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가 짓겠다는 ‘박정희 역사자료관’, 어떤 역사를 증언하게 될까
‘200억 박정희 유물관’이 오고 있다. 올해 안에 완공될 새마을 테마 공원 주변 터 3만5천여㎡에 상설·기획 전시실, 수장고, 세미나실 등을 갖춘 연면적 4000㎡의 ‘박정희 대통령 역사자료관’이 내년에 세워지면 구미시는 ‘박정희 타운’을 매듭짓고 박정희 신화를 눈부시게 재현하고자 한다(관련 기사 : 박정희 재떨이 모시는 200억짜리 자료관이라니…)
남유진 구미시장은 이 유물관에 유물 5670점을 전시하여 박정희 시대를 완벽히 재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영광의 시대를 구가하면서 그 시절의 영예를 다시 소환하고 싶어 한다. 시정을 ‘새마을’로 포장하고, 구미시를 ‘새마을 종주 도시’로 선포하며 박정희를 ‘반신반인’의 지위로 격상한 것도 그래서다.
시민들의 반대에 맞닥뜨린 ‘유물 전시관’ 건립
그러나 이 구미시의 야심 찬 기도는 지금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히고 있다. 무엇보다 박정희 유물관 건립을 백지화하라는 지역 시민단체의 요구가 거세다. 구미참여연대(이하 참여연대)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구미시의 박정희 기념사업이 시민의 삶과 무관한 시대착오적인 사업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참여연대는 위탁 보관 중인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200억이라는 거액의 예산을 지출하여 역사자료관을 짓겠다는 것은 구미시의 고집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구미시가 보관 중인 박 전 대통령 유물 5670점에 대한 소유권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에 있고 그 내용조차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전시할 자료가 빈약하여 유물기증 캠페인까지 벌였지만 기증된 게 고작 사용자가 확인되지 않은 재떨이 같은 물건에 그쳤던 것은 이 사업의 목적과 취지를 의심하게 하는 일이었다. 없는 유물을 구할 게 아니라 유물관 건립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는 참여연대의 요구가 설득력을 얻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최근 한 일간지의 보도로 구미시청 선산 출장소 3층에 보관되어 온 박정희 유품 5670의 일부가 드러났다. 2004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으로부터 위탁받은 지 14년 만에 4대의 폐회로 텔레비전이 출입문을 감시 중인 이 ‘비밀의 방’에서 확인된 유품은 맥을 빠지게 만든다(관련 기사 : 박정희 유품 5670점 보관해온 ‘비밀의방’ 들여다보니…).
‘비밀의 방’에는 ‘골동품만 가득하다’?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외국산 티파니 시계, 기어 자전거, 물소 가죽 슬리퍼, 가죽 재질의 여행용 가방 세트, 삼성-산요 만든 초창기 TV, 박 전 대통령의 가죽 소파, 육영수 여사가 앉은 노란 패브릭 소파 등이다.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기사에서 확인하는 유품을 둘러보는 기분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새로운 물건에 익숙해진 눈에 비친 예의 유품들은 그게 설사 당대의 최고급품이라 하더라도 케케묵은 지난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유품’이라고 불리는 사물은 그것을 썼던 이들의 삶과 이어지긴 한다. 간디가 남긴 샌들과 찻잔, 회중시계와 안경 같은 물건들은 비록 볼품없이 낡은 것이지만 그의 무욕과 청빈의 삶을 상징하면서 거기 담긴 위대한 사랑과 사상을 증명한다.
작가가 남긴 만년필과 습작 노트, 타자기는 그의 문학을 상징하고 환기한다. 마찬가지로 화가의 붓과 물감, 화구 가방 따위는 그의 미술의, 작곡가의 오선지나 악보, 연주자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는 그의 음악의 상징이다.
사진가의 카메라, 등반가의 신발과 자일, 무용가의 토신, 지휘자의 지휘봉도 그렇다. 평범하게 살아갔던 이들의 삶도 그들의 유품으로 기억될 수 있다. 농부의 농기구, 어부의 배, 목수의 연장, 마부의 채찍은 그의 삶을 압축하고 있는 사물로서 그 주인의 생애를 유추하게 해 준다.
그러면 18년 동안 유례없는 권좌를 지키면서 종신 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자 박정희의 삶은 어떤 유품으로 기억될까. 아니, 인간의 삶과 사회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게 정치일진대 정치가의 삶은 어떤 물건을 통해서 유추될 수 있을까.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앞서 든 검소한 삶의 표상으로서 기억되고, 영국의 처칠은 그의 전매특허 같은 시거를 통해서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은 그의 유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생전에 선택하고 집행한 정책과 업적으로 기억된다.
미국의 대통령 기념관은 그의 생전 집무실을 재현하고 재임 기간 중 업적 중심으로 전시·구획하고 있다고 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뉴딜’ 정책이고 케네디 대통령이라면 ‘뉴 프런티어’ 같은 정책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찬반의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운동’, 또는 ‘조국 근대화’와 같은 정책과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서울), 박정희 민족중흥관이 이러한 정책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꾸며져 있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가는 ‘유품’이 아니라 ‘정책과 업적’으로 기억된다
올 안에 완공될 면적 25만949㎡에 이르는 ‘새마을 테마 공원’은 주변의 생가, 민족중흥관 등과 어우러진 ‘박정희 타운’의 중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총합하면서 그에 대한 기림과 기억을 집대성하는 시설물이다.
이미 박정희를 기리고 기억하는 시설은 차고 넘치는 포화상태다. 열거한 시설물로도 박정희의 이미지와 정책은 충분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선산출장소에 보관되어 온 박정희의 유품은 한 개인의 일상생활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는 얘기다.
구미시가 박정희 유물관을 60, 70년대 청와대의 일상을 재현하는 ‘시간여행’의 정거장으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낡고 초라해 보이지만 공개된 유품들은 당대 최고 권력이 일상에서 쓰던 집기들이다. 굳이 다수 대중의 고단했던 삶과 무관한 권좌의 호사를 엿보는 시설물에다 200억이라는 예산을 들이부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시설물들은 그 운영비용도 만만치 않다. 대규모 시설물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기본 예산만도 수십억을 상회하는 것이다. 구미참여연대는 박정희 타운 전체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을 75억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걸 감당하는 건 재정적 압박이 될 수밖에 없으니 이 운영비 부담 주체를 두고 다툼이 일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보도에 따르면 882억 예산을 들인 새마을 테마 공원 완공을 앞두고 경상북도와 구미시가 이 공원의 운영권을 놓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경북도와 구미시의 이상한 ‘새마을 테마공원 운영권’ 다툼
공원 운영권을 서로 갖겠다고 다투는 게 아니라 서로 상대에게 미루느라 싸우는 것이다. 어느 쪽도 연간 수십억 원이 들어가는 운영비 부담을 지지 않겠다는 거다. 구미시에선 ‘경북도가 구미시에 운영권까지 떠넘길 경우 구미시의회와 시민단체 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칠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시비를 보태며 박정희 기념사업에 골몰해 온 구미시가 이제야 그걸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마저 맡을 수는 없다고 정색을 한 형국이다. 참여연대가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힐난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구미시는 박정희 타운을 매듭짓는 ‘박정희 유물관’을 짓고야 말겠다는 뜻을 거두지 않고 있다.
참여연대가 7월 28일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에 구미시청 앞에서 ‘박정희 우상화 반대 1인 시위 축제’를 벌이는 것도 그래서다. 집회 신고를 해 놓고, 갖가지 피켓을 든 시민들이 퇴근 전후의 구미시청 정문 앞을 지키는 것이다. 회원들이 든 펼침막에는 “남유진이 적폐다 – 200억 박정희 유물관, 니 돈으로 지어라!”라고 씌어 있다.
참여연대는 8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박정희 유물 전시관 반대 서명운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시민단체에서 시작하였지만 시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적폐를 해소해 나가자는 취지다. 참여연대 황대철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명분 없는 사업에 시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혈세를 낭비한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요. 구미시민 1만 서명을 추진하면서 시민들의 반대 의사를 결집해 나갈 작정입니다.”
구미시와 시민들이 유물 전시관을 두고 맞붙을 이 싸움의 귀추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도시는 시민의 것이고 임기가 끝나면 시장은 물러나지만 시민들의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은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는 것보다는 열린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