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빙글 우주군
평화가 찾아왔다. J가 쫓아다니던 가수가 군대에 가버리면서. 물론 그 가수가 군대에 가버리기 직전에는 나도 콘서트를 연달아 두 번이나 보러 가야 했다.
“혼자 가지 왜 자꾸 나를 데리고 오는 거야? 티켓 구하기도 힘들면서.”
“너도 당당한 팬이잖아.”
“내가? 내가 왜?”
콘서트 장은 저승문이 살짝 열렸을 때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악마들의 비명소리 같은 소리로 가득했다. 아, 미친 빠수니들 진짜. 옆을 돌아보면 한 십오 분째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은 사람이 고개를 잔뜩 빼고 희망에 찬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래를 따라 불렀다가는 다른 빠수니들한테 멱살이라도 잡힐 분위기라 그런지 입모양만으로 노래 전체를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코러스까지 전부. 그 지옥문이 닫혀버린 것이다. 군대가 정말로 선량한 시민을 지켜낸 셈이었다.
J도 정신을 차리고 생업에 집중했다. 같은 뮤지컬을 열댓 번씩 보러 갈 일이 없어진 덕분에 계절에 맞는 옷을 살 여유도 생긴 모양이었다.
“주말에 진해 가자.”
“벚꽃 보게?”
“어, 버스타고 당일로 갔다 오면 될 것 같아.”
계절의 변화를 즐길 줄 아는 보통 인간이 되다니 친구로서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에 J가 짜놓은 코스를 보니 문득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아무리 봐도 그 여행의 메인이벤트는 벚꽃놀이가 아니라 군항제에서 하는 무슨 부대행사였기 때문이었다. 군악대 축제라니.
고속버스에 타자마자 입을 벌리고 혼절한 듯 잠을 자던 J는 진해가 가까워지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는 폼이 공연 시간을 걱정하는 빠수니의 자세였던 것이다.
“뭔데 그래?”
나는 J의 계획표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오전 열한시에 군악대축제라는 행사가 있었다. J는 그 행사로 달려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야, 너네 그 다섯 살 어린 오빠 우주군 갔다 그랬지?”
“어? 어.”
“혹시 우주군 군악대냐?”
“어? 내가 말 안 했나? 하하.”
종합운동장은, 트랙이 달린 작은 축구장은,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행사는 벌써 시작했을 시간이었지만, 우주군 군악대가 나오려면 오십 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J는 벌써부터 초조한 눈치였다.
“뭘 벌써 발을 동동 구르고 그래? 한참 남았구만.”
“거기 벤치가 좁아서 시야 좋은 자리 몇 개 안 된댔거든. 일반인들도 많아서 자리가 다 찼을 수도 있고. 에엣, 하필 오늘 고속도로가 막혀가지고.”
택시에서 내려보니 J의 말대로였다. 일층은 이미 만석이었고, 이층 출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는 했지만,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어서 경기장 안쪽은 구경도 못 해볼 분위기였다.
“뭐하는 짓인지, 원.”
나는 난간에 올라 먼 데까지 상황을 살핀 다음, J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J는 원망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단호한 내 얼굴을 보더니 마지못해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주차장을 지나, 경기장 둘레를 따라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적한 입구를 발견했다. 계단을 뛰어오르자 시야가 탁 트인 벤치가 나타났다.
“다들 가까운 쪽 입구에 몰려 있었네. 자, 어디에 앉을까? 마음껏 골라봐. 그늘 밑에 앉을까, 저 앞자리로 갈까?”
나는 군악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육군이야, 실제 전장에서는 북소리나 나팔소리로 지휘관의 명령을 대신한 내력이 있으니까 이해가 되지만, 그리고 해군 군악대까지는 어떻게든 이해가 되지만, 공군 군악대는 대관절 무슨 일을 하는 곳이란 말인가. 전투기 엔진 소리 같은 어마어마한 소음 앞에 군악이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하물며 유인 우주선도 딱 세 대밖에 없는 나라의 우주군 군악대라는 건.
그래도 주한미군 군악대의 공연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맨 마지막, 미국인 보컬이 한국말로 부르는 <무조건>이 압권이었다.
“태평양을 건너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건너서라도 당신이 부르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달려갈 거~야아~.”
나는 자연스럽게 미군 항공모함을 떠올렸다. 그러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고만고만한 육해공군해병대 의장대와 군악대의 묘기가 끝나고, 마지막 순서는 우주군이었다. 우주군도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었다. 전통적인 악기와 전통적인 제복. 까만 바탕에 하얀 별들이 몇 개 박혀 있는 전위적인 디자인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별로 특이할 것 없는 그냥 군대 옷이었다. 안무에서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크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장면들이었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면서 소총도 빙글빙글. 아마도 자전하는 천체를 상징하는 안무인 듯했는데, 박력은 없고 정신은 하나도 없는 게, 다른 곳에서 본 우주군 홍보물과 꽤 잘 어울리는 어이없는 현란함이었다.
그리고 맨 끝에 나오는 J네 오빠의 짧은 공연. 벤치 곳곳에서, 저승문이 열릴 때 들리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멍하게 앉아 있던 일반관객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나 분장, 무대의상도 없이, 깔끔한 우주군 제복만으로 단장한 그는 놀랍게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경기장을 가득 메운 목적의식 없는 청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목소리만으로. 그리고 노래만으로.
어쩌면 나로서는 그의 노래를 제대로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지도 몰랐다. 악마 떼에 둘러싸이지 않은 담백한 그의 목소리를.
누군가 벤치 맨 아래 차단문을 개방하자 빠수니들이 트랙으로 내려갔다. J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J가 말했다.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자기도 처음이었다고. 운이 진짜 좋았다고.
사실 벚꽃은 전 주가 피크였다. 딱 두 곡. 짧은 공연이 끝나고, 시간이 없었으면 굳이 하지 않았을 벚꽃 구경을 하면서, 애국가처럼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벚꽃 엔딩>을 팔십 번쯤 들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J에게 물었다.
“그래서 너네 오빠 언제 제대한다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어쩌면 내 목에서도 악마들의 괴성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