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의 단도가 얼굴 바로 앞에서 휘둘러지는 순간, 잠깐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길이란 말인가. 운명이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조총에 목숨을 잃은 어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운명이라니, 바보같다. 내게 있어 그런 건 없다. 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빼앗긴 아버지의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나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은, 황제의 딸이니까.
단도는 비껴나갔고, 나는 살았다. 다만 얼굴에 긴 상처가 한 줄 남았을 뿐이다. 단도에 베인 상처를 제대로 수습하기도 전에, 붉게 떨어지는 핏방울을 바라보며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신에게 말했다.
“만주 상황… 만주는요?”
그 순간 모두의 얼굴에 안도인지, 감동인지, 어쩌면 희열일지 모를 묘한 표정이 번져나간 것을, 나는 본 것 같다.
* * * * * * * *
수십 년을 주변의 대국에 지배당하며 살았고, 그리고 또 십 수 년을 왕 없이 지리멸렬하게 보냈다. 나라랄 것도 없고, 사실 한 민족의 집합체에 가까운 우리들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국력은 약해졌고 땅은 무너졌다. 자원은 모자랐고 사람도 부족했다. 그 무너진 땅 위에, 어느날 한 사람의 영웅이 나타났다.
“이 민족은 용기를 갖고 전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난 어렸고, 그때 그 영웅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는 이 민족은 하나의 나라로서 완전히 굳건해졌고, 이미 천 리는 뚜벅뚜벅 전진해나간 후였다. 난 그제야,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더 특별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는 철혈로 비로소 우리 민족의 제국을 굳게 세웠다. 그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제국은 크지는 않았지만 아주 빠르게 내실을 키워갔고, 늘상 밥을 굶을 걱정을 하던 부족들이 새로운 마을을 세우고 생산량을 몇 곱절씩 늘려 나갔다.
하지만 그 무렵 바로 옆의 대국, 청(清)이 어지러워지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의 패자 청을 베어먹기 위해 하나같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으니. 잠자는 사자로 불리던 청은 이젠 이빨빠진 사자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요리하기 딱 좋게 살이 찐 돼지처럼 보였다.
서구의 기묘한 정치 체계와 종교는 청으로 흘러들어와 사회를 어지럽혔다. 그건 그야말로 대혼돈이었고, 그 혼돈은 국경지대의 얼기설기 짜여진 국경선을 뚫고 나와 변방으로까지 퍼져나갔다. 대국이었던 청은 그 우악스런 충돌을 어찌 저째 버텨냈지만, 소수민족이 쌓은 작은 제국은 그 파괴력을 감당할 기운이 없었다.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간신들이 횡행했다. 더이상 황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나왔다. 모두가 우리 가족을 흔들려 했다. 서구로부터 청(清)으로, 그리고 다시 이 작은 제국으로 불어온 쿠데타의 파도가 위험한 수준까지 치달아간 그 순간 – 제국은 한 번의 총성으로 무너졌다.
총이란 – 정말이지 우리가 모르던 그 무엇이었다 – 사람의 목숨을 한 순간에 앗아갈 뿐 아니라 거대한 제국마저도 한 순간에 앗아갔다. 암살자는 계절이 바뀌었다고 선언하며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나, 제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부모를 잃은 가족은 집 한두 채 살 돈만 받고 쫓겨났지만, 그런 개인적인 걱정에 잠겨 있을 시간이 없었다. 서구에서 들여온 기묘하고 삿된 사상들이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다.
아버지의 유언은 알려지지 않았다.
동생은 집에서 쫓겨난 것도 모자라 큰 사고까지 당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엉망이 되어 돌아온 동생은, 틈이 날 때마다 정체불명의 풀을 끽연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이 청나라에서 특별히 사온 고급 담배라고 얘기했고, 담배를 하지 않는 나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은 폐인이 되어 갔지만, 나는 그것이 그저 부모를 잃고 집에서 쫓겨난 슬픔으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기만 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수 년이 지난 후. 청나라의 어떤 관리가 영국에서 들어온 이상한 약을 전부 바다에 버려 영국과의 마찰을 일으켰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다. 그제서야 나는 동생을 점점 폐인으로 만들어간 그 ‘청나라에서 온 고급 담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지만, 벌써 시간이 너무 오래 흐른 뒤였다.
그 해, 영국은 청나라를 침공했다. 그 정체불명의 약들을 바다에 버렸다는 이유로. 그 약은 아편이라 불렸고, 그 전쟁은 아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다.
아편 전쟁은 청나라의 큰 패배로 끝이 났다.
청나라는 이미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곧 우리의 귀에는 중국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어떤 사람이 서양의 삿된 귀신을 들여와서는, 자기가 그 귀신의 동생이라 주장을 한다더라, 그런데 그 교세가 터무니없이 커져서 심지어는 난징에까지 이르렀다더라… 이미 온갖 삿된 사상과 아편 전쟁으로 쓰러져가던 청나라는 나라의 기반을 뒤흔드는 그런 사태에도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청은, 그래도 대국이다. 흔들릴대로 흔들렸지만 대국이다. 그런 대국조차도 이만큼 흔들리니 버티지를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나라는 어떠한가. 여기는 소국이다. 사람도 적고 나는 자원도 적다. 흔들리면 흔들릴 때마다 대들보가 뽑혀나갈 것이다. 서구에서 들어온 삿된 사상이 나라를 좀먹을 때마다, 더 버틸 대들보도 없어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난 그제야 내 아버지가 했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이 민족은, 용기를 가지고, 흔들림 없이 전진해야 합니다. 그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나는, 이 나라를 일으킨 그 위대한 영웅이 모든 딸들의 영웅과 같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내 아버지. 이제는 내가 이어가야 할, 내 아버지.
* * * * * * * *
“상황은 괜찮습니다. 기를 꼽으실 시간입니다.”
외세의 침입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다시금 이 제국을 일으켜 세우리라, 내 아버지를 다시금 이 땅에 이어가리라는 의지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어느덧 십 수 년이 훌쩍 지나고, 어느새 나는 할머니가 되어 버렸지만, 여전히 나의 과업은 현재 진행형이다.
고향의 작은 땅에서부터 시작해 군세를 늘려왔다. 이미 선전 포고는 끝났고, 이제는 대회전만이 남았다. 제국의 재건이 코앞이건만, 괴뢰의 무리는 어느새 또 저만큼 세를 불려 우리의 전진을 방해한다. 하지만 괜찮다. 누군가 이것을 운명이 아니라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으므로. 내가 믿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므로.
“여러분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출정을 앞둔 장군의 말 치고는 참 맥없는 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말이고,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지리멸렬해진 나라. 아편 전쟁. 사이비 종교. 대국의 분열 – 우리는 꿈을 잃었고, 그냥 살아가고만 있다. 이 싸움은, 그걸 되찾는 싸움이 되어야만 한다.
잠시 술렁거리더니, 이내 여기저기에서 외침이 들려온다. 따뜻한 집부터 맛있는 밥,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 그렇게 한동안 웅성거리던 분위기는, 누군지 알 수 없는 무명씨의 주도로 점점 하나의 단어로 모아진다. 처음에는 거대한 군중들의 목소리 속에서 아주 작고 애매하게 들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진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이름이다.
외침이 점점 커지며,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기대에 찬, 결의에 찬 그 눈빛들, 눈빛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출정을 앞둔 마지막 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