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요계에 과하다 싶게 쏟아지는 장르가 있다. ‘트로피컬 하우스’다. 저스틴 비버나 에드 시런의 히트곡들을 계기로, 세계적으로도 한창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기도 하다.
보통의 하우스보다는 조금 느긋한 템포에, 이국적으로 흥청대는 탄력적인 리듬, 마림바 등 카리브해를 연상시키는 악기들, 바람 소리처럼 휘날리는 신스 멜로디까지. 듣고 있자면 휴양지의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르고 몸도 두둥실 움직이는 그런 음악이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끼 먹으면 질리게 마련. 어떤 이는 ‘트로피컬 사골’이라 부를 정도로 범람하는데 질리지 않기도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흔할수록 보석같이 좋은 곡들을 찾아내는 재미도 있는 법이다. 케이팝에서는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해 올여름에는 너도나도 이 장르의 곡들을 내놓고 있다. 그 많은 곡들 중에 가장 맛깔나는 곡들을 골라 듣는다면, 길고 뜨거운 여름의 갈무리로 더없이 좋을 것이다.
나의 추천곡이 시원치 않다면 일종의 ‘이열치열’을 느끼면서 지겨운 여름이 빨리 가길 염원해볼 수도 있을 테니, 이만하면 밑져야 본전이란 마음으로 들어봐도 좋지 않을까?
보아 – No Matter What
꿈꾸는 듯한 멜로디가 하염없이 뻗어 나가며 트로피컬 리듬으로 출렁인다. 보아의 다정하고 단정한 음색과 함께, 아무렇게나 내던지는 듯한 빈지노의 랩도 재미있는 대조를 보인다.
국민의 아들 – Never
아이러니하게도 〈프로듀스 101〉의 숨은 진짜 주제곡처럼 되어버린 곡이다. 애절한 멜로디가 질척대지 않는 것은 분명 비트 덕분일 테다. 신스 멜로디와 함께 댄스 브레이크가 나오는 듯하더니 다시 보컬이 치고 나오는 것이 백미.
위너 – Island
인상적인 데뷔 이후 어디로 가는지 조금은 궁금해야 했던 위너가, ‘Really Really’에서 트로피컬 하우스로 멋지게 복귀했다. ‘Island’는 그 연장선에서 다시 내놓은 본격 여름 휴양송. 말쑥하고 세련된 남자들의 느긋하고 낙천적인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공기가 담긴 곡.
태연- Cover Up
언젠가부터 소녀시대 태연은 꽤 무거운 감성의 이미지를 갖게 된 듯하다. 그런 그가 모든 걸 내려놓고 마냥 기분 좋은 표정으로 노래하는 모습이 연상되는 트랙. 그래서 더 반가우면서도, 곡 중간중간 감정의 변화가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멜로디데이 – Kiss On The Lips
올 2월에 발매된 곡이지만 아는 사람들만 알고 넘어간 곡. 트로피컬 하우스의 할아버지 격인 레게 리듬을 섞어 넣으면서 후텁지근하고 섹시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모르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곡.
카드 – Hola Hola
데뷔 전부터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본격 데뷔한 카드. 요즘 가요계에서 매우 드문 혼성그룹이기도 하다. 한동안 묵직한 곡을 내놓더니 데뷔곡은 여름에 그야말로 꼭 어울리는 낙천적인 공기를 가득 담았다. 데뷔 전 싱글 연작들을 연상시키는 토막들이 담겨 있기도 하니, 이 이색적인 그룹에 입문하기엔 더없이 좋은 곡.
효린, 창모 – Blue Moon (Prod. GroovyRooom)
‘씨스타가 없는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 하는 고민에 답하는 듯이 등장한, 씨스타 효린의 싱글. 그루비룸의 매끄럽고 우아한 사우드 속에 속삭이는 듯 아련한 보컬이 탄력적인 리듬으로 은근하게 깔리는 것이 특히 매력적인 곡.
스누퍼 – 유성
엄밀히 말해 트로피컬 하우스의 요소를 가져왔을 뿐인 곡이지만, 또한 트로피컬 하우스의 매력을 잘 살리고 있기도 한 이색적인 곡이다. 숨 가쁜 리듬 속에 몽글거리며 반짝이는 사운드가, 별빛 쏟아지는 여름 밤하늘같이 멋진 공간을 연출한다.
청하 – Why Don’t You Know (Feat. 넉살)
언제나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청하의 데뷔 미니앨범 수록곡. 친숙한 애절함이 담긴 멜로디가 트로피컬 사운드로 인해 더욱 느긋하게 들리는 묘한 매력을 선사한다.
레드벨벳 – Zoo
최근 있었던 레드벨벳의 콘서트에서 많은 팬들을 사로잡은 곡. 사랑이란 낯선 세계를 즐겁게 탐험하는 기분을 이국적인 사운드로 표현했다. 담담하면서 감상적으로 노래하다 후렴에서 갑자기 까불거리는 낙차가 특히 재미있다.
이번 주 플레이리스트는 트로피컬 하우스!
다 똑같은 트로피컬 하우스라고는 해도, 곡마다 연출과 질감,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트로피컬 하우스는 이국적인 만큼 그 특징도 매우 선명한 장르다.
하지만 특징들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 우리 댄스음악에서 어떤 식으로든 유사한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가요계에 트로피컬 하우스가 잔뜩 등장하는 건 적당히 낯설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기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말해, 트랩이나 뉴 잭 스윙 일렉트로팝 등 케이팝에서 중요한 다른 장르와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도 많다. 타이틀곡은 아니더라도 수록곡에 트로피컬 하우스의 요소를 살짝 도입한 경우 역시 심심찮게 발견된다.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그 유전자를 남기며 케이팝의 양식 요소 중 하나로 자리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지겹다고 몸서리를 치면서도 트로피컬 하우스를 좀 더 주의 깊게 들어볼 가치도 있지 않을까.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도 하는데, 마침 이 격언은 ‘여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가.
출처: 도란도란 문화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