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회사에서 비개발자 CEO가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글로벌 회사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저 시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획자란 무엇인가
우리나라 IT 회사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직책이 하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참 어려운 앱 기획자가 그것이다. 주로 서비스 환경에 필요한 요소들을 정리하여 이를 명세서나 스토리보드 혹은 그 둘 다의 형태로 문서화를 시키고, 운영과 개발팀 혹은 개발팀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주로 디자이너와 개발자), 경력이 쌓인 경우에는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까지 맡는 경우도 있다. 언뜻 들어보면 서비스 개발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좀 꼬아보면 디자이너도 아닌데 디자인을 하고, 개발자도 아닌데 개발 프로젝트 매니징 역할을 맡는다. 커뮤니케이션의 브리지 역할을 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디자이너와 개발자 사이를 이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둘 다 잘 모르니까 종종 디자이너는 아닌데 UX 설계의 책임을 맡아 사실상의 밑그림을 ppt로 그리기도 하고, 개발자는 아닌데 기능 구현과 서비스 배포 환경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 Elen Kim, ‘기획자라는 직군에 대하여’
다 잘하면 좋겠는데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은 찾기 어렵고. 기획자 자신이 봤을 때 10여 년간 웹/앱 기획자로 쌓은 커리어는 딱히 어디 가서 내세우기도 애매하고, 회사나 팀 입장에서는 없으면 불편한 데 있다고 편해지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기획자의 존재로 인해 일이 더 어려워지기도 하고, 없애자니 커뮤니케이션이 어려워지고 정리가 안 되고 등등… 참 애매한 포지션이다.
이건 같이 일한 어떤 기획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발자가 된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기획자와 유사한 포지션이었을 때 내 역할의 리뷰(?)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당시에는 똑똑하고 잘하는 기획자라고 생각했던 내 역할과 그 행동들이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애매함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기획자가 보는 기획자
농담을 섞어서 “창의력 같은 건 서비스 개발에서 필요 없는 것이다.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문제를 만들어 낼 때가 더 많다.”는 말을 종종 한다. 이건 포지션의 특성 자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앱에서 소식이나 공지를 보여줄 곳이 전무하다. 어디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
운영팀에서 위와 같은 요청을 전달한다고 생각해보자. 기획자로서 내가 이 일을 받게 된다면 우선 공지사항의 의미에 대해서 우선 정의하려고 할 것이다. 다양한 종류가 있을 것이다. 콘텐츠적인 측면에서는 공지, 이벤트, 알림, 마케팅 정도가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편 방법적인 측면에서는 하단 배너, 앱 열람 시 팝업, 리스트-디테일 스타일 뷰, 롤 배너, 푸시 알림, 문자, 이메일 정도가 있겠다. 이 중 공지 및 이벤트 콘텐츠 팝업, 롤 배너, 리스트-디테일, 푸시 형태로 알림을 할 수 있는 기능을 만들겠다고 개발 요구서를 만들고, 물샐틈없는 UX를 설계한 ppt를 들고 개발자에게 보여줬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기획자라면 ‘일 잘했네’라고 생각했을 테고, 여기까지 읽은 개발자라면 아마 잘은 몰라도 고개를 저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운영팀의 요구사항을 읽어보자.
“우리 앱에서 소식이나 공지를 보여줄 곳이 전무하다. 어디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
운영팀에서 바라는 것은 아마 그거였을 것이다.
당장 알려야 할 것들이 있는데, 앱 내에서 보여줄 방법이 전무하다. 어떠한 형태라도 좋으니 최대한 빠르게 뭔가 커뮤니케이션할 채널이 필요하다. 이로 인한 소통 비용을 줄이고 싶다.
운영팀에서 바라는 것은 뭐든 공간이었는데 기획을 거치면서 거대한 프로젝트로 탈바꿈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개발자가 보는 기획자
왜 개발자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을까. 일단 이 기능을 만들기 위한 절차를 생각해보자. 앱이라면 우선 iOS/Android 두 플랫폼 개발자와 디자이너, 최소 1명의 백엔드(+백오피스) 개발자까지 4명이 필요하다. 뭐 그건 당연한 거니까 좋아. 개발자도 대충 운영팀의 니즈는 알고 있었을 테니 이제 반문할 거다.
“왜 공지사항 게시판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여기까지 스펙을 올렸습니까?”
기획자는 이렇게 대답할 거다.
“공지사항 게시판은 기본이고, 공지사항 있어도 안 읽으니 팝업도 필요하고, 그래도 사람들이 안 볼 테니까 푸시로 꼭 필요한 것들을 전달해야 합니다. 또 롤 배너는 간단하니까 만들어놓으면 여러모로 좋은 용도로 쓰일 거예요.”
여기서 디자이너가 한마디 한다.
“저희 롤 배너 넣을 곳이 없는데요?”
개발자가 보기에는 게시판(혹은 그와 유사한 형태) 하나면 될 것을 왜 여기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당연히 저런 다양한 기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어차피 안 읽는 공지사항 기능 때문에 이 모든 걸 해야 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푸시 등이 어느 정도 개발되어 있으면 모를까 아니면 바닥부터 쌓아 올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논쟁이 일어났고 결국 기획자의 의견을 따라 그대로 만들어보기로 한다.
우선 api 만으로는 개발이 어려워 푸시 서버 개발을 위한 개발자를 1명 더 붙였다. 푸시를 만들려니까 그냥 만들면 서버가 부담스러워 할 테니 queue 설정이 필요할 것 같다. 개발 기간을 1주 정도 미뤄야 할 것 같다. 디자이너는 롤 배너를 넣을 공간이 없다 보니 기존 디자인을 일부 수정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하루 이틀 정도 예상보다 더 소요될 것 같다.
프론트는 더 가관이다. 없던 푸시를 설정해야 하니 인증서니 뭐니 손이 가고 푸시 받을 설정이 추가된다. 여기에 당연히 롤 배너 투입으로 인한 디자인 변경, 공지사항 게시판 개발이 필요하다. 역시 최소 1주일 정도는 잡아야 테스트니 뭐니 해야 할 것 같다. 게다가 특성상 푸시는 만들어 놓지 않으면 테스트하기도 힘들다.
개발은 3주 정도에 완료되었고, 앱 리뷰 기간이 끝나니 거의 한 달 정도 소요되어 해당 기능이 배포되었다. 여전히 유저는 공지사항을 읽지 않고, 푸시와 팝업이 뭐냐며 앱 리뷰에 욕이 올라온다. 구매기록도 삭제해달라는 글이 부쩍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푸시는 하루에 하나를 보내는 일도 별로 없고 롤 배너는 왜 만들었나 싶다. 개발자는 분개하고 디자이너는 UI가 후져졌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운영팀에서 보는 기획자
운영팀에서 필요한 건 그냥 공지사항 게시판 정도였다. 최근 잘못 알려진 루머 때문에 해당 CS가 늘어나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말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공지사항을 참고해달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앱은 급하게 만들다 이러한 부분을 많이 신경 쓰지 못했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요청하면 될 것 같다.
한 1주일 정도면 될 줄 알았던 기능이 한 달이나 걸려서 개발되었는데 기능이 완벽하지는 않다고 한다. 일단 좀 어리둥절하긴 한데 기능이 있다니 써보기로 한다. 백오피스 기능이 처음에는 없어서 개발자에게 문서를 만들어 보내면 직접 DB에 넣어준다고 한다. 푸시 기능이 있다고 해서 푸시를 열심히 보냈더니 리뷰가 난리가 났다. 개발팀의 불만도 있고 해서 푸시는 제한적으로 쓰기로 했다.
우리가 바란 건 그냥 공지사항인데 이거 개발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공지사항이다 보니 사실 그렇게 자주 쓸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쨌든 뭐 있다고 하니 쓰자. 다다음주 정도에나 백오피스는 완성된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실제로 비슷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모두 자기의 입장과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 되었다. 이것은 포지션과 직무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를 지닌다고 봤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이 일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게시판 하나 만들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명세서를 쓰다 보니까, 쓸 내용이 너무 없다. 우리 앱이 아직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건 사실이니까 이참에 다양한 알림 방식을 고려해보게 되었다.
여러 대안을 늘어놓다 보니 확실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많다. 이 중 몇 가지를 추려서 기획서를 작성하니 생각보다 양이 많고 백오피스 업무 또한 만만치 않아졌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놓으면 잘 써먹을 테니 스펙을 확장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니즈에서 벗어난 것 같긴 하지만, 다 필요한 거니까.
특히나 아직 경험이 부족한 젊고 열정 있는 사람이 많은 스타트업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실제로 개발하기까지 어떠한 노력과 절차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본다. 어떠한 산업 분야가 성장하면 분업화가 뒤를 따라온다. 예전에는 배(땟목을 생각해보자)를 하나 만들어도 재료부터 모든 걸 대부분 혼자 만들었다면, 이제는 배에 들어가는 못조차도 한 회사의 제품을 쓰는 일이 많지 않다.
개발도 마찬가지로 웹 마스터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혹은 역할이) 모든 걸 전부 도맡는 시대다. 이제는 웹 프론트니 앱이니 서버니 시스템 엔지니어니 하여튼 다양한 개발자가 함께 일하고 있다.
개발자들조차도 서로의 일에 대체 불가능한 지점이 많아지는 시점이 왔다. 이를 전문지식 없는 기획자가 따라가기 쉽지 않다. 즉 내부에서 어떠한 과정과 절차로 개발이 이루어지는지 비개발자가 이해하기보다 개발자가 기획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추어 가는 일이 많아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데브옵스(DevOps)나 그로스 해커(Growth Hacker) 같은 프로그래머라고만 부르기에 다소 걸쳐있는 역할이 늘어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다. 개발자가 기획/운영을 배우는 게 빠를까, 기획자가 개발을 배우는 게 빠를까? 후자의 경우 아마 직업적으로 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기획자는 사라지는가?
물론 사라진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중요성이 다른 전문 분야에 비해 가파르게 작아지고 있다. 모두가 이메일을 쓰는 시대에도 여전히 편지를 쓰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아마 기획자라는 롤 자체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집배원의 수와 대우가 예전 같지 않은 것처럼 비슷한 경과를 보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은 전문성이라는 것에 있다. 앱 기획자의 전문성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서비스 기획자나 마케팅 기획자는 지금보다 더 입지가 강해질 수도 있다. 서비스 기획과 운영은 어디에서나 필요한 기능이고 노하우가 쌓여야 내릴 수 있는 판단 또한 분명 존재한다. 마케팅 기획이야 회사가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테고.
앱 기획자는 UX 디자이너도 아니고 PM도 되기 어려운 실무자 아닌 실무자로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될 것이다. 지금처럼 개발자의 역할이 다양화되고 전문화되는 시점에서 혼자 일할 수 없는 기획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갈 것이다.
그럼 CEO는?
확실한 건 이제 IT 회사는 B2C, B2B 가리지 않고 기술 기반이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실리콘밸리의 페이스북, 레딧 혹은 우버뿐 아니라 한국의 대표적인 서비스 회사인 네이버나 카카오만 봐도 기술적 성취가 대단하다. 단순히 콘텐츠나 UI, 서비스 요소 가지고 차별화를 하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머신러닝, 데이터 분석, 자동화 등을 통해서 서비스의 품질을 전반적으로 향상시키고, 사용자의 다양한 니즈에 맞춰서 앱이 복잡해지는 와중에도 속도와 디자인을 희생하지 않는 형태로 개발하기 위한 엔지니어링의 필요도가 높아지고 있다. 한마디로 쉬운 건 이미 다 했다는 말이다.
한 회사의 명운을 좌우하는 것은 역시 경영자라고 볼 수 있다. 경영자는 다양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현대 기업의 꽃인 IT 분야에서 대표자는 그 속도와 변화무쌍함으로 인해 이러한 중요한 결정들을 자주 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모든 기술은 일정 정도의 시간과 노력, 금전의 투입이 요구된다. 기술을 모르는 대표자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야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이 때문에 최근 글로벌 IT 기업의 CEO 자리에 엔지니어 출신의 인사가 내정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퇴사를 결정하고 창업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면서도 큰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개발자로서 내 몸값은 창업하고 고생하는 동안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진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 또 드는 생각은 개발자로 전향하기에 지금만큼 좋은 시기는 없을 거라는 점이다. 다양한 오픈 소스나 무료 강좌가 인터넷이 그야말로 널려 있고, 직업 개발자의 수요도 매우 높다.
지옥 같은 2000년대를 지나 2017년 현재, 개발자처럼 대우 좋으면서도 일하기 편한 직업은 별로 없다. 누가 시키는 대로 개발만 하면서 좋은 개발자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본 적 없다. 자연스레 기획자의 역할이 점점 더 축소될 것이고, 개발자에게 일 자체를 시키지 않고 알아서 하게끔 하는 회사가 대부분 좋은 회사고 잘 되는 회사인 것으로 안다.
2010년 정도까지의 SI 전성시대나 웹 기술 태동기에는 기획자가 회사의 꽃이었다. 많은 걸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를 원하고 일정을 맞춰 납기하는 일이 많았던 시기에 필요한 것이 기획자였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물건처럼 팔기보다는 서비스를 운영해 나가야 하는 시기에는 개발자가 그 지위를 빼앗아 버렸다.
가까운 미래보다는 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쉽고 한 사람의 행동은 예상하기 어려워도 한 무리의 사람은 의외로 알기 쉽다. 기획자 아무개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획자 직종은 이미 확연하게 점차 수요가 줄어드는 추세다. 쿠팡에서는 이미 기획자 없이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직접 소통하며 업무를 처리한다고 한다. 이는 쿠팡이 서비스 회사이기 때문이고, 개발자의 가능성을 믿고 또 의지하는 기술 기반 회사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은 모든 포지션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기획이나 운영 경험 또한 개발자라고 필요 없을 리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요구되는 능력 또한 확연하게 달라지고 있다. 언제까지고 지금 같은 개발자 천하가 지속되지는 않더라도 그 수요는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기획자라면 다양한 경험을 쌓아 운영이나 서비스, 유저 스페셜리스트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UI나 UX처럼 디자이너가 훨씬 더 잘하는 영역이나 일정 관리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는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 끝이 명확하다. 치열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변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전환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회사 또한 미래가 아름답진 않을 것이다.
원문: Make It Yourself
부록: 다른 생각들
- 이태희, ‘(개발자)가 !(개발자)와 일하는 방법’
- 정경진, ‘기획자는 결국 사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