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8월 28일, 서울대 미대 재학생 김민기(1951~ )가 쓴 ‘아침 이슬’이 세상을 첫선을 보였다. 이 노래는 다음 해 <김민기 1집>과 양희은(1952~ )의 첫 음반 <양희은 고운노래 모음>에 수록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아침 이슬’은 같은 음반에 실린 ‘세노야’와 함께 무명의 대학생 양희은을 가수의 반열에 세워준 대표곡이 되었다. 대중들은 가요를 즐기면서 그것을 작곡자가 아니라 가수의 것으로 기억하니 말이다. 뒷날, 양희은이 ‘아침 이슬’이 없었다면 자신이 가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김민기가 짓고 양희은이 부른 ‘아침 이슬’
작곡가와 가수라는 관계를 떠나 김민기와 양희은의 만남을 그들 음악과 삶의 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애당초 김민기는 연습이 끝나면 악보를 버리곤 할 정도로 ‘아침 이슬’을 마뜩잖아 하였다. 그러나 ‘노래에 끌리듯 빠져버’린 양희은은 원작자보다 먼저 이 노래를 취입하여 대중에게 선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연은, 일찍이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를 연주해 왔던 김민기가 음악다방 아르바이트생 양희은의 공연 반주를 맡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양희은은 ‘아침 이슬’ 이래 김민기가 만든 ‘금관의 예수’, ‘상록수’, ‘작은 연못’,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을 부르면서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사랑과 이별 타령으로 지새우는 기존의 대중가요와 전혀 다른 문법의 이들 노래는 ‘김민기 표’가 아닌 ‘양희은 표’로 대중에 가슴에 심어졌다. 적어도 김민기 노래를 대중이 따라 부르는 ‘유행가’로 만들어 준 것은 가수 양희은이었던 것이다.
‘아침 이슬’은 1973년 정부가 선정한 건전가요가 되었다가 이태 후에는 금지곡의 목록에 오르는 등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다. 일반인들이야 ‘아침 이슬’을 유행가의 하나로 즐겼을 터이지만, 때는 1970년대였다. 건전가요에서 금지곡으로의 급전직하는 시대 상황 말고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노래가 발표된 1970년 이후 정국은 심상찮게 격동하고 있었다. 그 전해인 1969년에 박정희는 3선개헌을 통해 영구집권의 걸림돌인 연임금지 조항을 없앴고, 1971년 7대 대선에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힘겹게 꺾고 삼선에 성공했다.
이듬해(1972) 폭압적 유신체제의 출발을 알리는 10월 유신이 선포되었다. 정권은 1974년 1월부터 이른바 ‘긴급조치’를 잇따라 발동하여 교수, 학생, 언론인, 종교인, 문인 등 민주인사들을 투옥하거나 해직시켰다. 이에 대해 야권과 시민사회는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황당한 금지 사유, 그 시대가 그랬다
아침 이슬이 금지곡 목록에 오르게 된 1975년은 그런 시기였다. 당시 금지곡으로 묶인 2천여 곡에는 제각기 사회 통념 위반, 근로 풍토 저하 따위의 금지 사유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아침 이슬’에는 금지 사유조차도 없었다.
뒷날 밝혀진 금지 사유는 한편의 희화다. ‘아침 이슬’은 불법적 민간인 사찰을 통해 정권을 떠받치던 기관원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다. 문제는 그 상상력이었다. 그런 이유를 창안해 낸 기관원들의 공안적 상상력은 연면히 계승되었다.
가사 맨 처음 등장하는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에서 ‘긴 밤’이 1970년대 당시의 유신정권을 의미한다는 게 나중에 밝혀진 금지 이유였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아침 이슬>은 1970년에 이미 발표됐고 유신은 1972년 10월에 선포됐다. 금지시키기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황당한 이유쯤 되겠다.
-김동률, 『인생, 한 곡』(알에이치코리아, 2015) 115쪽 재인용
권위주의 정권 시대에 관이 불허한 음악은 불리기 쉽지 않았다. 방송이 금지되면서 ‘아침 이슬’은 제도권에서 완벽하게 외면당했다. 운동권 집회와 시위 등에서 대중의 사랑을 이어온 ‘아침 이슬’이 해금(解禁)된 것은 1987년 ‘6·29선언’ 이후였다.
우리가 ‘아침 이슬’을 배우고 부르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972년 이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 ‘아침 이슬’은 그리 특별한 노래는 아니었다. 유신독재라는 정치 상황에 어두웠던 지방 고교생에게 그것은 양희은이 부른 심상한 노래 가운데 한 곡이었을 뿐이었다.
당시는 이른바 ‘청년문화의 기수’라고 불린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중고생들에게 가장 멋있는 그림은 통기타와 ‘야전’이라 불린 포터블전축 따위를 메고 ‘캠핑’을 가는 것이었다. 도시 근교의 유원지로 가는 역이나 버스정류장에는 으레 차를 기다리면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1970년대, 어둡고 긴 터널
내 주변에도 그런 여유를 일상으로 부리던 급우들이 없지 않았지만 기타를 연주하며 과장된 발음으로 팝송을 노래하던 그들의 문화는 내게서는 먼 것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여유를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멋들어지게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면, 하는 소망은 그 시절 모두의 것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가 ‘아침 이슬’보다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이장희의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따위에 더 심취했던 것은. 그들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젊은이들은 길고 긴 유신 독재의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침 이슬’이 여느 노래와 다르게 다가오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였다. 80년에 만기제대를 하고 복학하고 불과 두어 달 만에 광주항쟁이 터졌고, 대학에는 탱크가 진주했다. 짧았던 시위 기간 학내집회에서 비장하게 불리던 노래가 ‘아침 이슬’이었다.
양희은은 물론이거니와 김민기도 이 노래가 집회와 시위에서 그렇게 불리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침 이슬’을 ‘참여와 독려’의 뜻으로 새긴 것은 대중들이었다. 그것은 양희은의 말대로 “결국 노래는 불러주는 이의 것이고 ‘아침 이슬’이 시위 현장에서 불린 건 그 노래가 선택됐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만 해도 심상하게 받아들였던 이 노래의 가사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 것도 그 시절이었다. 그래도 나는 ‘저 거친 광야’ 부분에서 얼마간 비장한 느낌을 받긴 했지만 ‘긴 밤’과 ‘태양’의 의미를 유신시대의 기관원처럼 상상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의 ‘공안적 상상력’과 아침 이슬
1988년에 부임한 두 번째 학교에서 나는 뜻밖의 ‘공안적 상상력’을 만났다. 당시 내가 지도하던 문학동아리 아이들이 ‘우리 시대 삶의 노래’라는 내 카세트테이프를 빌려 가더니 점심시간 방송에 ‘아침 이슬’을 틀면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아이들이 학생부에 불려오고 하는 걸 뒤늦게 알고 나는 이를 교감에게 항의했다. 아래는 그때 교감과 내가 나눈 대화다.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방송에 대중가요 한 곡을 튼 게 왜 문제가 됩니까?”
“아니, 가사가 좀 그렇잖아?”
“가사 어디가 어떤데요?”
“태양이 하필이면 묘지 위에 떠오른다는 건 무슨 뜻이야?”
“허허. 태양이야 어디든 못 뜨나요? 동네 위에도 뜨고, 묘지 위에도 뜨고…….”
대거리를 하다가 그걸 두고 다투는 게 민망해서 나는 웃고 말았는데, 겸연쩍기는 교감도 마찬가지였다. 관리자는 늘 교사들과 아이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시해야 하던 시대였다. 시대가 쓸데없는 정치적 상상력을 강요하던 시절의 소극이었다.
학교마다 평교사회가 만들어지고, 교원노조가 결성된 게 다음해다. 이듬해 서울 곳곳에서 펼쳐졌던 집회에서 경찰에 맞서 교사들이 스크럼을 짜고 부른 노래 가운데 ‘아침 이슬’도 물론 끼어 있었다. 80년대 후반부터 집회와 시위에서 ‘민중가요’가 주로 불리면서 쓰임새가 줄긴 했지만 ‘아침 이슬’은 여전히 현장에서 불리었다.
‘아침 이슬’뿐 아니라, 김민기가 만든 노래 ‘금관의 예수’, ‘상록수’, ‘작은 연못’, ‘서울로 가는 길’, ‘늙은 군인의 노래’ 따위는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운동권과 사회운동에서 즐겨 불리었다. 1980년대 후반 교육운동에서 교사들은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가사를 바꿔 ‘늙은 교사의 노래’로 부르곤 했다.
정작 노래를 만든 김민기는 ‘아침 이슬’이나 ‘상록수’ 같은 노래에 대한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를 그는 “그 노래들이 내 몸에서 나간 거긴 한데, 나간 것의 백배가 되어서 돌아오면 내 몸이 버거울 수밖에….”라고 답하는 이다. 지면을 통해 만나는 김민기는 매우 정직한 사람 같다.
그에게서 나가서 백배가 되어 돌아온 노래
5·18 광주항쟁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노래를 만들지 않은 것에 대한 그의 답도 그렇다. 그것은 삶을 꾸미지 않는 날것 그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답인 듯싶다.
“사람들이 죽었거든. 죽음을 가지고 내가 함부로 묘사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그러지 않곤 그 죽음을 묘사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죽음이 얼마나 끔찍한데…. 당사자만큼 절실하지 않으면, 그걸 묘사할 자격이 없다고 난 생각해.”– <한겨레> ‘인터뷰’ 중에서
김민기는 1991년부터 소극장 ‘학전(學田)’을 만들어 라이브콘서트와 뮤지컬 기획에 전념하고 있다. 그가 독일 작품을 리메이크한 <지하철 1호선>은 15년간 71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4천 회나 공연된 국내 최장수 뮤지컬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청소년극과 아동극을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올해 그는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이다. 그러나 일부러라도 ‘돈 안 되는 일만 해’ 온 이 작가의 이야기는 몇 줄로 줄일 수 없다. 건강을 지켜가며 더 오래, 돈은 안 돼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들을 벌여나가길 기대해마지 않는 이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 ‘아침 이슬’의 그 사람, 김민기를 만나다 (한겨레)
- 한국 대중음악 스타 열전 (신동아)
- 이 주일의 역사 (부산일보)
- 양희은 (I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