 놓고, 신나게’ 실행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줬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단 시원하게 판을 깔아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권한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아무나 할 수 없다.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일을 전적으로 맡기는 대담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창의력이 아닐까 공감되고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박웅현 님은 이 말을 끝으로 강연을 마쳤다.
구상과 창조 사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그림자를 걷어내라. 그게 창의성이다.
- T. S. 엘리엇
배달의 민족이 일하는 방식
배민의 드립력은 ‘함께’에서 온다
비슷한 맥락에서 스페이스오디티의 리프트오프에서 들었던 배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브랜드가 콘텐츠다’라는 주제로 배민의 장인성 마케팅 이사가 강연을 마치고 질문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심플로우’를 통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던 질문은,
‘배달의 민족은 어디서 드립력을 충전하나요?’
이 답변으로 장인성 이사는 마이크를 콘퍼런스에 온 다른 배민 직원에게 넘겼다. ‘자신은 드립력이 없다’며 드립력이 좋은 동료들에게 넘긴 것이다. 그렇게 마이크를 넘긴 것도 기억에 남고, 갑자기 마이크를 받아 이야기를 시작한 분의 답변도 기억에 남는다. 직원들이 직접 해주는 얘기라 더 생생하게 와 닿았다.
일하는 방식도 그렇고. 개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보다는 누군가 아이디어를 던지면 그걸 라인 챗에서 계속 디벨롭해요. 최종 결과물인 한 줄의 카피는 1명의 온전한 생각이라기보다는 자유롭게, 직급 상관없이, 계속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나온 것입니다. 그게 원천이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니까 ‘배민다운’ 콘텐츠는 ‘1명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발상에서 시작한 아이디어가 ‘이런저런 사람들의 피드백을 통해 발전하며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배민 마케터 숭 님의 글 「이 아이디어 누가 냈어요?」를 보면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치믈리에 자격시험’의 탄생 배경을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실제로 이들이 얼마나 직급없이 대화하는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얼마나 빠르게 바로 실행에 옮겼는지 엿볼 수 있다.
실패에 대처하는 배민의 자세
이날 또 인상적이었던 얘기 중 하나는 ‘배민이 실패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도전적인 마케팅을 많이 하는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후폭풍은 없나’란 질문에 장인성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면 조용히 없어집니다. 거꾸로 얘기하면 ‘너 이거 왜 실패했어, 누구 책임이야’ 이렇게 따져 묻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치 야구 배트 휘두르는 것처럼 안타도 치고, 홈런도 치고, 아웃도 돼요. 그런데 아웃 될 것 같다고 아예 안 휘두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신나게 휘두르게 하려면 책임을 따져 묻거나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아도 그 일을 맡았던 친구가 제일 속상하거든요. 저희가 할 일은 그 친구의 잘못을 이 잡듯 따질 게 아니라 다시 신나게 배트를 휘두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저도 저희 대표님도 이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배민의 이 두 가지 예시는 브랜드에게 있어 ‘창의력=발상’이 아닌 이유와 ‘막힌 길을 뚫어주는’ 리더의 역할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잘 설명해준다.
스페이스오디티가 일하는 방식
너와 나의 연결고리
스페이스오디티의 ‘창의력’ 역시 혼자가 아닌 ‘여럿의 힘’에서 나온다. 발상, 즉 기획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최종 콘텐츠는 다양한 외부 크리에이터들과의 협업을 통해 나오기 때문.
최근에 만든 멜론 브랜드 필름 같은 경우에도 우리가 낸 아이디어를 가장 잘 실현해줄 분들과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광고 카피라이팅을 카피라이터가 하는 게 아니라 ‘작사가’가 쓰고, 영상은 ‘뮤직비디오 감독’이 찍었다. 아티스트, 작곡가, 작사가와 함께 어떤 아이디어를 주제로 하는 노래도 만들었다.
스페이스오디티의 강점은 내부에서 직접 모든 걸 만들어낸다기보단 그 일을 가장 잘할 크리에이터를 연결하고 조합해 결과물을 내는 데 있다. 광고주와 크리에이터를 연결하고, 크리에이터끼리 서로 연결하고, 결과물은 가장 좋아할 만한 사람들에게 연결한다. 그렇게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요리조리 연결해서 나온 콘텐츠들은 이렇다.
이런 관점에서 아웃스탠딩 신영주 기자님이 바라본 스페이스오디티도 인사이트가 넘친다. 신영주 기자님은 우리를 이렇게 표현해주셨다 🙂
“크리에이티브를 새로운 방식으로 엮고, 촉을 시스템화하는 곳”
개인적으로 ‘촉을 시스템화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하려는 일을 꿰뚫어 본 듯한 문장이기 때문이다. 잘 보이지 않았던 기회를 포착하고 길을 만들어내는 역할. 지금 하고 있는 일들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게 우리의 지향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엘리엇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콘텐츠를 만들어온 크리에이터를 위해 ‘구상과 창조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걷어내고 판을 깔아주는 역할’이랄까. 우리는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들을 모두 ‘오디티’라고 본다. 위의 이야기를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깜깜한 우주를 외롭게 유영하고 있는
우주비행사 Space Oddity뮤직 크리에이티브 그룹 ‘스페이스 오디티’는
정확한 계산을 도출해내고, 충분한 커뮤니케이션 교신을 통해
그들을 성공적으로 우주 궤도에 안착시키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Space Task Group이자 우주정거장이 되겠습니다.우리는 세상의 모든 Oddity를 응원합니다.
우리가 내부에서 일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리프트오프 때 나눠줬던 우주식량과 카세트 스티커를 예로 들더라도, 누구 혼자만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게 없다. 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뮤지션의 명언과 망언들을 모은 게 스티커가 되고, 카세트 케이스에 든 ‘Oddities said’ 스티커로 발전했다.
우리의 개업식 겸 콘텐츠 콘퍼런스였던 리프트오프는 초기에 나온 아이디어와 뒤에 나온 아이디어, 여러 사람의 의견과 실행력이 요리조리 합쳐지며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이건 살짝 다른 얘기인데, 스페이스오디티 내부 구성원들 모두가 ‘음악’을 정말 좋아한다. 사무실 블루투스 스피커에 노래를 틀어놓고 일하다가 가끔은 연달아 나오는 노래들이 너무 좋아서 참지 못하고 8층으로 내려가 위워크 생맥주를 떠오곤 한다.
아이디어가 구상 단계에서 실현되기 위해서 “과정 관리. 실행력. 무모함. 대단함. 용기. 실패. 고집. 위험. 끈기. 자기 확신”이란 과정이 필요하다면 스페이스오디티는 이 모든 과정에 음악이 늘 베이스로 깔려 있다. 실제로든, 은유적으로든.
‘음악’을 베이스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들며, 음악을 중심으로 모든 일이 돌아가는 회사이기에 구성원들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게 분명한 시너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냥 노는 건데 그게 또 업무적으로 연결될 여지도 많고. 이런 동료들과 ‘스페이스오디티’라는 브랜드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게 더 기대되고 설레는 이유다.
원문: yoonash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