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페친인 만화가 권용득 씨가 페이스북에 “딸 가진 아빠”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다. 본문부터 댓글까지 아주 재미나게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내 딸이 남자친구와 스킨십하는 걸 보며 분노하는 마음, 내 딸을 괴롭힌 남자아이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는 마음, 자취/연애/야한 옷 모두 금지지만 결혼을 안 하는 것도 안 된다는 마음, 이런 ‘아빠 마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오갔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가 권용득 작가의 이런 문장에 공감했다.
“자식을 성별로 지나치게 구분하는 일은 성별로 단속하거나 통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단속과 통제는 남자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요구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권용득 작가의 담벼락에 올라온 여러 댓글을 읽으며 두 가지가 떠올랐다. 먼저 미국 드라마 〈웨스트월드〉의 한 장면.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오너라. 연방 보안관을 쏴 죽인 노상강도가 아직 저쪽 산에 숨어 있어.”
“제가 애도 아니고 괜찮을 거예요.”
“내가 집행관이었을 때,”
“네, 아빠. 그때 얘긴 잘 알아요. 저도 알고 제게 청혼하러 왔던 남자들도 잘 알죠.”
“녀석들 생각은 뻔하지, 나도 한때 그랬으니. 술도 험하게 마시고 짓궂은 장난도 쳤었지.”
“그 거침없던 한량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래요?”
“네 아빠가 된 순간 녀석은 사라졌어. 네 덕에 진정한 나를 찾았다. 그러니 아무런 후회도 없어.”
“알아요 아빠.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올게요.”
두 번째는 미국 래퍼 나스(Nas)의 노래 〈도우터(Daughter)〉의 가사.
They say the coolest playas and foulest heart breakers in the world
사람들은 말하지, 잘 나가는 놈팡이들과 여자들에게 상처를 제일 많이 준 놈들에게God gets us back, he makes us have precious little girls
신이 복수를 한다고, 소중한 작은 딸을 안겨주는 거로Shit for ni**as with daughters, I call this
난 이걸 딸을 가진 놈들한테 보내는 노래라고 해Shit for ni**as with daughters, I call this
난 이걸 딸을 가진 놈들한테 보내는 노래라고 해Not sayin’ that our sons are less important
우리의 아들들이 덜 중요하다는 건 아니지만Shit for ni**as with daughters, I call this
난 이걸 딸을 가진 놈들한테 보내는 노래라고 해Nah, the way mothers feel for they sons, how fathers feel for they daughters
딸들을 향한 아빠의 마음은 아들들을 향한 엄마의 마음과 비슷하지When he date, he straight, chip off his own papa
아들이 데이트하면 정상적인 거라 생각하지, 아버지를 떠나는 거잖아When she date, we wait behind the door with the sawed off
그런데 딸이 데이트하면 우리는 문 뒤에서 총을 들고 기다리잖아Cause we think no one is good enough for our daughters
왜냐하면 그 누구에게건 우리의 딸들이 아깝기 때문이야Love
사랑해
뒷골목에서 험하게 살아온 래퍼에게 신이 형벌을 내린다고 한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딸을 주는 것으로. 이건 정말 문학적이고 신화적인 서사 아닌가.
한국 사회에 어느 순간 ‘딸바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 ‘딸 가진 아빠’의 맹목적 자상함이 놀림을 가장한 찬사의 대상이 된 것도 그 연장이 아닐까 싶다. 보안관이 총 쏘던 시대처럼 아이들이 ‘래퍼 아니면 마약상’을 꿈꾼다는 슬럼가처럼 지금 한국 사회 역시 우리의 딸들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험난한 곳이니까.
내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차라리 형벌처럼 느껴진다는 나스의 고백은 다른 딸들이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실토에 다름 아니다. 더 나아가, 본인이 다른 이의 딸들을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한 자백으로도,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지 못한 것에 대한 기성세대로서의 통한으로도 들린다.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더 진보할 수 있는 지름길은 부모, 특히 아빠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나 딸을 둔 아버지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본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딸을 둔 아버지이면서,
-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차별이 얼마나 일상적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 왜 이렇게 많은 여성이 남성의 폭력/성폭력에 희생되고 있는지(2015년 국감 자료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에 의한 살인 사건 피해자가 3일에 1명꼴로 발생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뉴스에서는 22세 청년이 대로변에서 만취한 채 동갑내기 여자친구를 주먹과 발로 때리고, 말리는 시민을 트럭으로 위협해 구속됐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대체 왜 이런 범죄가 이렇게도 많은 건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면
- 남성과 여성의 권력 격차에 대해 직시하지 않는다면
- 그러니까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다면
딸의 행복한 인생을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겠지만 그걸 이루는 방법은 놓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들이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나는 적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상대가 말하려는 바와 내가 말하려는 내용이 다르지 않음에도 내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자신이 얘기하려던 건 그런 게 아니다’라며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부정의 뜻을 표현해 오는 상황도 여러 번 겪었다.
‘아빠들이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라는 말 대신 다른 단어로 완곡하게 표현하는 게 ‘지혜로울’ 수도 있겠지만, 굳이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썼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는 이유가 ‘여성이 본인의 권리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의혹을 갖고 있다. 이 의심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자주, 같은 뜻이라면 이왕이면 이 단어를 사용해서 내 생각을 표현할 작정이다.
이쯤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대한 당신과 나의 정의가 같은지 짚고 넘어가자. 록산 게이는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책에서 본인이 과거에 페미니즘에 대해 가졌던 오해를 재미있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한다.
그 시절 누가 날 페미니스트라고 불렀을 때 최초로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왜 그렇지? 나 페미니스트 아니야. 나 남자한테 오럴 섹스 해줄 수 있단 말이야. (중략)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 록산 게이, 『나쁜 페미니스트』, 15쪽
페미니스트가 그런 사람이 아니면, 뭐냐고?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중략)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 앞의 책, 16-17쪽
페미니즘은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땅의 수많은 ‘딸바보 아빠’는 우리 딸들이 다른 아들들과 동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아이라고 해서 축구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경찰 역할을 맡지 못할 이유도 없다. 불필요한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고, ‘씩씩하다’는 칭찬보다 ‘예쁘다’는 칭찬을 선호할 이유가 없다.
바로 여기에, 아빠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내 딸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왜 이렇게 험난한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는 아버지들이 예비 사위와 술 대작을 하면서 ‘내 딸을 지킬 만한 사내인지’를 평가하는 모습이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셨다. 처음 남편을 소개하던 날, 아빠가 대뜸 “군대는 어디 다녀왔느냐”고 물으시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딸을 지키기 위한 더욱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길은 ‘딸을 지켜줄 남자’를 찾는 게 아니라 딸을 해치지 않는 세상으로 바꿔 가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책에서 ‘여학생들에게 공격자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려주는 데 집중할 뿐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에게 공격자가 되지 말라고 이르는 일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는데, 나는 이게 권용득 작가의 ‘단속과 통제는 남자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요구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라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다시 한번 솔닛을 소환해 본다. 미국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고 한다(우리나라에도 이런 통계자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연히 덜하리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는 폭력이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며, 왜 여성에 대한 남성의 범죄가 이렇게 흔한지 논의할 필요를 역설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면, 우리는 남성성에 대해서, 혹은 남성의 역할에 대해서, 더 나아가 아마 가부장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별로 나누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미국 남자들이 남을 살해한 뒤 자살을 저지르는 일은-일주일에 약 12건씩 벌어진다-경기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남자들은 경기가 좋을 때도 그러는데 말이다. (중략) 폭력의 유행병은 늘 젠더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된다. 모든 설명들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설명력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요인을 쏙 뺀 다른 요인들로만.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41쪽
딸을 세상에 내놓기가 겁난다면, 이 땅에 ‘나쁜 놈’들이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면, 한 번쯤 진지하게 역사 속에서 페미니즘이 이뤄 온 것과 추구하는 가치에 관심을 가져 보길 바란다. 폭력은 권력이고 성범죄가 만연한 사회상은 당신의 회사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차별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다른 성별을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이해하는 일도,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이해하는 일도, 원주민이 이주민을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테다. 알려는 의지를 갖기도 힘들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딸의 아빠’들은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 아닌가 싶다.
사회 곳곳에서 파워를 점유하는 건 대부분 중년 남성들이다. 기득권을 가진, 또는 조만간 갖게 될 사람들, 딸바보 아빠인 그들이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한다. 차별에 예민해졌으면 한다. 딸을 향한 당신의 사랑이 그런 힘을 발휘해서, 우리 사회가 더 진보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원문: 장수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