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는 분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는데 단칼에 거절했다. ‘재능기부, 비영리단체, 좋은 일, 맛있는 밥’ 등 무료 부탁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줄줄이 나오길래, “저는 돈 안 받으면 일 안합니다” 라고 잘라버렸다.
속이 후련했다. 이 거절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제대로 배웠더라면 인생이 훨씬 편했을 텐데… 그런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2.
오래전 미국서 기차여행을 하다 폴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열차에 문제가 생겨 한참 연착될 상황이 생겼는데 ‘에고 어쩔 수 없지’ 하고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 “보상해달라. 책임져라” 하며 큰 목소리를 냈던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폴과 나다. 우린 전우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금방 친해졌고 나중엔 초대까지 받아 폴의 집에 며칠 머물게 됐다.
돌돌 말아 올린 수염, 분신처럼 품고 다니던 우클렐레 등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포스를 느끼긴 했는데 집에 갔더니 폴은 엄청난 아티스트가 아닌가. 빈티지 캐논부터 니콘, 라이카 등 카메라가 약 스무대, 렌즈는 더 많고 각종 기타와 악기뿐 아니라 방 안은 물감과 캔버스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상상에 그리던 아티스트의 전형적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 놀랐던 것은 폴의 친구가 찾아왔을 때였다. 백지의 카드에다 쓱쓱 축하 글씨를 써 주더니 $15불을 자기 페이팔(미국에서 쓰는 온라인 결제 서비스)에다 넣으라 알려주는 것이었다. 난 속으로 ‘친구끼리 저 글씨 하나 써준 것 갖고 돈을 다 받네. $15이면 만 오천 원인데 그냥 해주지…’하고 생각했다. 폴은 이어서 티셔츠에 아주 간단한 그림을 그려주고 이건 $20이라고 했다.
와 미국 사람들은 정말 이런 계산이 정확한가 보다. 참 정 없네.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때가 바로 ‘아티스트로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가는 법’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알아보지 못하고 걷어찬 첫 번째 순간이다. 프로의 작품을 구입하는 건 당연한 건데 난 어리석게도 그걸 인간미 없는 미국문화의 단면이라고 치부해버린 것이다.
왜 난 이때 공들인 시간과 노력은 실제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까.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액수가 크건 작건 이 부분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는 걸 왜 보지 못했을까.
3.
다음은 내 부끄러운 기억. 중요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할 일이 있어서 2세 친구에게 부탁한 적 있다.
야 이거 엄청 짧고 간단한 건데 좀 해줄 수 있어? 완벽하게는 안 해도 되니깐 좀 해줘. 너한텐 엄청 쉬운 거야.
구역질 나는 부탁이다. 내가 뭔데 이게 간단하고 쉽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친구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지 짧은 문서라는 이유로, 친구는 영어가 더 편한 2세라는 이유로 내 마음대로 짐작해버린 것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다.
내가 심각한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후 누군가에게 똑같은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야 히바야, 이거 영상 진짜 짧은 건데, 너한테는 아무것도 아닌 거야. 막 화려하고 멋지게 안 해도 되니깐 이거 편집 좀 해줘.
영상은 길이가 짧다고 쉬운 게 아니다. 이건 어떤 느낌이냐면, 구구절절 설명보다 다른 예를 들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최 변호사, 이거 뭐 딱히 크게 이기지 않아도 되는데, 간단한 재판이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좀 맡아줘. 뭐 최변 맨날 하는 민사재판이니 별거 아닐 거야.
김 친구, 울 회사 와서 강연 한 번 해줘. 뭐 직원들 눈물 콧물 안 빼도 되니깐 그냥 편하게 하면 돼. 너 맨날 하는 이야기 있잖아. 그거 그냥 한 시간 반 정도만. 너무 애쓰지 말고
박 회계사, 아 이번에 폭탄 맞았네. 이거 어떡하나. 영수증이랑 자료 보내줄테니깐 조금만 줄여줄 수 있을까? 뭐 세금 안 낸다는 건 아냐. 그냥 너무 많아서. 좋은 데 가서 술 한 번 살게.
어이 이 포토, 이번에 우리 누나 결혼하 는데 와서 사진 좀 찍어주면 안 돼? 예쁘게 안 찍어도 돼. 그냥 너 좋은 카메라 있으니까, 신경 많이 쓰지 말고 몇 장만 찍어 달라는 거지. 아, 뽀샵도 조금… 괜찮지?
물론 이 예들은 ‘노 페이’를 기반으로 한다. 과장된 것 같기도 하지만 난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내 경솔한 행동에 깊이 반성했다.
4.
우리나라는 아직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예술, 기술 분야에 보수를 지불하는 데 인색하다. 지나치게 빨랐던 경제 성장에 비해 문화나 국민 의식 수준 고양 속도가 못 따라가기도 했고, 처음부터 무료로 음악, 영화 등을 다운 받는 방법이 범국민적으로 전파된 것도 한몫했으리라.
그러니 ‘왜 다들 내 기술을 공짜로 쓰려는 거지’ 하며 분통만 터뜨리고 있을 게 아니라 스스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수밖에 없다. 시간당 얼마, 작품당 얼마 하고. 가족, 친구, 지인 등 어느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그런 기준 말이다.
당연히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는 길이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다. (나도 아직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액수보다 관계의 문제, 자존감의 문제다. ‘혹시 이 부탁 안 들어주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돈만 밝히는 놈이라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휘둘리다 보면 이내 불행에 빠진다.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하게 살려면 무게 중심이 항상 내게 있어야 하는데 맨날 남 눈치를 보다 내 마음만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지금 이거 해주면 나중에 제대로 된 일 줄 것 같아서 맡고, 지금 잘 보여 놓으면 다음에 큰 도움될 것 같아서 그냥 해주고. 이렇게 신기루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물가에 가기도 전에 탈수증상이 찾아올 수 있다. 우리가 남이냐고? 남은 아니지. 일을 의뢰하는 순간만큼은 프로와 고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5.
아티스트. 평소에 자존심 센 척, 자기가 최고인 척, 맨날 즐겁고 행복한척 하지만 사실은 악플 하나, 전해 들은 말 하나에 쉽게 바스러져 버리는 예민하고 약한 인간일 뿐이다. 당신처럼. 너무나 짧은 인생, 아닌 것 같으면 당당히 거절하자.
원문: Hiba Kim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