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여성, 다뉴바에서 애국단 조직하다
1919년 8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Dinuba)시에서 ‘가정의 일용품을 절약해 독립운동 후원금을 마련하고 국내 동포의 구제 사업에 노력하며, 일화(日貨)를 배척하고 부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여성독립운동단체 ‘대한여자애국단’이 조직되었다.
다뉴바 지역은 1903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처음 미국에 상륙한 이래 본토에 정착한 한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다뉴바의 한인들은 일본 상품 배척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경찰원으로 이를 단속하게 할 만큼 남다른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다뉴바 지역의 부인들은 1919년 3월 25일부터 30일까지 협의해 ‘신한부인회’를 조직했는데, 이 회의 목적은 “아들, 딸 동포의 자유 정신을 고취해 부모국의 후원을 극력코저” 한다는 것이었다.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다뉴바의 신한부인회는 5월 18일 북미주지역 부인회를 통합하기 위한 ‘통고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8월 2일 각지의 부인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발기대회를 열고 합동을 결의했다. 이때 참석한 다뉴바의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의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의 한국부인회, 윌로우스의 지방부인회 등의 대표들이 참석해 8월 5일 마침내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게 된 것이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의 중앙총단은 다뉴바(1919.8.∼1923.10.), 샌프란시스코(1923.10.∼1933.3.), 로스앤젤레스(1933.3.∼현재)에 두었고 11곳에 지부를 두었다. 단원이 낸 연회비 3달러는 경상 경비에 쓰고 사업경비는 특별회비를 갹출해 썼다. 단원은 가장 많을 때 150여 명 정도였다.
대한여자애국단 결성의 주역은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일했던 강혜원(康蕙園, 1885~1982)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1905년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온 그는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녔고 1913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김성권(1875~1960)과 혼인, 다뉴바에 정착해 있었다.
1920년 3월 1일 정오, 다뉴바에서는 인근 지역의 한인들이 모여 세계 최초로 3.1 운동 1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대한여자애국단과 대한인국민회,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등이 힘을 합쳐 마련한 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은 350여 명. 당시 지역에 거주한 한인이 500명 내외였으니 거의 다 참석한 것과 진배없었다.
흰옷을 입은 여성들과 정장한 남성들이 도열한 가운데 대한제국 군인 복장을 한 대표가 말을 타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십 대의 자동차와 도보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며 시가행진을 했다. 미 주류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린 것이다.
초대 총단장 강혜원
1920년 3월 13일, 강혜원은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 겸 총부(總府)위원에 취임해 1924년까지 일했다. 비록 먼 이국땅이었지만 대한여자애국단의 활동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광복을 향한 열망만큼 눈부셨다. 그는 임시정부 지원, 독립신문 후원, 구미위원부 선전비, 간도동포 기근구제금, 광주학생운동 후원금, 충무공유적보존회 후원, 중국 군사 위로금, 중국 난민 구제, 일본상품 배척, 적십자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남편 김성권이 1931~1938년 이사장으로 활동하던 흥사단에 입단해 적극 활동했고, 1939년에 총부단장에 다시 선출되어 1942년 1월까지 대한여자애국단을 지도했다. 중일전쟁 때 송미령(장제스의 부인)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내고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미국 전시 공채를 매입하는 등 적극적인 전시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강혜원은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해 진보적 노선 편에서 활동했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해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지원 확보 활동을 했다.
강혜원은 1982년 5월, 96세를 일기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했으며 유해는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에게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지난해 11월, 김성권 선생(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어 대전 현충원에 안치되었다.
교민교육에 힘쓴 총단장 차경신
대한여자애국단의 또 다른 주역으로 차경신(車敬信, 1892~1978)을 빼놓을 수 없다. 평북 선천 출신의 차경신은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의 평등관을 정립하고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1918년 차경신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났다.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로서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한 차경신은 고향 선천에서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50여 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행하고, 1919년 11월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 총무 겸 재무로 피선되어 국내외를 다니면서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듬해 1920년 3월 1일에는 선천군 소재한 보성여학교와 신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8월 하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했다. 1921년에는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와 연계해 군자금을 모금해 여자연합단의 대표로 임정에 자금을 지원했다.
1924년 1월 미국으로 건너온 차경신은 초대 애국부인회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 한국어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 힘썼다.
1933년부터 7년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각지에 지회를 확대 조직하고 임시정부와 국내외 동포들의 구제사업에 힘썼으며, 도산 안창호와 함께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활동했다. 차경신은 일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197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
다뉴바의 애국선열 기념비
3·1운동 이후 교민들이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다뉴바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20년부터 매년 다뉴바 중심가에서 3·1운동 기념 퍼레이드를 벌였다. 2008년 4월, 다뉴바의 한인들은 한인장로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교회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다뉴바 애국선열 기념비’를 세웠다.
‘세상의 절반’이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 유공자는 270여 명(2016년 1월 기준), 전체(1만 4,262명)의 약 2%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숫자는 실제 역사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여자라는 이유로 잊히거나 남자의 보조 역할로만 자리매김 되면서 그 실체가 기록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강혜원과 차경신은 독자적인 역할과 헌신을 인정받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식민지 시기 여성들의 독립운동 참여는 여러 가지 제약에도 본인의 용기와 헌신으로 이루어지면서 남성의 그것에 못지않은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잊히고 유실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발굴하고 그것을 남성 독립운동가와 동등한 공훈으로 기리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미주 최고의 여성 독립운동가 강(김)혜원
- 5월의 독립운동가 – 차경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