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팀장님, 접니다. 팀의 막내 사원이요.
어제 회식 자리에서 말씀하셨던 수평적인 기업문화 및 사업계획서에 들어갈 시장 조사 자료 관련해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기억나시죠? 우리 회사가 나름 경쟁상대로 삼고 있는 삼성 계열사 직원들은 실제로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고 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에 스타트업 DNA를 심겠다고 2016년 7월부터 ‘반바지 출근’을 허용한 결과죠. 그 당시엔 반바지만 입히면 창의적인 기업문화가 마구 생기냐는 비판이 많았어요. 근데 어찌 됐든 반바지 문화가 정착했고 ‘실제로’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직원들이 있대요.
팀장님께선 우리 회사도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만들어보자고 하셨죠. 그 의도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왜 저한테 그 아이디어를 생각해오라고 시키시는 거죠? 막내라서 창의력이 막 샘솟을 것 같아서 시키신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저는 알고 있어요. 팀장님이 막내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들어줄만한 분이 아니라는 걸요.
팀장님, 그거 아세요?
저희 팀원들은 반바지는커녕 사무실에서 슬리퍼도 못 신어요. 근무시간 내내 딱딱한 구두를 신고 일하고 있다구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건 팀장님이 슬리퍼 신는 직원들을 꼴불견으로 보시기 때문이에요.
제가 지금 당장 슬리퍼 신고 결재문서 들고 팀장님 앞으로 가서, “우선 슬리퍼부터 허용해주시면 어떨까요?” 라고 말씀드리면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저한테 미쳤냐고 소리 지르실 게 뻔하죠.
팀장님, 이스라엘엔 후츠파(Chutzpah)라는 문화가 있대요.
택배사원이 백만장자를 서슴없이 대하고, 젊은이가 노인을 가르쳐요. 얼마든지 상급자와 생각이 다름을 논쟁할 수 있어요. 위계질서는 없고 역할만이 있는 것이죠. 탈권위적인 문화가 이스라엘 사회 전체에 퍼져있어요. 덕분에 이스라엘은 어느 분야든지 아래로부터 상향식 혁신이 일어날 수 있대요. 그 결과 첨단 벤처 국가가 되었구요.
팀장님이 찾아오라고 하신 수평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정답’을 팀의 막내인 제가 알려드릴게요. 후츠파 정신입니다. 조직에서 신분을 완전히 거둬내고, 역할 중심의 수평 조직을 만들어주세요. 반바지나 슬리퍼가 중요한 게 아니고, 생각이 다른 하급자를 허용하셔야 합니다. 하급자가 얼마든지 도전해올 수 있도록 말이죠.
팀장이란 직책은 본인에게 잠시 맡겨진 것임을 기억하세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회사 나가면 서로 ‘아저씨 사이’라고. 수평적인 문화가 되려면, 회사 안에서도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해줄 필요가 있어요.
팀장님은 주기적으로 회식하고, 2차로 팀원들이랑 피시방 가서 오버워치하면서 ‘나는 젊은 마인드를 가진 쿨한 팀장이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 아니에요. 팀원들의 마음을 진정 이해하는 일잘팀장이 되고 싶다면 회식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주세요. 그게 진짜 쿨한 겁니다.
그리고 팀장님이 얼마 전에 팀원들한테 사업계획서 작성해오라고 시키셨죠. 저랑 팀원들이 열심히 만들어서 가져간 사업계획서 자세히 읽어보시긴 하셨나요? 대충 훑어보시곤 다시 만들어오라고 내팽개치셨죠.
팀장님은 팀원들한테 맨날 “너네는 시장을 보는 눈이 없다.”라고만 하시는데, 팀장님은 우리 팀원들 업무분장도 잘 모르시잖아요. 저번에 사무실에서 이 업무 누가 하는 거냐고 소리 지르신 거 저는 기억하고 있다구요.
회의할 때마다 그게 시장의 니즈를 반영한 게 맞냐고 큰소리치시는데.
팀장님, 니즈를 파악하는 힘이 뭔지 아세요? 바로 관찰력입니다.
사업계획서에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통계자료가 있어요. 리서치 업체로부터 받은 타겟층 설문조사 자료라든가. 포커스그룹인터뷰(FGI)자료를 말해요. 이 통계자료는 사업 타당성의 근거로 사용돼요. “시장에 이런 니즈가 있으니, 이런 사업을 하면(또는 어플리케이션을 출시하면) 먹힐 것이다!” 하는 거죠.
근데 안 통하는 거 아시잖아요.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시장 조사 자료는 그저 수많은 피피티 중의 한 장으로 희석되어 사라질 뿐인걸요.
팀장님, 카카오뱅크가 우리나라 금융권에 어떤 충격을 가했는지 아시나요?
카카오뱅크는 출범 이틀 만에 가입자 47만 명을 모집했대요. 지난해 1년간 시중은행들이 개설한 비대면 계좌가 15만 개였던 점을 감안하면 시중은행들의 3년 치 영업을 카카오뱅크는 이틀 만에 해낸 거죠. 최근엔 가입자가 307만 명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봤네요.
덕분에 시중은행들이 난리가 났어요. 꿈쩍 않던 대출금리를 앞다퉈 내리질 않나 각종 수수료를 인하하거나 아예 없애고 있어요. 카카오뱅크를 두려워하는 거죠. 너무나 압도적으로 시장을 잡아먹고 있으니까요.
시중은행들도 기존에 그들만의 모바일 전략을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은행의 ‘위비’라든가. 국민은행의 ‘리브’ 티비 광고 보신 적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그 어플들 솔직히 조잡하고 불편했어요. 버튼도 너무 많고, 직관적 이질 않았죠. 로그인할 때 촌스럽게 공인인증서 필요하고.
사람들은 제품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이 원하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모른다.
스티브 잡스가 1998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저런 말을 했대요. 애플은 실제로 시장 조사를 하지 않는 기업으로 유명해요. 잡스는 소비자 조사보다는 자신과 동료들의 직관을 더 신뢰했죠. 덕분에 키패드가 없는 ‘아이폰’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카카오뱅크가 출시 전에 전 국민 상대로 설문조사라도 하고 만들었을까요? 그저 소비자들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정확하게 짚어낸 겁니다. 은행을 이용하면서, 내가 불편했던 점이 무엇인지, 아니면 나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있던 게 무엇인지 면밀히 관찰했고, 카카오톡이라는 플랫폼 위에서 뱅킹 시스템의 혁신을 만들어낸 겁니다.
시중은행들이라고 타겟층 설문조사 안 했겠어요? 분명했을 겁니다. 카카오뱅크에 대응할 방법도 분명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다만 실행되지 못했죠. 왜? 상향식 혁신이 일어날 수가 없으니까요. 후츠파 정신을 가진 경영진이 없었나 봐요.
팀장님, 잊지 마세요. 주변의 니즈를 파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찰입니다.
수평적인 기업문화를 만들고 싶다면, 혁신적인 사업계획서를 사장님께 보여드리고 싶다면, 관찰력을 키우세요. 팀원들이 평소에 어떤 업무를 하는지 관찰하세요. 팀원들이 항상 구두를 신고 일하는 것을 관찰하세요. 업무시간에 저한테 결제 좀 대신해달라고 부탁하지 말고, 카카오뱅크 가입해서 어떻게 작동하는가 관찰하세요.
과거의 관습과 고정관념은 이제 그만 버리시고, 과거의 경영 사례를 참고해주세요. 그리고 제발 이 책 읽어주시길 부탁드려요. 팀장님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일잘팀장은 경영부터 배운다』라는 책이에요. 막내인 제가 먼저 읽고 팀장님께 추천하는 겁니다. 팀장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일잘팀장이 되셔서 저희 팀을 이끌어주세요. 저를 괘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팀엔 후츠파 정신이 필요해요. 제 도전, 받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팀의 막내 드림.
원문: 코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