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 무너지다
1973년 9월 11일, 선거로 선출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Pinochet) 등 칠레 군부와 경찰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1970년의 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가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와 단일화로 36.3%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 지 3년 만이었다.
이날은 아옌데의 신임투표 계획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오전 7시 30분께 경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궁으로 진격해오고 있었고 이미 쿠데타군은 칠레 내의 방송국들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관저에서 아옌데는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와 전화를 연결하여 마지막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궁은 경찰과 군 병력, 장갑차, 탱크 등에 완전 포위되었고, 공중에는 칠레 공군 전폭기들이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군부에 의해 군사평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육군 최고사령관 피노체트(Pinochet)는 대통령에게 ‘해외 망명을 허락할 테니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아옌데는 군부의 제안을 일축했지만 설사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군부는 아옌데가 탄 비행기를 격추할 계획이었다. 10시 40분, 아옌데는 경호대와 두 딸을 포함한 여성들을 궁 밖으로 내보냈다. 정오가 되자, 쿠데타군의 공군 전폭기에서 폭탄이 투하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지상군이 궁으로 진입하였다.
모네다궁 공격을 지휘한 쿠데타군 지휘관은 군사평의회에 짤막한 전문을 보냈다. ‘임무 완수. 모네다 접수, 대통령 사망.’
아옌데 개혁, 기득권과 미국의 벽 앞에서 무너지다
아옌데는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게 최후까지 저항하다 자살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의,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당(칠레사회당)의 대통령 아옌데는 굶주림에 허덕이던 민중, 특히 영양실조로 고통받던 어린이들의 사회복지정책 실현을 위해 진력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으로 특권을 누리지 못할 것을 염려한 칠레의 기득권 계급과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 기업들(네슬레는 1971년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줄 분유를 사고 싶다는 아옌데 정부의 요구를 거부했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의 경제개혁은 단기적으로 호조를 보였지만 사회주의 정책에 반감을 품은 다국적 기업들과 자본주의 강대국은 칠레에 대한 경제 투자를 끊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칠레의 인플레이션율은 140%에 이르렀고 정부 예산 적자는 치솟고 외환보유고는 떨어지는 등 칠레 경제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재신임투표에서도 그의 승리는 거의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 마침내 미국의 지원을 받아온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한 것이었다. 이후 쿠데타군에 의해 단 일주일 동안 무려 3만여 명이 학살되었다.
학살된 3만 가운데에는 칠레의 전설적 민요가수이자 민중 문화운동가 빅토르 하라(Víctor Jar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군부에 끌려가 고문 끝에 기타를 만지던 손가락이 짓뭉개지고 두 손목까지 부러진 채 기관총으로 사살되었다.
쿠데타 12일 후, 산티아고에서 칠레 민중의 희망이었다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고 있던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의 집이 샅샅이 파헤쳐지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남부 국경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했을 때, 네루다는 열아홉 살이었다. 스물네 살에 극동 지역의 영사로 활동(남미에서는 젊은 시인들에게 영사 자리를 줌으로써 그들을 격려하는 전통이 있다.)했고, 마흔 살에 광산노동자의 요청으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우익 독재자의 집권으로 비밀경찰에 쫓겨 지하로 숨었을 때 네루다를 구해 준 이는 광부와 노동자들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고 전한다. 그는 민요 가수 빅토르 하라와 함께 민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시인이었다.[관련 글 : 파블로 네루다]
정권 전복을 위한 미국의 비밀공작
미국이 이 쿠데타의 배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1990년대 말 비밀 해제된 미 정부의 극비 문서는 ‘아옌데 정권 전복을 위한 비밀공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1970년 9월, 공작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다.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이 기록한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충격이었다.
“가능성은 10분의 1이지만 칠레를 구하라.”
“뒷일을 걱정 말고 48시간 내 끝낼 수 있는 쿠데타 계획을 세워라.”
“쿠데타 전문가를 총동원하라.”
“칠레경제를 파탄에 빠뜨리고 공작금은 1천만 달러로 하되 필요할 경우 더 사용해도 좋다.”
“칠레대사관은 개입시키지 말라.”
칠레군부의 쿠데타를 기획한 또 다른 핵심 인물은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였다. 그는 칠레 CIA지부장에 전달한 비밀전문을 통해 “아옌데가 쿠데타에 의해 전복돼야 한다는 것은 확고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쿠데타에 앞서 시행한 공작은 전 방위적이었다. 미국은 아옌데 정권의 외교·군사적 고립을 꾀하는 각종 공작을 전개했으며, 칠레의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중산층의 파업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안간힘을 다했다.
3년간에 걸친 미국의 집요한 비밀공작 끝에 마침내 아옌데 정권은 군부의 폭탄 공격 앞에 무너졌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73년 10월 1일, 칠레 주재 미 대사관의 해군 무관은 국방부에 쿠데타 일은 ‘우리의 디데이(D-Day)’라고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보냈다.
“칠레 쿠데타는 완벽에 가까웠다.”
미국이 아옌데 정권 와해공작에 본격 나서게 된 것은 칠레·페루·볼리비아를 선두로 남미를 점차 뒤덮기 시작한 반미주의와 아옌데 정권이 아무런 보상 없이 칠레 내 미국기업을 국유화하는 데 자극받은 결과였다.
쿠데타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피노체트 정권에 대한 경제 원조를 제공하여 인플레 억제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칠레를 오랜 가난의 질곡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했다. 피노체트는 이를 바탕으로 의회 해산과 정치행위 금지, 민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그것은 아시아의 재개발국가에서 이루어진 군부 독재의 전개 방식과 유사한 것이었다. 피노체트는 야당지도자나 반체제인사를 좌파지도자들과 함께 구속 협박 고문하고 처형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늘 ‘반공’이었다.
피노체트(1915~2006)는 1990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권위주의적, 강압적 신자유주의에 근거한 광범위한 경제 개혁을 시행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좌파 정당,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인사 3천여 명이 학살되었고 1천여 명은 실종되었다.
피노체트, 17년 권좌의 끝
칠레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미국을 등에 업은 독재 정권은 가혹한 국가폭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거센 민주화 요구로 마지못해 선거가 치러졌을 때에 반 피노체트 진영에서는 텔레비전 광고와 토론 프로그램 참여 등으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언론 통제로 감추어졌던 인권 탄압 문제를 부각시켰다.
마침내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미국도 등을 돌리게 되고 17개 정당과 시민단체가 참여한 중도좌파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협력체’라는 정당연합을 결성하여 비폭력저항을 벌인 끝에 1988년 피노체트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고 이듬해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집권연장에 실패했지만 피노체트의 임기는 보장되었고, 1998년 3월까지 군 통수권자로서 역할을 인정받으며 그 이후에는 종신 상원의원으로서 면책권도 부여받았다. 민주정부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어 군부독재 기간의 인권유린을 조사했지만 그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피노체트는 영국으로 망명했고, 런던에서 스페인 국민 살해 문제로 체포되었다. 칠레정부가 피노체트 송환을 요구한 끝에 그는 2000년 칠레로 돌아왔다. 피노체트는 사법부에 의해 가택연금 되고, 300건의 국가범죄로 기소되었으나 2006년 심부전으로 사망하면서 사법적 단죄는 면했다.
2006년 12월 12일 그는 화장되어 묻혔는데, 피노체트의 유족은 피노체트가 무덤에 대한 모욕과 파괴행위를 막기 위하여 화장을 원한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산티아고 시민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피노체트 없이!’라는 펼침막을 걸고 ‘평화로운’ 성탄절을 보낼 수 있었다.
위대한 칠레인 살바도르 아옌데
비판적 평가가 없지 않지만 아옌데는 칠레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가 지녔던 민중에 대한 신념은 옳았다는 것이 역사의 진전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008년 칠레 국영 방송국에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칠레인을 뽑는 프로그램인 ‘그란데스 칠레노스(Grandes Chilenos)’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다.
아옌데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는데 쿠데타 직후 쿠바로 망명했던 장녀는 4년 후에 죽었고, 차녀 마리아 이사벨 아옌데(Maria Isabel Allende, 1945~ )는 1990년대 칠레 민주화 이후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상원의장 등을 거쳐 현재 사회당 당수로 있다.
쿠데타 이후 해외로 망명해야 했던 그의 종질(부친의 사촌 형제의 딸)인 작가 이사벨 아옌데(Isabel Allende, 1942~ )는 그녀의 데뷔작 『영혼의 집』에 자신과 주변이 겪은 끔찍한 경험을 담아냈다. 주로 라틴아메리카의 근현대사를 중점으로 한, 『영혼의 집』, 『운명의 딸』, 『세피아빛 초상』 등 ‘여성 3부작’을 썼다.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때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공군 소장의 딸이다. 이후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에게 고문을 당하는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그는 2006년 칠레사회당 후보로 대통령에 선거에 나가 승리했다.
퇴임 직전 지지도가 85%로 높았으나, 연임 제한 규정으로 한번 쉬고 2013년 말 62% 득표로 다시 당선되어 현재 재임 중이다. 그는 2006년 피노체트의 장례 때에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것은 양심에 위배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1970년대에 아옌데는 우익 쿠데타에 희생된 사회주의와 진보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다룬 소설 <강철군화(The Iron Heel)>의 표지는 ‘강철군화(과두 지배체제의 상징)’에 짓밟힌 아옌데의 팸플릿으로 디자인되었다. 1980년대 한국 번역본의 뒷 표지도 마찬가지였다.
- 관련 글 : 『강철군화』, 독점 자본주의의 미래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