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나라가 세계 2차 대전 이후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후 산업국가로 도약한 나라는 몇 되지 않는다. 아래의 그림은 한국과 일본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표시했는데,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을 극복하고 일본을 거의 따라잡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가 과거의 압제자 소득 수준을 추월하는 일은 매우 드물며, 또 있다 해도 유럽의 극히 일부 국가(아일랜드 등)에 불과하다.
식민지 상태를 벗어난 나라가 산업국가로 일어서는 일이 왜 이렇게 드물까?
이에 대해 세계적인 석학, 제프리 삭스 교수는 그의 역작 『빈곤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93∼106쪽).
첫째, 최빈국들의 핵심적 문제는 빈곤 그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빈곤이 아주 극단적인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곤경에서 스스로 벗어날 능력이 없다. 너무 가난해 저축할 수 없고, 따라서 현재의 비참한 생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1인당 자본도 축적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자연지리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손으로만 부를 이뤘다고 믿지만, 그들은 훌륭한 토양·풍부한 강수량·항해가 가능한 큰 강·해양무역의 바탕이 되는 수 천 개의 천연 항구 등을 잊어버리고 있다.
셋째, 재정적 함정도 중요하다. 정부는 기초적 보건·도로·전력망·항구 등과 같은 공공재화와 서비스 투자에 결정적인 영향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이 빈곤해 세수가 부족하고, 정부가 무능력해 세금을 걷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이미 정부가 무거운 채무를 지고 있는 경우에는 이 문제가 성장의 큰 저해요소로 작용한다.
넷째, 통치구조의 실패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경제발전은 발전 지향적인 정부를 필요로 한다. 정부는 우선순위가 높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인해 지원하고, 전 국민이 쓸 수 있도록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이런 과제에 실패할 경우, 경제도 실패하게 되어있다.
다섯째, 문화적 장벽도 중요하다. 정부가 자국을 진보시키려 할 때 문화적 환경이 발전에 장애가 될 수 있다.
여섯째, 지정학적 요인도 중요하다. 교역하려면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데, 외국이 세운 장벽은 빈국의 경제발전을 방해할 수 있다(미국 CIA에 의해 가해진 개발도상국 정부의 교체 시도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일곱째, 혁신의 결여도 성장을 지체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중략) 어떤 발명가가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킬 과학적 접근법을 새로 개발했더라도, 나중에 시장에서 판매해 연구개발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문제는 발명에 대한 재산권이 아니라 시장의 크기이다.
마지막으로 인구 함정이 성장에 결정적인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최근 몇십 년 동안 대부분의 나라가 출산율의 상당한 하락을 경험했지만, 극단적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들은 다섯 명 이상의 출산율을 기록해 세대마다 인구가 거의 2배씩 늘어나고 있다.
빈곤한 가계는 높은 유아사망률 및 노후에 대한 보장(그 밖의 문화적 요인도 작용) 등의 이유로 많은 아이를 낳지만, 그 가계는 자녀의 영양·건강·교육에 충분히 투자할 능력이 없다. 또한, 급속한 인구증가는 환경 및 식량 자본의 고갈을 가져와 빈곤을 더욱 가속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 교수의 글을 읽으면, 한국의 고성장 원인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이후 지속된 미국의 원조(및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 청구권)로 극단적 빈곤 문제(1번) 및 재정적 함정(3번)과 지정학적 위험(6번) 문제를 해결한 데다, 1950년대부터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논쟁거리가 부각된다.
미국의 원조와 한국 정책당국의 경제발전 전략 중 어떤 요소가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
오랫동안 이 의문을 풀지 못했는데, 최근 발간된 책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김두얼 지음)』 덕분에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157쪽).
원조는 수원국(受援國=원조를 받은 나라)의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가? 그렇다면 원조는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효과적인가? 이 질문은 경제 개발 업무 관련 실무자나 학계가 씨름하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다. (중략)
즉 수원국 가운데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길로 접어들었던 나라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다. 원조를 받은 나라가 많았지만, 이 가운데 산업국가로 성장한 나라는 극소수였다. 그럼 한국은 얼마나 많은 원조를 받았을까?
이에 대해 김두얼 교수는 가장 많이 받았던 해도 GDP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182~186쪽).
1945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나라가 받은 증여 및 양허성 공공차관(이하 ‘순 ODA’)은 약 77억 달러, 2010년 가격으로 환산하면 약 450억 달러이다. (중략) GDP 대비 순 ODA는 시기별로 큰 변동을 보이는데, 1957년에 GDP의 8.5%로 가장 높았다.
물론 국내총생산(GDP)의 8.5%에 이르는 돈은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1950년대 후반, 한국경제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나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공적 원조의 힘이 컸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의문은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세계 다른 저개발국을 대상으로 이뤄졌던 지원에 비해, 한국으로의 ODA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아니었는가? 아니면 평범한 수준이었는가?
이에 대해 김두얼 교수는 절대규모로나 상대규모로나 중상위권에 불과했다고 지적한다(193~194쪽).
우리나라가 받은 ODA의 규모는 절대 규모 차원에서 보면 ODA를 받은 나라들 중에 약 20위 정도의 수준에 속한다. (중략) 그러나 인구규모나 경제규모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받은 ODA 수량은 중위권 정도를 차지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원조 덕분에 이뤄졌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원조를 받은 인도나 이집트 그리고 파키스탄 등의 나라가 아직 1인당 국민소득 2천 달러 미만의 소득 수준에 머무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원조가 없었더라면 한국 경제가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날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을 것이다. 다만, 다른 나라보다 더 적은 원조를 발판으로 산업화를 달성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원문: 홍춘욱의 시장을 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